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골 -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권민창 지음 / 모티브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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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골’이라는 단어는 처음에는 거칠고 반항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권민창의 『반골』에서 말하는 반골은 무조건 세상과 싸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남들이 정해놓은 기준을 그대로 따르기보다 자신의 삶에 대한 선택권과 책임을 스스로 쥐는 사람에 가까웠다.

책의 서문은 꽤나 강렬하다. 저자는 몇 년의 시간과 1억 원 가까운 돈을 쏟아부은 유튜브 채널을 직접 삭제한다. “조금만 더 해보자”는 미련으로 계속 붙잡고 있었지만, 결국 사람들이 좋아한 것은 ‘권민창이라는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가 만들어낸 콘텐츠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 장면에서 먼저 떠오른 것은 포기하지 않는 끈기만큼 잘못된 방향을 버릴 줄 아는 판단도 중요하다는 점이었다. 이미 많이 투자했다는 이유만으로 계속 붙잡는 것은 끈기가 아니라 집착이 될 수도 있다.

실패를 인정하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더 이상 잘못된 곳에 시간과 돈을 쓰지 않겠다는 새로운 결정일 수 있다.

저자는 이후 대중 앞에서 사라져 사업에 집중했고, 2025년 25억 원의 매출, 성수동 사옥 매입, 일본 출판사 설립까지 이어졌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반복해서 강조하는 말이 있다.

“결국 결과로, 내 인생으로 증명하면 된다.”

이 문장은 지나치게 결과주의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읽었다.

타인의 현재 평가를 내 가능성의 최종 판결처럼 받아들이지 말라는 의미다.

저자 역시 운동도, 글도, 새로운 일도 처음부터 잘한 것이 아니었고 비웃음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계속하다 보니 비웃음은 질투가 되고, 다시 “어떻게 그렇게 잘하느냐”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결과가 없을 때는 쉽게 무모하다고 평가하고, 결과가 나온 뒤에는 같은 행동을 결단력과 통찰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남의 평가에 반박하는 데 에너지를 쓰기보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계속 움직이는 것이 더 강한 답일 수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오래 남은 질문은 이것이었다.

“나는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100% 완전한 내 의지로 결정한 무언가가 있었나?”

저자는 직업군인을 양성하는 학교에서 안정적인 직업과 연금이 정답처럼 주어진 환경에서 살았고,

이후에도 선배와 동료가 선택한 길을 따라갔다고 한다.

그러다 병원에 입원해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자신만의 삶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대목을 읽으며 우리가 생각보다 많은 결정을 타인의 기준에 맡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직장, 좋은 집, 적절한 결혼 시기, 성공한 삶의 모습까지 사회가 만들어놓은 표준을 참고한다.

하지만 행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화려한 삶을 원하고, 누군가는 적게 벌더라도 자기 시간이 많은 삶을 원한다. 그래서 조언은 참고할 수 있어도 인생의 결정권까지 타인에게 넘겨서는 안 된다.

『반골』은 이를 ‘야생 DNA’, ‘야생 지능’, ‘시작 중독’, ‘불완전 전략’, ‘선점자’, ‘금강불괴’ 등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표현은 거칠지만 핵심은 명확하다. 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시작하고, 틀리면 빠르게 수정하며, 자신의 선택에 책임지는 사람으로 살라는 것이다.

특히 “조준은 달리면서 한다”는 표현이 기억에 남았다.

우리는 준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시작을 미루지만, 현실에는 직접 해봐야만 알 수 있는 정보가 있다.

사업은 시장에 내놔야 반응을 알고, 글은 공개해야 독자의 반응을 알 수 있다.

생각은 가능성을 예측하지만 행동은 현실의 데이터를 만든다.

그래서 실행력 있는 사람은 처음부터 정답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빨리 발견하고 수정하는 사람일 수 있다.

출판업을 바라보는 시선도 흥미롭다.

저자는 “책은 작품이 아니라 상품이다”라고 말한다. 좋은 내용을 만드는 것은 기본이고, 그 책이 독자의 눈앞에 도달하도록 만드는 것까지 출판의 책임이라고 본다. 처음에는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느껴졌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좋은 것을 만드는 능력과 좋은 것이 발견되게 만드는 능력은 서로 다르다. 아무리 좋은 콘텐츠라도 존재를 모르면 선택받을 수 없다.

