초한지 인생 공부 - 오만과 냉정 사이, 천하를 가른 심리전 ㅣ 인생공부 시리즈
김태현 지음, 사마천 원작 / PASCAL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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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 인생 공부』라는 제목을 처음 보면,

‘초한지’가 무엇인지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 책이 조금 멀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초한지는 중국 진나라가 무너진 뒤, 천하의 주인이 되기 위해

초나라의 항우와 한나라의 유방이 맞붙었던 격동의 역사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사면초가, 토사구팽, 배수진, 파부침주 같은 고사성어도 바로 이 시대의 인물과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니까 초한지는 단순한 옛 전쟁 이야기가 아니라, 권력을 잡으려는 사람들, 살아남으려는 사람들, 자신의 재능을 증명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뒤엉킨 거대한 인간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초한지 인생 공부』가 다른 초한지 관련 책들과 확실히 다른 점은,

이 이야기를 단순히 역사적 사건이나 영웅담으로 정리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보통 초한지를 떠올리면 항우와 유방의 승패, 한신의 군사적 천재성, 유방의 리더십 같은 결과 중심의 이야기가 먼저 나온다. 하지만 이 책은 그 결과보다 한 걸음 더 안쪽으로 들어간다.

항우는 왜 그토록 강했지만 끝내 무너졌는지, 유방은 왜 완벽하지 않았는데도 사람을 얻었는지, 한신은 왜 뛰어난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비극을 피하지 못했는지, 여태후는 왜 권력을 향한 갈망 속에서 잔혹해졌는지를 ‘심리’의 관점에서 읽어낸다.

책의 프롤로그는 장기판 이야기로 시작된다.

어린 시절 골목길이나 동네 어귀에서 보던 장기판 위의 ‘초’와 ‘한’이라는 글자.

저자는 그 작은 나무판이 단순한 놀이 도구가 아니라, 2,200년 전 대륙의 주인을 두고 모든 것을 걸었던 인간들의 전쟁터를 축소해놓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 시작이 좋았던 이유는 초한지가 갑자기 어렵고 먼 고전이 아니라,

우리 삶 가까이에 오래 머물러 있던 이야기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장기판 위에서 한 수 앞을 내다보려 애쓰는 사람들처럼,

초한지 속 인물들도 생존과 존엄, 권력과 사랑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선택했다.

이 책은 바로 그 선택의 배경에 있던 마음을 따라간다.

『초한지 인생 공부』는 사마천의 『사기』를 바탕으로, 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의 난부터 기원전 179년 여태후 몰락 이후까지 약 30년에 걸친 시간을 다룬다. 여기에 『서한연의』의 문학적 장면 묘사를 더해 역사적 사실에 인간적인 감정과 심리의 결을 입힌다. 그래서 책은 정보만 나열하는 역사책처럼 딱딱하지 않고, 인물들의 선택을 따라가며 한 편의 대하드라마처럼 읽힌다.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되, 그 안에서 인간의 감정과 갈등을 읽어내는 방식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책의 초반부에서는 진나라 말기의 혼란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영원할 것 같았던 진 제국은 진시황 사후 빠르게 흔들린다. 여불위의 야망, 조희의 고독, 노애의 야심, 진시황의 두려움은 궁궐이라는 좁은 공간 안에서 뒤엉키며 결국 제국의 균열로 번져간다.

특히 여불위가 버려진 왕손 이인을 보고 ‘기화가거’, 즉 훗날 큰 이득을 남길 보물로 여긴 장면은 인상적이다. 한 사람의 계산과 투자가 한 왕조의 운명을 바꾸지만, 동시에 권력의 불안과 의심을 키워 결국 몰락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 부분에서 책이 말하는 ‘권력의 착각’이 선명하게 보인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했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지 못했고,

불로초와 암살의 공포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영원한 제국을 꿈꾸었지만, 그 제국은 진승과 오광의 봉기 이후 빠르게 무너졌다.

이 과정을 통해 권력이 강해질수록 오히려 두려움도 함께 커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적인 욕망이 공적인 권력을 흔들 때 한 개인의 상처와 불안이 얼마나 큰 역사적 파국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도 함께 생각하게 만든다.

이어지는 진승·오광의 난은 억눌린 자들의 외침으로 읽힌다.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라는 말은 단순한 반란의 구호가 아니라, 오랫동안 쌓여온 불평등과 억압이 폭발한 순간이었다. 정해진 기한을 어기면 처형당해야 하는 진나라의 가혹한 법 앞에서, 진승과 오광은 죽음을 기다리는 대신 봉기를 선택한다.

이 장면은 초한지의 시작이 위대한 영웅 한두 명의 등장으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시대의 결핍과 민심의 분노에서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책은 진승과 오광을 무조건적인 혁명 영웅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봉기 이후 진승이 왕이 되자, 그는 자신이 외쳤던 평등의 정신을 잃고 권위에 집착한다.

옛 친구를 처형하고, 소통의 문을 닫고, 주변을 감시와 검열로 채운다.

결국 사람들은 그에게서 멀어지고, 봉기의 불길은 오래가지 못한다.

이 대목을 읽으며 사람은 어려울 때보다 오히려 무언가를 얻은 뒤에 더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가 이상이 될 수도 있지만, 권력을 만나면 오만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점이 씁쓸하게 남았다.

항우의 이야기는 가장 강렬하다. 그는 신화적인 무력과 자존감의 화신 같은 인물이다.

어린 시절부터 한 사람을 상대하는 검술보다 만인을 상대하는 학문을 배우겠다고 말했던 항우는,

처음부터 천하의 판을 바라보던 사람이었다.

거록대전에서 보여준 파부침주의 결단은 항우라는 인물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배를 가라앉히고 솥을 깨뜨려 퇴로를 끊은 그는 병사들을 죽을힘으로 싸우게 만들었고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다. 항우가 왜 당대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었는지 이해되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항우의 강함만을 찬양하지 않는다.

