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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거래소 ㅣ 루프테일 소설선
나희정 지음 / 루프 / 2026년 4월
평점 :

『감정거래소』 띠지에 적힌 ‘감정이 화제가 된 미래 사회‘라는 문장에서부터 이 책의 내용이 무엇일지 무척 궁금해졌다.
감정을 추출해서 거래하고, 평온과 희망은 비싸게 팔리고, 분노와 불안은 값싸게 취급되는 미래 사회 이야기라니. 설정만 보면 SF소설답게 독특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이상하게 먼 미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현실에서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더 극단적으로 풀어낸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책의 배경은 2062년 서울이다. 2035년, 인류는 감정을 추출할 수 있는 ‘E-익스트랙션’ 기술을 상용화했고, 사람들은 감정을 느끼기보다 추출하고, 거래하고, 소비하며 살아간다.
감정은 더 이상 마음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산이 된다.
평온, 열정, 희망 같은 감정은 고가에 거래되고, 분노와 불안, 체념 같은 감정은 흔하고 값싼 감정으로 분류된다.
이 설정이 무서웠던 건 감정을 등급으로 나누고 가격을 매기는 일이 완전히 낯설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불안하면 안 되는 사람처럼 굴고, 화를 내면 미성숙한 사람처럼 보일까 봐 참는다. 슬퍼도 너무 오래 슬퍼하면 민폐가 될까 봐 걱정하고, 힘들어도 괜찮은 척한다. 그런 모습들을 떠올리니, 이 책 속 감정거래소가 아주 허황된 상상만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주인공 이도윤은 분노 생성자다. 감정 추출 센터에서 감정을 뽑아 돈으로 정산받지만, 그의 기록에는 늘 분노 C등급만 줄줄이 남아 있다. 분노 100g에 1,000원, 500원, 600원. 그에게 분노는 삶을 버티게 하는 감정이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저등급 생성자의 자리에 묶어두는 족쇄다.
도윤은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보육원에서 자랐다. 그는 자신을 낳은 사람들 역시 분노 생성자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평온 생성자의 아이가 이렇게 버려질 리 없다는 생각. 그 문장을 읽는데 마음이 너무 씁쓸했다.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성격이 아니라 피와 운명처럼 받아들이게 되는 세계라니. 그런데 생각해보면 현실에서도 누군가는 가난을, 불안을, 분노를 자기 탓으로 끌어안고 산다. 사회가 만든 조건인데도, 결국 “내가 이런 사람이라서 그렇다”고 믿게 된다.
이 책에서 감정은 철저히 시장의 논리로 움직인다. A등급 평온은 1g에 10만 원이고, 열정은 5만 원, 희망은 1만 원이다. 반면 C등급 분노는 1g에 10원이다. 사람들은 추워서, 배고파서, 길이 막혀서, 잠이 부족해서, 시끄러워서 끊임없이 분노와 불안을 만들어낸다. 너무 흔하기 때문에 값이 낮다. 이 부분이 참 현실적이었다. 힘든 사람일수록 더 많이 만들어내는 감정은 정작 값싸고, 여유 있는 사람일수록 만들어내기 쉬운 평온은 비싸다.
도윤은 어느 날 평온 10g을 생성하려고 감정 추출기에 앉는다. 성공하면 100만 원을 벌 수 있다. 월세의 절반을 해결할 수 있는 돈이다. 그래서 그는 요가도 하고, 명상도 하고, 유튜브 강의도 듣고, 유료 멤버십까지 가입한다. “나는 평온하다. 나는 평온을 생성하고 있다.” 그렇게 계속 되뇌지만, 평온을 붙잡으려 할수록 오히려 몸은 더 긴장한다. 턱에는 힘이 들어가고, 주먹은 쥐어지고, 심박수는 빨라진다.
그 장면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난한 사람에게 평온하라고 말하는 일은 얼마나 잔인한가.
삶이 계속 불안한데, 통장은 비어가고, 내일이 걱정되는데, 그 사람에게 마음을 잘 다스리라고만 말하는 건 문제의 원인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일일지도 모른다.
옆자리에서는 말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너무도 쉽게 평온 50g을 생성하고 500만 원을 정산받는다. 도윤은 10분 동안 평온 1g도 만들지 못했는데, 누군가는 숨 쉬듯 평온을 만들어낸다. 결국 도윤은 평온 대신 분노 200g을 생성하고, 손에 쥔 돈은 겨우 2,000원이다. 50만 원짜리 평온 생성 강의를 듣고 얻은 결과가 컵라면 하나 값이라니. 이 장면은 웃기면서도 너무 비참했다.
이 소설이 더 묵직하게 느껴졌던 건 도윤 한 사람의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열네 살 민석의 이야기도 나온다. 민석은 학교 상담실에서 감정 측정 결과지를 받는다.