그래서 마케팅을 단순한 포장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에게 가치를 연결하는 과정이라고 본다면 이 주장은 꽤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AI에 대한 태도도 같은 맥락이다. 저자는 “AI가 인간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한다”는 위안에 머물기보다 반복 업무는 자동화하고 인간은 기획과 판단에 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한다고 말한다.

앞으로 중요한 경쟁은 인간과 AI의 대결이라기보다 AI를 잘 활용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일 수도 있다. 결국 인간에게 더 중요해지는 것은 무엇을 물을지, 무엇을 선택할지, 결과물의 수준을 어떻게 판단할지에 대한 능력일 것이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것은 ‘남의 돈 10억을 쓰는 엘리트와 내 돈 1천만 원을 쓰는 반골’의 비교였다.

다소 과격한 표현이지만, 핵심은 책임의 거리라고 생각한다. 결과가 나에게 직접 돌아올수록 사람은 더 세밀하게 판단한다. 그래서 누군가의 조언을 들을 때도 그 사람이 무엇을 아는지만큼, 자신의 말과 결정에 실제로 어떤 책임을 지고 있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만 모든 주장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큰 빚이나 극단적인 압박을 일부러 만드는 방식은 누구에게나 적용할 수 있는 성공법이 아니며, 번아웃이나 우울증 같은 문제 역시 의지만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모든 문제를 내 탓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 다시 움직이는 것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후반 추천사들에서도 저자의 성향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강연주 저자는 그를 세상을 거스르기 위해 반골이 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믿는 길을 끝까지 가기 위해 세상과 다른 선택을 한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김민성 저자는 “이대로는 안 팔릴 것 같다”는 직설적인 피드백이 오히려 자신을 성장시켰다고 말한다.

윤만 저자는 빠른 실행력과 출간 이후까지 작가와 함께 움직이는 태도를 높이 평가한다.

이 추천사들을 읽으며 한 가지 생각이 남았다.

좋은 사람은 항상 나를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 아닐 수 있다.

때로는 듣기 좋은 위로보다 정확한 지적이 더 큰 성장을 만든다.

『반골』을 다 읽고 나면 결국 이 책이 묻는 것은 단순하다.

“당신은 지금 누구의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반골은 모든 규칙을 거부하는 사람이 아니다. 규칙이 왜 존재하는지 묻는 사람이다.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실패했을 때 방향을 수정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인생을 남에게 맡기지 않는 사람이다.

결국 자신만의 삶을 산다는 것은 자유만 얻는 일이 아니다. 선택과 함께 책임까지 가져오는 일이다.

잘못된 길이라면 돌아가도 되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도 된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정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 선택하고, 부딪히고, 수정하면서 나만의 기준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어쩌면 『반골』이 말하는 ‘세상을 등진다’는 것은 세상과 싸우라는 뜻이 아니라,

세상이 정해놓은 방향에서 잠시 등을 돌리고 내가 정말 가고 싶은 방향을 처음으로 바라보라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ㅡ

'책읽는쥬리 서평단 @happiness_jury'을 통해,

'모티브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전문가들이 타인의 무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지적 편향을 ‘지식의 저주’라고 부른다. 이론과 명분에 갇힌 사람들은 이 저주에 빠져 대중이 날것 그대로의 욕망을 읽지 못한다. 그들은 고상한 단어와 복잡한 논리에 집착하지만, 대중은 직관적이고 자극적이며 당장 내 삶을 바꿔줄 무언가에 지갑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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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가만히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겠는가 ㅣ 고전부적 1
이방원 지음 / 흑막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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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분명 선택해야 하는 순간인데도 결정을 미룰 때가 있다.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서, 누군가가 상처받을 것 같아서, 괜히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한 발 물러난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꽤 그럴듯한 이유를 붙인다. 신중해야 한다고, 관계를 지켜야 한다고, 도리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고전부적』은 태종 이방원의 삶을 통해 바로 이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책이다.