항우는 누구보다 강했지만,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데 실패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힘을 세상의 법칙처럼 믿었고, 타인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데 서툴렀다.

전쟁에서는 압도적인 존재였지만, 사람을 품고 권력을 나누는 정치적 그릇은 부족했다.

그래서 항우의 몰락은 단순히 전쟁에서 패배한 결과가 아니라,

자기 안의 오만과 고립을 끝내 넘어서지 못한 한 인간의 비극으로 다가온다.

반대로 유방은 완벽한 영웅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젊은 시절 그는 한량처럼 보였고, 술과 사람을 좋아했으며, 성실한 농사꾼이나 모범적인 관리와도 달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유방에게는 사람을 편하게 만들고, 상대의 마음을 읽고,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기꺼이 쓰는 힘이 있었다. 그는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소하의 행정, 장량의 책략, 진평의 이간책, 한신의 군사적 재능을 받아들였고, 그들의 능력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채웠다.

이 지점이 『초한지 인생 공부』에서 가장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종종 완벽한 사람이 리더가 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오래가는 리더는 자신의 결핍을 인정하고 사람을 품을 줄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유방은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생존과 실리 앞에서 유연했고,

무엇보다 사람을 자기 확장처럼 받아들일 줄 알았다.

이 책에서 말하는 ‘지혜로운 불완전함’이라는 표현이 유방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말처럼 느껴졌다.

한신의 이야기는 또 다른 방향으로 마음에 남는다.

그는 전쟁에서는 천재였지만, 정치의 세계에서는 끝내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젊은 시절 가난과 멸시 속에서 자랐고, 남의 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굴욕까지 견뎌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에서 분노를 터뜨리지 않았다. 복수할 수 없는 순간에 무리하게 칼을 뽑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그 침묵은 비겁함이 아니라 생존의 전략이었다.

훗날 전쟁의 신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펼친 것도,

그 긴 수모와 인내가 쌓인 결과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한신은 결국 비극으로 향한다.

그는 전장에서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전략가였지만, 정치적 결단 앞에서는 망설였다.

주군을 배신하지 못하는 도덕적 결벽, 자신이 이룬 공에 대한 자존, 권력에 대한 미련 사이에서 그는 오래 머뭇거린다. 이 부분을 통해 능력만으로는 인생의 판을 끝까지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실력이 있어도 때를 읽지 못하면, 결정적인 순간 선택하지 못하면,

자신이 쌓아 올린 모든 것이 오히려 자신을 위협할 수 있다.

이 책의 마지막에 정리되는 항우, 한신, 유방의 심리 비교도 좋았다.

항우는 자신의 힘을 믿었지만 타인을 품지 못했고, 한신은 천재였지만 결단의 순간을 붙잡지 못했으며, 유방은 불완전했지만 사람을 얻어 제국을 세웠다.

이 세 사람의 대비는 초한지를 단순한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삶의 거울로 만든다.

나도 어떤 순간에는 항우처럼 내 능력만 믿고 타인의 말을 듣지 않았고,

어떤 순간에는 한신처럼 답을 알면서도 망설였다.

또 어떤 순간에는 유방처럼 부족함을 인정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초한지 인생 공부』는 초한지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도, 이미 항우와 유방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도 다른 방식의 재미를 준다.

초한지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이 책을 통해 초한지의 큰 흐름을 이해할 수 있고,

이미 알고 있다면 인물들의 심리와 선택을 통해 새롭게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역사 속 영웅들을 멀리서 바라보게 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의 선택 앞에 나를 세워보게 한다.

나는 지금 항우처럼 힘으로 밀어붙이고 있는지, 한신처럼 두려움 때문에 결정을 미루고 있는지, 아니면 유방처럼 나를 낮추고 사람을 얻어가고 있는지 묻게 된다.

초한지의 장기판 위에서 중요한 것은 가장 강한 말이 아니라,

판을 끝까지 읽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초한지 인생 공부』는 역사와 고전, 인간 심리와 리더십을 함께 읽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인문학 책이다.


ㅡ

'파스칼/리텍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유방은 젊은 시절, ‘한량’이라 불리며 국가의 대사를 논할 인물로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알아가면서도 이상하게 그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유방이 가진 천성적인 친화력과 사람을 보는 눈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마을의 거지에게도 말끝을 흐리며 웃어주었고, 자신의 하인을 대할 때도 반말을 하거나 함부로 다루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귀를 기울였고, 사소한 부탁도 쉽게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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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함께 살아보기로 했다 - 트라우마와 삶 사이, 멈추지 않고 걸어온 기록
이안나 지음 / 미다스북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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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함께 살아보기로 했다』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나는 이 책이 누군가와의 관계를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이 제목에서 말하는 ‘함께’는 다른 사람만을 향한 말이 아니었다.

오래 밀어내고 싶었던 기억, 자꾸만 나를 멈춰 세우는 불안, 어른이 된 뒤에도 문턱 앞에서 한 번 더 망설이게 만드는 어린 시절의 나와 이제는 함께 살아보겠다는 말처럼 느껴졌다.

왜 하필 ‘이제는’이라는 말을 붙였을까. 책을 다 읽고 나니 그 말이 조금 알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숨고, 피하고, 괜찮은 척하며 살아왔다면, 이제부터는 그 시간을 없던 일로 만들지 않고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겠다는 조심스러운 다짐 같았다.

이 책은 트라우마를 다룬 에세이지만, 흔히 말하는 극복담처럼 읽히지는 않았다.

저자 이안나는 어린 시절부터 폭력과 불안, 가난과 고립을 겪으며 자라온 시간을 차분히 꺼내놓는다.

그런데 그 방식이 과장되어 있지 않아서 더 마음에 남았다.

어떤 문장은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오래 멈추게 만들었다.

상처를 크게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데도 그 안에 얼마나 오래 숨죽인 시간이 있었는지 느껴졌다.

책의 초반에서 저자는 “세상은 문틈으로 다가왔다”고 말한다.