불안 C등급, 체념 C등급, 분노 C등급. 지난 6개월 동안 B등급 이상 감정을 생성한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상담교사는 C등급 생성자 전문 특성화고 전학을 권한다. 한 달 300만 원짜리 감정 순화 프로그램을 받을 형편이 안 되는 민석의 가족에게는 사실상 선택지가 없다.
민석은 대학에 가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의 미래는 이미 C등급이라는 이름 아래 결정되어 있다.
이 부분을 읽는데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도 떠올랐다.
성적, 집안 형편, 사는 지역, 부모의 정보력, 사교육비, 정서적 환경 같은 것들이 아이의 가능성을 너무 일찍 결정해버리는 순간들이 있다. 아이가 가진 불안과 분노가 정말 그 아이만의 책임일까.
아니면 어른들이 만든 불평등한 구조가 아이의 마음으로 흘러들어간 결과가 아닐까.
반대편에는 감정 귀족들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상위 등급 감정을 안정적으로 생성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희망을 적금처럼 쌓고, 기쁨을 예금처럼 보관하고, 열정을 주식처럼 시세를 보며 매도한다. 아이의 자신감 생성량을 높이기 위해 고가의 감정 순화 과외를 붙이고, 고순도 자신감을 주입한다. 감정 관리에 돈을 아끼는 것은 계급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 장면에서는 사교육과 능력주의가 떠올랐다. 누군가는 태어날 때부터 더 좋은 환경에서 감정을 관리받고, 더 나은 감정 포트폴리오를 만들어간다. 반면 누군가는 불안과 분노를 혼자 견디다 결국 타고난 문제라는 말로 정리된다. 노력이라는 말이 참 편리하게 쓰이는 사회다.
이미 출발선이 다른데도, 결과가 다르면 노력 부족이라고 말한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인물은 감정을 소비하는 권력층이었다.
회사 경영진과 정책 결정자, 고위 관료들은 감정을 생성하지 않고 소비한다.
강 이사는 아침마다 A등급 평온을 주입받고, 500명의 해고를 결정하는 회의에 들어간다.
평온은 그의 판단을 맑게 만든다. 감정이라는 잡음 없이 숫자만 보게 만든다.
그래서 500명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최적화해야 할 변수일 뿐이다.
이 장면을 읽고 평온이라는 감정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우리는 보통 평온을 좋은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평온이 때로 잔인한 감정이 된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할 수 있게 해주는 감정, 죄책감 없이 결정을 내리게 해주는 감정,
불편한 마음을 느끼지 않게 만드는 감정이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분노가 꼭 나쁜 감정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상황에서는 분노가 인간성을 지키는 마지막 감각일 수 있다.
부당한 일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다면 그것이 정말 성숙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평온하기만 한 마음이 정말 좋은 마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감정거래소』는 감정을 사고파는 미래 사회를 그린 소설이지만, 결국 지금 우리가 감정을 어떻게 대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묻는 책이었다.
우리는 늘 평온해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불안과 분노는 빨리 없애야 할 감정처럼 여긴다.
하지만 정말 좋은 삶이란 불편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 삶이 아니라, 그 감정들이 왜 생겼는지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삶에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감정에도 존엄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슬픔도, 분노도, 불안도 이유 없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알려주는 신호일 때가 많다. 그런데 사회가 그 신호를 듣지 않고, 감정에 등급과 가격만 매긴다면 사람은 점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이 책이 좋았던 건 설정의 신선함만으로 밀고 가는 작품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감정, 계급, 불평등, 자기계발 산업, 사교육, 능력주의, 노동, 정신 건강 문제까지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든다. 재미있게 읽히지만 가볍게 소비되지는 않는다.
읽고 나면 마음에 질문이 남는다.
나는 내 감정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
타인의 감정을 너무 쉽게 평가하고 있지는 않을까?
누군가의 분노를 그저 예민함으로 넘기고 있지는 않을까?
누군가의 불안을 노력 부족으로 단정하고 있지는 않을까?
『감정거래소』는 감정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분노와 불안까지 나의 일부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묻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누군가의 슬픔과 분노를 값싼 감정으로 취급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미래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지만, 읽고 나면 지금의 우리를 더 오래 들여다보게 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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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언니‘님을 통해,
'루프(loop) 출판사' 도서를 선물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이 도시에서 감정은 곧 계급이었다. 타고난 감정의 등급과, 그 감정을 보존하거나 소비할 수 있는 경제력이 사실상 신분증과 다르지 않았다. 도윤 같은 일반 생성자들에게 허락된 감정은 언제나 계급의 사다리 아래쪽에 걸쳐 있었다. 그들의 감정 포트폴리오는 늘 초라했다. 어쩌다 찾아온 소소한 기쁨이나 작은 즐거움조차 사치에 가까웠다. 그런 감정들은 생겨나는 즉시 감정 추출 센터에 내다 팔아야 하는 뜻밖의 횡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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