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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함께 살아보기로 했다 - 트라우마와 삶 사이, 멈추지 않고 걸어온 기록
이안나 지음 / 미다스북스 / 2026년 1월
평점 :

『이제는 함께 살아보기로 했다』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나는 이 책이 누군가와의 관계를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이 제목에서 말하는 ‘함께’는 다른 사람만을 향한 말이 아니었다.
오래 밀어내고 싶었던 기억, 자꾸만 나를 멈춰 세우는 불안, 어른이 된 뒤에도 문턱 앞에서 한 번 더 망설이게 만드는 어린 시절의 나와 이제는 함께 살아보겠다는 말처럼 느껴졌다.
왜 하필 ‘이제는’이라는 말을 붙였을까. 책을 다 읽고 나니 그 말이 조금 알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숨고, 피하고, 괜찮은 척하며 살아왔다면, 이제부터는 그 시간을 없던 일로 만들지 않고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겠다는 조심스러운 다짐 같았다.
이 책은 트라우마를 다룬 에세이지만, 흔히 말하는 극복담처럼 읽히지는 않았다.
저자 이안나는 어린 시절부터 폭력과 불안, 가난과 고립을 겪으며 자라온 시간을 차분히 꺼내놓는다.
그런데 그 방식이 과장되어 있지 않아서 더 마음에 남았다.
어떤 문장은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오래 멈추게 만들었다.
상처를 크게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데도 그 안에 얼마나 오래 숨죽인 시간이 있었는지 느껴졌다.
책의 초반에서 저자는 “세상은 문틈으로 다가왔다”고 말한다.
이 문장이 이 책 전체를 여는 문처럼 느껴졌다. 어린아이였던 저자에게 세상은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문을 닫는 일도, 문을 여는 일도 혼자 배워야 했고, 멀쩡해 보였던 날들 안에는 겁에 질린 아이의 소리 없는 외침이 있었다. 이 책은 그동안 드러낼 수 없었던 이야기이자 더는 같은 방식으로 숨고 싶지 않아 남겨두는 기록이었다.
특히 문을 닫는 법을 먼저 배웠다는 고백은 읽는 내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엄마가 돌아오지 않는 밤이면 저자와 동생은 단둘이 집에 남겨졌다.
벨이 울리면 숨을 죽였고, 문밖의 웃음소리와 발소리, 알 수 없는 기척은 어린 자매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왔다. 엄마가 남긴 “절대 문 열지 마”라는 말은 아이들에게 하나의 생존법이 되었다.
누군가 문밖에서 벨을 누르면 “어른 안 계세요”라고 외쳐야 했던 아이.
그 말은 문을 열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었고, 동시에 안쪽에 머물 수 있게 해주는 작은 방어막이었다.
공포는 집 안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친구 집에서도, 동네에서도 폭력은 다른 얼굴로 반복된다. 동네 남자아이들이 문을 부술 듯 두드리던 날, 아이들은 위급할 때 누르라고 배웠던 번호로 전화를 걸지만 경찰은 오지 않는다. 그날 이후 저자는 현관문이 잠겼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고, 잠금쇠와 보조키까지 확인하는 아이가 된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조심성 많고 말 잘 듣는 아이였을지 모르지만, 사실 그 조심성은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진 방식이었다.
도움을 기대하지 못했던 시간은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도 오래 이어진다.
저자는 울음을 들키지 않는 법부터 배웠고, 도움을 기대하기보다 자기 안의 문을 닫아두었다고 말한다. 어른이 언제든 도와주러 올 거라는 생각은 오산이었다. 오지 않거나, 늘 너무 늦었다.
그래서 그는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도 먼저 혼자 해결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야근이 늘어나도, 아파도, 마음이 다급해도 모든 걸 혼자 해결했다는 고백이 낯설지 않았다.
정말 괜찮아서가 아니라, 괜찮다는 말이 대화를 끝내기에 유용했기 때문이라는 문장은 오래 생각하게 했다. 나도 가끔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말해버릴 때가 있다.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더 설명할 자신이 없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런 말 뒤에 숨어 있는 오래된 마음을 조용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책을 읽으며 가장 아팠던 건, 저자가 겪은 폭력과 가난 자체도 물론이지만 그 이후의 방식이었다.
아빠의 사업 부도 이후 낯선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오고, 집 안 곳곳에 빨간딱지가 붙는다.
냉장고와 티브이, 벽에 걸린 그림 위에 같은 색의 종이가 붙어 있는 장면은 집이 더 이상 나를 품어주는 공간이 아니게 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저자는 평소처럼 집을 정리하고, 우리 것이 아니게 된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 저녁을 먹는다. 누구 하나 늘 하던 일을 멈추면 그날이 특별한 날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였다는 말이 너무 슬펐다.