이 문장이 이 책 전체를 여는 문처럼 느껴졌다. 어린아이였던 저자에게 세상은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문을 닫는 일도, 문을 여는 일도 혼자 배워야 했고, 멀쩡해 보였던 날들 안에는 겁에 질린 아이의 소리 없는 외침이 있었다. 이 책은 그동안 드러낼 수 없었던 이야기이자 더는 같은 방식으로 숨고 싶지 않아 남겨두는 기록이었다.

특히 문을 닫는 법을 먼저 배웠다는 고백은 읽는 내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엄마가 돌아오지 않는 밤이면 저자와 동생은 단둘이 집에 남겨졌다.

벨이 울리면 숨을 죽였고, 문밖의 웃음소리와 발소리, 알 수 없는 기척은 어린 자매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왔다. 엄마가 남긴 “절대 문 열지 마”라는 말은 아이들에게 하나의 생존법이 되었다.

누군가 문밖에서 벨을 누르면 “어른 안 계세요”라고 외쳐야 했던 아이.

그 말은 문을 열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었고, 동시에 안쪽에 머물 수 있게 해주는 작은 방어막이었다.

공포는 집 안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친구 집에서도, 동네에서도 폭력은 다른 얼굴로 반복된다. 동네 남자아이들이 문을 부술 듯 두드리던 날, 아이들은 위급할 때 누르라고 배웠던 번호로 전화를 걸지만 경찰은 오지 않는다. 그날 이후 저자는 현관문이 잠겼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고, 잠금쇠와 보조키까지 확인하는 아이가 된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조심성 많고 말 잘 듣는 아이였을지 모르지만, 사실 그 조심성은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진 방식이었다.

도움을 기대하지 못했던 시간은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도 오래 이어진다.

저자는 울음을 들키지 않는 법부터 배웠고, 도움을 기대하기보다 자기 안의 문을 닫아두었다고 말한다. 어른이 언제든 도와주러 올 거라는 생각은 오산이었다. 오지 않거나, 늘 너무 늦었다.

그래서 그는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도 먼저 혼자 해결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야근이 늘어나도, 아파도, 마음이 다급해도 모든 걸 혼자 해결했다는 고백이 낯설지 않았다.

정말 괜찮아서가 아니라, 괜찮다는 말이 대화를 끝내기에 유용했기 때문이라는 문장은 오래 생각하게 했다. 나도 가끔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말해버릴 때가 있다.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더 설명할 자신이 없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런 말 뒤에 숨어 있는 오래된 마음을 조용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책을 읽으며 가장 아팠던 건, 저자가 겪은 폭력과 가난 자체도 물론이지만 그 이후의 방식이었다.

아빠의 사업 부도 이후 낯선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오고, 집 안 곳곳에 빨간딱지가 붙는다.

냉장고와 티브이, 벽에 걸린 그림 위에 같은 색의 종이가 붙어 있는 장면은 집이 더 이상 나를 품어주는 공간이 아니게 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저자는 평소처럼 집을 정리하고, 우리 것이 아니게 된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 저녁을 먹는다. 누구 하나 늘 하던 일을 멈추면 그날이 특별한 날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였다는 말이 너무 슬펐다.

가난은 단순히 불편한 문제가 아니었다. 저자에게 가난은 들키고 싶지 않은 일이었고, 숨겨야 하는 일이었다. 학교에서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나눠주던 문제집은 도움이면서 동시에 표시처럼 느껴졌고, 이름이 불리는 순간 모든 것이 설명되어 버릴 것 같았다.

대학생이 되어 어학연수나 유럽 배낭여행을 가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야 할 때도 침묵만으로는 부족했다. 결국 저자는 설명 대신 관계를 포기하고, 열세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가난을 숨긴다.

위험이 될 만한 사람을 하나씩 내려놓는 방식은 그렇게 오래된 생존법이 되어갔다.

이 책은 트라우마가 꼭 큰 사건의 기억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문소리에 놀라는 것, 늘 출구를 먼저 찾는 것, 사람들 앞에서 울지 못하는 것, 도움을 청하기 전에 혼자 해결할 방법부터 찾는 것, 상대가 묻기 전에 먼저 괜찮다고 말해버리는 것.

이런 작은 습관들이 사실은 오래된 상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저자는 하나씩 보여준다.

뒤로 갈수록 저자가 지나온 시간은 더 깊은 곳까지 이어진다.

통제는 늘 큰 소리로 다가오지 않았다. 때로는 배려의 얼굴을 하고 걱정스러운 말투로 다가왔다.

그래서 더 늦게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폭력보다 상대의 미래를 먼저 걱정하던 순간,

저자는 자신이 갇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겨울 찬 바람을 맞으며 또다시 도망치고, 공중화장실 제일 마지막 칸에 몸을 숨긴 장면에서는 마음이 많이 아팠다. 혼자 외로운 싸움을 이어온 사람이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숨을 삼키는 모습이 너무 선명하게 느껴졌다.

주말의 연구실에서 겪은 불안의 장면도 오래 남았다.

조용히 일할 곳이 필요해 아무도 없는 토요일 오후 연구실로 향했고, 컴퓨터도 모니터도 서류도 모두 정상적으로 놓여 있었다. 소음도 없고 위험도 없고 누군가 지켜보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시야가 좁아지고 숨이 막히며 불안이 밀려온다. 이 부분은 내가 경험했던 증상과 닮아 있어서 놀라기도 하면서 읽었다.

불안한 감정들, 그리고 타인을 통해 미움을 받는 듯한 감각이 공황장애 같은 증상으로 나타날 때가 있다. 한 번 경험하고 조금 나아진 것 같아도 완전히 사라졌다는 느낌은 잘 들지 않는다.

비슷한 상황이거나, 심지어 아무 일도 없는 상황에서도 그 감각이 불쑥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쉽게 알 수 없는 불편함이기에 나는 이 부분을 더 깊이 공감하며 읽게 됐다.

그래도 이 책은 끝내 무너지는 이야기로만 남지 않는다. 저자는 자신이 기적처럼 살아난 것이 아니라, 매일 새로 시작되는 싸움 끝에 여기까지 왔다고 말한다.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았지만 그 싸움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어졌고,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살면서도 자신과 지켜야 할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이 겪고 있던 것들이 내가 이상해서가 아니라 지나온 시간의 결과라는 쪽으로 생각이 옮겨간다. 지난날 왜 도망치지 못했는지 묻고 자책하는 대신, 그 시간을 잘 지나온 사실을 기억하게 된다.

『이제는 함께 살아보기로 했다』가 좋았던 이유는 회복을 너무 쉽게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상처가 사라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문을 열어도 괜찮아지는 데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마흔이 되어서야 조금씩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치유란 과거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오늘을 선택하는 일이라는 말처럼, 회복은 어느 날 갑자기 단단한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니라 아직도 문턱에서 멈추는 나를 알아차리고 그런 나를 더 이상 미워하지 않는 일에 가까운 것 같다.

결국 제목 속 ‘이제는’은 너무 늦은 말이 아니라, 이제라도 시작해보겠다는 말처럼 느껴졌다. 상처를 없애겠다는 말이 아니라, 상처 입은 나를 더 이상 밖에 세워두지 않겠다는 말이다. 문을 닫아야만 하루를 버틸 수 있었던 아이, 울지 않는 법을 먼저 배운 아이, 도움을 기대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던 아이와 이제는 함께 살아보겠다는 다짐. 앞으로 저자의 삶에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날들이, 불안보다 편안함이 더 오래 머무는 날들이 조금씩 많아지기를 응원하게 된다. 오래 괜찮은 척 살아온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으며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작은 아이를 한 번쯤 조용히 바라보게 될 것 같다.

ㅡ

'이안나 작가'님께 도서를 선물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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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란 과거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오늘을 선택하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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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라도 군산 - 바다가 부른다, 이야기가 있다, 오래도록 새로운 여행지, 군산 ㅣ 언제라도 여행 시리즈 4
권진희 지음 / 푸른향기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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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라도 군산』은 제목부터 괜히 마음이 갔다. 그런데 사실 나는 군산이라는 도시를 잘 몰랐다.

어디에 어떤 분위기의 도시인지 막연했고, 여행지로는 왠지 오래된 느낌의 도시라는 이미지 정도만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군산에 가면 짬뽕을 먹는다는 이야기나, 야채빵으로 유명한 오래된 빵집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은 있었지만 그것으로 군산의 느낌을 알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군산은 내게 궁금한 도시이면서 흐릿한 도시였다.

그런데 『언제라도 군산』을 읽다 보니 그 흐릿했던 도시가 조금씩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관광지 정보를 알려주는 여행서가 아니라, 군산을 오래 좋아해온 사람이 자신이 아끼는 공간과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 보여주는 느낌에 가까웠다.

유명한 장소보다 골목의 공기, 오래된 나무 한 그루, 자주 가는 책방과 카페 같은 것들이 더 오래 남는 책이었다.

책의 초반에 나오는 군산이라는 이름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 깊었다.

저자는 건축을 배우던 시절 친하게 지내던 중국인 교환학생과 군산 앞바다에 갔던 기억을 떠올린다.

산간 지방에서 자란 그에게 군산 앞바다는 첫 바다였고, 그는 “바다가 이렇게 금방이구나!” 하고 감탄했다고 한다. 그런데 동시에 ‘군산’이 무리 군, 뫼 산을 쓴다는 사실을 신기해한다.

지금의 군산은 산보다 바다와 평야의 이미지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원래 군산은 선유도, 신시도, 무녀도 같은 섬들을 묶어 부르던 이름이었다고 한다.

섬들이 산처럼 무리 지어 있다는 뜻이라는 설명을 읽고 나니 도시 이름조차 다르게 보였다.

여행지는 원래 이런 식으로 가까워지는 건가 싶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좋았던 건 저자가 군산을 바라보는 속도였다.

요즘 여행 콘텐츠를 보다 보면 어디를 꼭 가야 하고, 무엇을 먹어야 하고, 사진은 어디서 찍어야 하는지가 중요할 때가 많다. 그런데 『언제라도 군산』은 그런 방식과 조금 다르다.

오히려 천천히 걷고, 우연히 멈추고, 마음에 드는 공간에 오래 머무는 시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명궁칼국수와 영화건강원 앞 버드나무 이야기가 특히 기억에 남았다.

저자는 칼국수를 먹고 나오다 가지치기된 나무 한 그루를 발견한다.

처음에는 무슨 나무인지 몰랐지만 바로 검색하지 않고 계절을 기다린다.

3월에는 웅크린 듯하던 나무가 4월에는 조금씩 잎을 내고, 5월이 되어서야 버드나무라는 걸 알아차린다. 이후 여름에는 그늘을 만들고, 가을이 지나면 다시 가지치기를 당한다.

읽으면서 괜히 마음이 차분해졌다. 여행이라는 게 꼭 거창한 경험이 아니라, 어떤 나무 한 그루의 계절을 기억하게 되는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 ‘틈’ 이야기도 좋았다.

영화타운 근처에 있지만 입구를 찾기 어렵고, 여름이면 담쟁이덩굴이 파도처럼 넘실거리고 겨울이면 붉은 벽돌이 드러나는 공간이었다.

원래 곡물창고였던 건물을 그대로 살렸다는 점도 군산이라는 도시와 잘 어울렸다.

저자는 그곳에서 밤라테를 마시며 친구와 떠났던 공주 여행을 떠올린다.

장소 하나가 다른 장소의 기억을 불러오는 흐름이 참 자연스러웠다.

실제 여행도 그렇다. 어떤 카페 하나가 오래전 계절을 떠올리게 하고, 어떤 음료 하나가 사람을 기억하게 만든다.