가난은 단순히 불편한 문제가 아니었다. 저자에게 가난은 들키고 싶지 않은 일이었고, 숨겨야 하는 일이었다. 학교에서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나눠주던 문제집은 도움이면서 동시에 표시처럼 느껴졌고, 이름이 불리는 순간 모든 것이 설명되어 버릴 것 같았다.
대학생이 되어 어학연수나 유럽 배낭여행을 가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야 할 때도 침묵만으로는 부족했다. 결국 저자는 설명 대신 관계를 포기하고, 열세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가난을 숨긴다.
위험이 될 만한 사람을 하나씩 내려놓는 방식은 그렇게 오래된 생존법이 되어갔다.
이 책은 트라우마가 꼭 큰 사건의 기억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문소리에 놀라는 것, 늘 출구를 먼저 찾는 것, 사람들 앞에서 울지 못하는 것, 도움을 청하기 전에 혼자 해결할 방법부터 찾는 것, 상대가 묻기 전에 먼저 괜찮다고 말해버리는 것.
이런 작은 습관들이 사실은 오래된 상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저자는 하나씩 보여준다.
뒤로 갈수록 저자가 지나온 시간은 더 깊은 곳까지 이어진다.
통제는 늘 큰 소리로 다가오지 않았다. 때로는 배려의 얼굴을 하고 걱정스러운 말투로 다가왔다.
그래서 더 늦게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폭력보다 상대의 미래를 먼저 걱정하던 순간,
저자는 자신이 갇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겨울 찬 바람을 맞으며 또다시 도망치고, 공중화장실 제일 마지막 칸에 몸을 숨긴 장면에서는 마음이 많이 아팠다. 혼자 외로운 싸움을 이어온 사람이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숨을 삼키는 모습이 너무 선명하게 느껴졌다.
주말의 연구실에서 겪은 불안의 장면도 오래 남았다.
조용히 일할 곳이 필요해 아무도 없는 토요일 오후 연구실로 향했고, 컴퓨터도 모니터도 서류도 모두 정상적으로 놓여 있었다. 소음도 없고 위험도 없고 누군가 지켜보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시야가 좁아지고 숨이 막히며 불안이 밀려온다. 이 부분은 내가 경험했던 증상과 닮아 있어서 놀라기도 하면서 읽었다.
불안한 감정들, 그리고 타인을 통해 미움을 받는 듯한 감각이 공황장애 같은 증상으로 나타날 때가 있다. 한 번 경험하고 조금 나아진 것 같아도 완전히 사라졌다는 느낌은 잘 들지 않는다.
비슷한 상황이거나, 심지어 아무 일도 없는 상황에서도 그 감각이 불쑥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쉽게 알 수 없는 불편함이기에 나는 이 부분을 더 깊이 공감하며 읽게 됐다.
그래도 이 책은 끝내 무너지는 이야기로만 남지 않는다. 저자는 자신이 기적처럼 살아난 것이 아니라, 매일 새로 시작되는 싸움 끝에 여기까지 왔다고 말한다.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았지만 그 싸움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어졌고,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살면서도 자신과 지켜야 할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이 겪고 있던 것들이 내가 이상해서가 아니라 지나온 시간의 결과라는 쪽으로 생각이 옮겨간다. 지난날 왜 도망치지 못했는지 묻고 자책하는 대신, 그 시간을 잘 지나온 사실을 기억하게 된다.
『이제는 함께 살아보기로 했다』가 좋았던 이유는 회복을 너무 쉽게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상처가 사라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문을 열어도 괜찮아지는 데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마흔이 되어서야 조금씩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치유란 과거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오늘을 선택하는 일이라는 말처럼, 회복은 어느 날 갑자기 단단한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니라 아직도 문턱에서 멈추는 나를 알아차리고 그런 나를 더 이상 미워하지 않는 일에 가까운 것 같다.
결국 제목 속 ‘이제는’은 너무 늦은 말이 아니라, 이제라도 시작해보겠다는 말처럼 느껴졌다. 상처를 없애겠다는 말이 아니라, 상처 입은 나를 더 이상 밖에 세워두지 않겠다는 말이다. 문을 닫아야만 하루를 버틸 수 있었던 아이, 울지 않는 법을 먼저 배운 아이, 도움을 기대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던 아이와 이제는 함께 살아보겠다는 다짐. 앞으로 저자의 삶에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날들이, 불안보다 편안함이 더 오래 머무는 날들이 조금씩 많아지기를 응원하게 된다. 오래 괜찮은 척 살아온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으며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작은 아이를 한 번쯤 조용히 바라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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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나 작가'님께 도서를 선물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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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란 과거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오늘을 선택하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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