군산과자조합 이야기를 읽을 때는 괜히 나도 그곳에 앉아 밀크티를 마시고 싶어졌다.

군산은 짬뽕이나 빵 정도만 유명한 줄 알았는데, 책 속에는 이런 감각적인 디저트카페들도 등장한다. 1939년 제과·제빵사들이 함께 세웠던 군산과자조합의 역사를 바탕으로 다시 태어난 공간이라는 점도 흥미로웠다. 밀크티와 계란찜과자, 비엔나커피와 바스크치즈케이크를 앞에 두고 일을 미루는 장면은 이상하게 현실적이라 웃음이 났다. 특히 밀크티 향을 맡으며 짙은 보랏빛을 떠올리는 부분은 이 책 특유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것 같았다. 맛을 단순히 맛있다고 설명하는 게 아니라 향과 색, 감정과 기억으로 연결해 표현한다는 점이 좋았다.

영화타운 이야기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처음에는 영화동이 영화와 관련된 이름인 줄 알았는데,

책에서는 ‘영화’가 movie가 아니라 ‘길 영’, ‘화할 화’라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오래 화목하자는 의미라니 이름부터 정감이 갔다. 그 안에는 40~50년 넘게 자리를 지킨 오래된 가게들과 새로 생긴 바와 와인 공간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 바 ‘해무’와 와인 공간 ‘시가지’ 이야기를 읽다 보면 군산의 밤공기가 상상된다. 특히 해무가 만석이라 우연히 들어간 시가지에서 와인을 마시는 장면이 좋았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좋은 공간을 만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여행에서 그런 우연이 가장 오래 남는 것 같다.

‘돌아서 돌아오다’에 나오는 젤라또 노베오와 재즈클럽 머디 이야기도 인상 깊었다.

친구와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젤라또집, 그 뒤편에 숨어 있던 재즈클럽,

해방 직후 미군클럽이었다가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장소다.

군산은 한 공간 안에 여러 시간이 겹쳐 있는 도시처럼 느껴졌다.

오래된 목조건물 안에서 젤라또를 먹고, 재즈 공연 이야기를 하고,

놓쳐버린 봄의 기억을 떠올리는 장면들이 참 군산답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가보고 싶어졌던 건 군산의 책방들이었다.

원래 여행을 가면 작은 책방부터 찾아가는 편인데, 『언제라도 군산』에는 내가 좋아할 만한 공간들이 정말 많이 나왔다. 그래픽숍, 심리서점 쓰담, 책방 조용한흥분색 같은 이름만 봐도 괜히 궁금해졌다.

특히 쓰담 이야기는 오래 마음에 남았다.

저자는 그곳에서 생일책을 주문하고, 논알콜 맥주를 마시고, 책 두세 권을 사 들고 나온다.

강아지 직원 키코 이야기까지 더해지니 단순한 서점이라기보다 마음이 잠깐 쉬어가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도 괜찮다고 하는 책들이 많다”는 문장이 특히 좋았다.

여행지에서 이런 공간을 만날 수 있다는 건 꽤 큰 위로일 것 같다.

나도 군산에 가게 된다면 유명한 관광지를 빠르게 돌기보다, 책방 하나에 오래 앉아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장을 천천히 구경하고,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사고, 커피나 논알콜 맥주를 마시면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싶어졌다.

『언제라도 군산』은 군산을 소개하는 책이면서 동시에 여행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책처럼 느껴진다.

어디를 얼마나 많이 가느냐보다 어떤 속도로 걷고, 무엇을 오래 바라보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골목을 천천히 걷고, 오래된 가게에 들어가고, 계절마다 달라지는 나무 한 그루를 기억하고, 우연히 발견한 책방에 머무는 여행. 그런 여행을 하고 싶게 만드는 책이었다.

아직 군산에 가본 적은 없지만 책을 읽고 나니 이상하게 익숙한 도시처럼 느껴졌다.

바다가 있고, 오래된 건물이 있고, 책방이 있고, 누군가의 취향과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도시 같은 느낌이다. 오래되었지만 계속 새로운 이야기가 생겨날 도시인 것 같다.

그래서 제목처럼 정말 언제라도 떠나고 싶은 곳으로 군산이라는 도시를 마음에 새겨넣어 본다.

ㅡ

'푸른향기 서포터즈13기' 활동을 통해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군산’은 산이 무리 지어 있다는 뜻입니다.

땅 자체를 보자면 별로 그렇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익산과 인접한 높이 230미터 망해산이 최고봉일 만큼 큰 산이 거의 없고, 오히려 탁 트인 평야가 강과 바다에 접해 있으니 말입니다.
사실 조선 초기까지 군산은 임피, 옥구, 군산으로 구분된 행정구역이었습니다. 그중 군산은 내륙이 아니라 선유도, 신시도, 무녀도 등 10여 개의 유인도와 횡경도, 소횡경도, 보농도 등 40여 개의 무인도를 한데 묶어 부르던 이름입니다. 조선 태조 때 군산도의 중심인 선유도에 설치했던 수군부대를 세종 때 옥구 진포로 옮기며 내륙을 점차 군산이라 부르게 되었고, 기존의 군산도를 고군산이라 불러 구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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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말을 잘하게 됩니다 - 일이 술술 잘 풀리는 말하기 스킬
박수연 지음 / 현익출판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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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을 보고 나니 먼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말을 잘한다는 건 타고난 성격이나 순발력, 목소리 같은 것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 앞에만 서면 긴장하고, 회의 자리에서 갑자기 질문을 받으면

머릿속이 하얘지는 사람에게도 말하기가 훈련으로 좋아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실제로 『오늘부터 말을 잘하게 됩니다』를 읽어보니,

이 책에서 말하는 ‘말을 잘하게 된다’는 의미는 단순히 유창하게 말하거나 사람들 앞에서 멋있게 보이는 기술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가진 생각과 경험, 성과를 상대에게 정확히 전달하는 방법에 가까웠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일하고도 중요한 순간마다 기회를 놓치는지,

실력은 있는데 말 한마디 때문에 손해를 보는 순간을 줄이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일의 언어’를 익혀야 하는지를 차근차근 알려주는 책이었다.

책의 초반에는 한 회사에서 성실하게 일하던 직원의 이야기가 나온다.

강의와 코칭이 있을 때마다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참여하고, 보고서도 꼼꼼하게 쓰고, 맡은 프로젝트도 충실히 완수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중요한 승진 심사나 면접 기회에서는 늘 기대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했다. 결국 그 직원은 “저는 정말 열심히 하는데, 왜 중요한 순간마다 잘 안 풀리는 걸까요?”라고 묻는다. 이 질문이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처럼 느껴졌다.

열심히 하는데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 능력은 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말로 표현하지 못해 기회를 놓치는 사람들에게 ‘일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는 말을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조직 안이나 비즈니스 상황에서는 전혀 다른 말하기가 필요하다. 회의에서 “이번 분기 성과를 한 줄로 요약해 보세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머릿속이 하얘지는 순간, 고객이 “그래서 우리에게 어떤 이익이 있나요?”라고 물었을 때 답은 있는데 문장으로 꺼내지 못하는 순간, 발표 후 “그래서 결론이 뭐죠?”라는 말을 듣는 순간들이 모두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일상어와 일의 언어는 다르며 일의 언어는 배워야 하는 기술이라는 설명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특히 좋았던 건 저자가 ‘말을 잘한다’는 기준을 새롭게 정리해 준다는 점이었다.

말을 많이 하거나 유창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경험을 스토리로 만들 줄 알고 자신의 역량과 비전을 구조화된 말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결국 기회를 잡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언어적 자기관리’라고 설명한다. 아무리 좋은 성과를 냈어도 제대로 알리지 못하면 상대는 그 가치를 알기 어렵다. 결국 커리어에서 성과만큼 중요한 것은 그 성과를 어떻게 말로 전달하느냐였다.

이 부분에서 숫자와 비교를 활용하라는 조언도 현실적이었다.

단순히 “계약을 따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경쟁 업체 20곳을 제치고 회사 이익의 5%를 차지하는 계약을 따냈습니다”라고 말하면 성과의 무게가 훨씬 분명해진다.

또한 “장학금을 받았습니다”라고만 말하기보다 “300명 중 2등으로 졸업했고, 모든 학기 전액 장학금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하면 같은 사실도 더 강하게 전달된다.

말을 잘한다는 건 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성과와 강점을 상대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정리하는 일이었다.

‘말하기 이력서’라는 표현도 인상 깊었다. 우리는 이력서에 학력, 자격증, 경력은 열심히 적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 나를 설명할 말은 준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커리어에서 오래 남는 브랜딩은 결국 말이라는 문장이 마음에 남았다. 아무리 많은 경험을 쌓아도 그것을 말로 정리하지 못하면 상대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반대로 같은 경험이라도 숫자, 비교, 핵심 메시지로 잘 정리해 말하는 사람은 더 오래 기억된다.

이 책은 말 앞에서 작아지는 사람들을 위한 조언도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발표 울렁증처럼 사람들 앞에 나가 말하는 것 자체가 불편한 사람,

면접이나 발표만 생각하면 긴장부터 되는 사람, 회사에서 상사에게 보고할 때 조금 더 프로페셔널하게 보이고 싶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 많다.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회의, 보고, 발표, 협상, 면접 같은 순간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 책의 내용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불안과 긴장을 다루는 부분도 좋았다. 책에서는 떨리는 상태를 없애려 하기보다, 그 떨림을 ‘몰입의 신호’로 바꿔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불안하다”를 “긴장된다”로, “무섭다”를 “에너지가 솟는다”로 바꿔 해석하는 방식이다. 발표나 면접을 앞두고 손바닥이 축축해지고 심장이 빨라지는 경험은 누구나 해봤을 것이다. 그런데 그 감각을 실패의 징조로 받아들이면 더 위축되고, 몰입의 에너지로 받아들이면 조금은 버틸 힘이 생긴다. 완벽한 말보다 진심이 담긴 말이 더 오래 남는다는 설명도 위로가 됐다.

실제 훈련법도 구체적이었다. 첫 문장을 미리 입 밖으로 꺼내 보기, 몸과 어깨를 풀어 긴장을 낮추기, 청중 중 편안하게 느껴지는 사람에게 시선을 두기 같은 방법들은 당장 적용해 볼 수 있는 팁이었다.

특히 첫 문장을 “입에 붙인다”는 표현이 기억에 남았다.

머릿속으로만 준비한 문장과 실제 입 밖으로 꺼낸 문장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첫 문장만이라도 여러 번 말해 보는 것이 긴장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된다는 조언이 기억에 남는다.

머리가 하얘지는 사람들을 위한 설명도 공감이 컸다.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각이 너무 많아서 말이 막힌다는 것이다.

“이 표현이 맞을까?”, “이 말이 어색하게 들리면 어쩌지?”라고 계속 검열하다 보면 입은 열지도 못하고 불안만 커진다. 완벽한 문장을 기다리기보다 지금 아는 것부터 말하고, 핵심 단어를 먼저 꺼내고, 연결어로 흐름을 이어 가라는 조언이 실용적이었다.

이 책은 말하기 습관도 유형별로 나눈다.

말의 시작을 두려워하는 불안형,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오는 충동형,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삼키는 회피형,

말은 많지만 중심이 없는 혼란형처럼 자신의 말 습관을 돌아볼 수 있게 한다.

막연히 “나는 원래 말을 못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유형에 가까운지 점검하고 그에 맞는 훈련을 해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뒤로 갈수록 책은 면접, 프레젠테이션, 협상처럼 실제 커리어의 중요한 장면에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도 다룬다. 말의 내용뿐 아니라 말투, 목소리, 어휘, 비언어적 신호까지 폭넓게 짚어 준다.

생각을 명료하게 전달하기 위한 구조의 기술도 인상적이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머릿속 생각을 아무렇게나 꺼내는 것이 아니라

핵심과 근거, 예시와 결론의 흐름을 잡아 말한다.

그래서 말하기를 잘하고 싶다면 먼저 생각을 정리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점도 기억에 남았다.

마지막으로 좋았던 부분은 함께 일하고 싶게 만드는 말 습관에 대한 이야기였다.

저자는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언급하며, 다른 사람 앞에서 상대에게 무안함을 주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을 빠르게 처리하다 보면 상대의 말이 틀렸다고 바로 지적하고 싶거나 반박하고 싶은 순간이 생긴다. 하지만 그때 딱 1초만 참아도 같은 말을 훨씬 부드럽게 전달할 수 있다. 결국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은 단순히 말을 유창하게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로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문장이 오래 남았다.

읽고 나니 『오늘부터 말을 잘하게 됩니다』는 단순한 스피치 기술서라기보다,

일하는 사람을 위한 커리어 말하기 안내서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잘한다는 건 나를 포장하는 기술이 아니라, 내가 가진 생각과 경험과 성과를 상대에게 제대로 닿게 하는 힘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상대를 무안하게 만들지 않고,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게 만드는 배려이기도 했다.

책 제목처럼 오늘부터 갑자기 완벽하게 말을 잘하게 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왜 내가 말문이 막혔는지, 어디서부터 연습해야 하는지는 알게 된다.

그 시작만으로도 말은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책이었다.


ㅡ

'유엑스리뷰어12기' 활동을 통해 출판사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박수연작가 @fluent_lawyer

#현익출판 @hyunikbooks

#유엑스리뷰 @uxreviewkorea

#유엑스리뷰어 @ux_reviewer

#임프린트계정 @dongledesign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비즈니스의 세계에서는 짧은 순간 내뱉는 한마디가 계약의 성립 여부, 승진 여부, 합격 여부를 갈라놓습니다. 짧은 대화의 순간이 나비효과처럼 커리어 전체를 바꿔 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말은 타고난 소수만이 가진 능력이 아닙니다.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는 누구나 넘어지지만 곧 익숙해지듯, 말하기도 구조와 방법을 몸에 익히면 자연스럽게 속도가 붙고 요령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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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거래소 ㅣ 루프테일 소설선
나희정 지음 / 루프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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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거래소』 띠지에 적힌 ‘감정이 화제가 된 미래 사회‘라는 문장에서부터 이 책의 내용이 무엇일지 무척 궁금해졌다.

감정을 추출해서 거래하고, 평온과 희망은 비싸게 팔리고, 분노와 불안은 값싸게 취급되는 미래 사회 이야기라니. 설정만 보면 SF소설답게 독특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이상하게 먼 미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현실에서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더 극단적으로 풀어낸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책의 배경은 2062년 서울이다. 2035년, 인류는 감정을 추출할 수 있는 ‘E-익스트랙션’ 기술을 상용화했고, 사람들은 감정을 느끼기보다 추출하고, 거래하고, 소비하며 살아간다.

감정은 더 이상 마음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산이 된다.

평온, 열정, 희망 같은 감정은 고가에 거래되고, 분노와 불안, 체념 같은 감정은 흔하고 값싼 감정으로 분류된다.


이 설정이 무서웠던 건 감정을 등급으로 나누고 가격을 매기는 일이 완전히 낯설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불안하면 안 되는 사람처럼 굴고, 화를 내면 미성숙한 사람처럼 보일까 봐 참는다. 슬퍼도 너무 오래 슬퍼하면 민폐가 될까 봐 걱정하고, 힘들어도 괜찮은 척한다. 그런 모습들을 떠올리니, 이 책 속 감정거래소가 아주 허황된 상상만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주인공 이도윤은 분노 생성자다. 감정 추출 센터에서 감정을 뽑아 돈으로 정산받지만, 그의 기록에는 늘 분노 C등급만 줄줄이 남아 있다. 분노 100g에 1,000원, 500원, 600원. 그에게 분노는 삶을 버티게 하는 감정이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저등급 생성자의 자리에 묶어두는 족쇄다.


도윤은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보육원에서 자랐다. 그는 자신을 낳은 사람들 역시 분노 생성자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평온 생성자의 아이가 이렇게 버려질 리 없다는 생각. 그 문장을 읽는데 마음이 너무 씁쓸했다.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성격이 아니라 피와 운명처럼 받아들이게 되는 세계라니. 그런데 생각해보면 현실에서도 누군가는 가난을, 불안을, 분노를 자기 탓으로 끌어안고 산다. 사회가 만든 조건인데도, 결국 “내가 이런 사람이라서 그렇다”고 믿게 된다.


이 책에서 감정은 철저히 시장의 논리로 움직인다. A등급 평온은 1g에 10만 원이고, 열정은 5만 원, 희망은 1만 원이다. 반면 C등급 분노는 1g에 10원이다. 사람들은 추워서, 배고파서, 길이 막혀서, 잠이 부족해서, 시끄러워서 끊임없이 분노와 불안을 만들어낸다. 너무 흔하기 때문에 값이 낮다. 이 부분이 참 현실적이었다. 힘든 사람일수록 더 많이 만들어내는 감정은 정작 값싸고, 여유 있는 사람일수록 만들어내기 쉬운 평온은 비싸다.


도윤은 어느 날 평온 10g을 생성하려고 감정 추출기에 앉는다. 성공하면 100만 원을 벌 수 있다. 월세의 절반을 해결할 수 있는 돈이다. 그래서 그는 요가도 하고, 명상도 하고, 유튜브 강의도 듣고, 유료 멤버십까지 가입한다. “나는 평온하다. 나는 평온을 생성하고 있다.” 그렇게 계속 되뇌지만, 평온을 붙잡으려 할수록 오히려 몸은 더 긴장한다. 턱에는 힘이 들어가고, 주먹은 쥐어지고, 심박수는 빨라진다.

그 장면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난한 사람에게 평온하라고 말하는 일은 얼마나 잔인한가.

삶이 계속 불안한데, 통장은 비어가고, 내일이 걱정되는데, 그 사람에게 마음을 잘 다스리라고만 말하는 건 문제의 원인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일일지도 모른다.


옆자리에서는 말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너무도 쉽게 평온 50g을 생성하고 500만 원을 정산받는다. 도윤은 10분 동안 평온 1g도 만들지 못했는데, 누군가는 숨 쉬듯 평온을 만들어낸다. 결국 도윤은 평온 대신 분노 200g을 생성하고, 손에 쥔 돈은 겨우 2,000원이다. 50만 원짜리 평온 생성 강의를 듣고 얻은 결과가 컵라면 하나 값이라니. 이 장면은 웃기면서도 너무 비참했다.


이 소설이 더 묵직하게 느껴졌던 건 도윤 한 사람의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열네 살 민석의 이야기도 나온다. 민석은 학교 상담실에서 감정 측정 결과지를 받는다.

불안 C등급, 체념 C등급, 분노 C등급. 지난 6개월 동안 B등급 이상 감정을 생성한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상담교사는 C등급 생성자 전문 특성화고 전학을 권한다. 한 달 300만 원짜리 감정 순화 프로그램을 받을 형편이 안 되는 민석의 가족에게는 사실상 선택지가 없다.

민석은 대학에 가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의 미래는 이미 C등급이라는 이름 아래 결정되어 있다.

이 부분을 읽는데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도 떠올랐다.

성적, 집안 형편, 사는 지역, 부모의 정보력, 사교육비, 정서적 환경 같은 것들이 아이의 가능성을 너무 일찍 결정해버리는 순간들이 있다. 아이가 가진 불안과 분노가 정말 그 아이만의 책임일까.

아니면 어른들이 만든 불평등한 구조가 아이의 마음으로 흘러들어간 결과가 아닐까.


반대편에는 감정 귀족들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상위 등급 감정을 안정적으로 생성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희망을 적금처럼 쌓고, 기쁨을 예금처럼 보관하고, 열정을 주식처럼 시세를 보며 매도한다. 아이의 자신감 생성량을 높이기 위해 고가의 감정 순화 과외를 붙이고, 고순도 자신감을 주입한다. 감정 관리에 돈을 아끼는 것은 계급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 장면에서는 사교육과 능력주의가 떠올랐다. 누군가는 태어날 때부터 더 좋은 환경에서 감정을 관리받고, 더 나은 감정 포트폴리오를 만들어간다. 반면 누군가는 불안과 분노를 혼자 견디다 결국 타고난 문제라는 말로 정리된다. 노력이라는 말이 참 편리하게 쓰이는 사회다.

이미 출발선이 다른데도, 결과가 다르면 노력 부족이라고 말한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인물은 감정을 소비하는 권력층이었다.

회사 경영진과 정책 결정자, 고위 관료들은 감정을 생성하지 않고 소비한다.

강 이사는 아침마다 A등급 평온을 주입받고, 500명의 해고를 결정하는 회의에 들어간다.

평온은 그의 판단을 맑게 만든다. 감정이라는 잡음 없이 숫자만 보게 만든다.

그래서 500명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최적화해야 할 변수일 뿐이다.

이 장면을 읽고 평온이라는 감정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우리는 보통 평온을 좋은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평온이 때로 잔인한 감정이 된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할 수 있게 해주는 감정, 죄책감 없이 결정을 내리게 해주는 감정,

불편한 마음을 느끼지 않게 만드는 감정이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분노가 꼭 나쁜 감정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상황에서는 분노가 인간성을 지키는 마지막 감각일 수 있다.

부당한 일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다면 그것이 정말 성숙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평온하기만 한 마음이 정말 좋은 마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감정거래소』는 감정을 사고파는 미래 사회를 그린 소설이지만, 결국 지금 우리가 감정을 어떻게 대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묻는 책이었다.

우리는 늘 평온해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불안과 분노는 빨리 없애야 할 감정처럼 여긴다.

하지만 정말 좋은 삶이란 불편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 삶이 아니라, 그 감정들이 왜 생겼는지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삶에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감정에도 존엄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슬픔도, 분노도, 불안도 이유 없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알려주는 신호일 때가 많다. 그런데 사회가 그 신호를 듣지 않고, 감정에 등급과 가격만 매긴다면 사람은 점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이 책이 좋았던 건 설정의 신선함만으로 밀고 가는 작품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감정, 계급, 불평등, 자기계발 산업, 사교육, 능력주의, 노동, 정신 건강 문제까지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든다. 재미있게 읽히지만 가볍게 소비되지는 않는다.

읽고 나면 마음에 질문이 남는다.


나는 내 감정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

타인의 감정을 너무 쉽게 평가하고 있지는 않을까?

누군가의 분노를 그저 예민함으로 넘기고 있지는 않을까?

누군가의 불안을 노력 부족으로 단정하고 있지는 않을까?


『감정거래소』는 감정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분노와 불안까지 나의 일부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묻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누군가의 슬픔과 분노를 값싼 감정으로 취급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미래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지만, 읽고 나면 지금의 우리를 더 오래 들여다보게 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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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언니‘님을 통해,

'루프(loop) 출판사' 도서를 선물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이 도시에서 감정은 곧 계급이었다. 타고난 감정의 등급과, 그 감정을 보존하거나 소비할 수 있는 경제력이 사실상 신분증과 다르지 않았다. 도윤 같은 일반 생성자들에게 허락된 감정은 언제나 계급의 사다리 아래쪽에 걸쳐 있었다. 그들의 감정 포트폴리오는 늘 초라했다. 어쩌다 찾아온 소소한 기쁨이나 작은 즐거움조차 사치에 가까웠다. 그런 감정들은 생겨나는 즉시 감정 추출 센터에 내다 팔아야 하는 뜻밖의 횡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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