책의 시작에는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가 등장한다.

이방원은 정몽주의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그는 끝까지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고, 결국 선죽교에서 죽음을 맞았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역사적 장면이지만, 이 책은 여기서 선악을 판단하기보다 다른 질문을 던진다.


명분을 끝까지 지키는 것과 실제로 시대를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같은 방향을 향하는가.

책은 명분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명분이 행동의 기준이 아니라 행동하지 않기 위한 핑계가 되는 순간을 경계한다.

결정을 미루면서 스스로를 ‘신중한 사람’, ‘도리를 아는 사람’이라고 위로하고 있지는 않은지 묻는다.


이 지점은 우리의 일상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지만 부모가 실망할까 봐 머물고, 부당한 부탁을 거절하고 싶지만 관계가 틀어질까 봐 받아들이고, 잘못된 상황임을 알면서도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 되기 싫어 침묵한다. 그렇게 자신의 판단을 계속 뒤로 미루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삶의 중요한 결정들이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 채워진다.


책에서는 이를 ‘좋은 사람이라는 가면’으로 설명한다.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은 타인의 입에서 만들어진다. 

그 평판을 유지하려다 보면 싫어도 웃고, 화가 나도 참으며, 원하는 것이 있어도 욕심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게 된다.

처음에는 배려처럼 보이지만 반복되면 결국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보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가 먼저 떠오른다.


이방원은 이성계의 아들 가운데 문과에 급제한 인물이었다. 

학문을 익혔고 명망 있는 선비로 살아갈 수도 있었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머물지 않았다. 책은 이를 통해 묻는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은 내가 선택한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입혀준 것인가.

직업, 가족의 기대,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에 너무 오래 맞춰 살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역할이 자신의 한계가 된다.

그래서 이 책이 말하는 자유는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자유라기보다, 

타인의 기대를 실망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감수하면서 자기 판단을 선택하는 자유에 가깝다.

다만 결정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라온다.

책에서 말하는 ‘내 손에 피를 묻힌다’는 표현 역시 잔혹해지라는 의미보다 자신이 내린 결정의 흔적을 남에게 떠넘기지 말라는 뜻으로 읽혔다.

우리는 선택한 뒤 자주 말한다.


“다들 그렇게 하자고 해서.”

“상황이 어쩔 수 없어서.”

“누가 시켜서.”


이 말이 반복될수록 삶에서 나는 점점 사라진다.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면 내가 직접 이야기하고,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면 그 이후의 삶까지 준비해야 한다. 무언가를 끊어냈다면 그 빈자리에 무엇을 세울 것인지까지 책임져야 한다.

결단의 가치는 무엇을 버렸는가보다, 그 이후 무엇을 새로 세웠는가에서 완성된다.


책에서 또 하나 강하게 남은 주제는 ‘망설임’이었다.

충분한 정보가 모이면, 돈이 더 생기면, 상황이 좋아지면 시작하겠다고 생각하지만 완벽한 조건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물론 신중하게 판단하는 과정은 필요하다. 문제는 정보 수집과 결정 회피를 스스로 구분하지 못할 때다.

계속 검색하고, 비교하고, 고민하지만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 신중함 속에 두려움이 숨어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결정하지 않는다고 결과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결정하지 않는 동안 상황이 나를 대신해 결정한다.


다만 나는 이 책의 모든 주장에 그대로 동의하지는 않았다.

이방원의 강한 현실주의와 숙청을 현대인의 삶에 그대로 성공의 논리처럼 가져오는 것은 조심해서 볼 필요가 있다. 행동 없는 명분은 공허하지만, 반대로 명분 없는 행동 역시 위험하다. 빠른 결단이 언제나 옳은 것도 아니며 어떤 순간에는 충분히 숙고하고 멈춰 서는 것이 더 큰 용기일 수도 있다.


그래서 『고전부적』은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의 가치관과 부딪치며 읽을 때 더 흥미로운 책이었다.

좋은 사람이 되려는 것과 자기주장이 없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미움받을 용기와 독선의 경계는 어디인가.

신중함과 우유부단함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여러 사람이 함께 이야기해 본다면 더욱 다양한 생각을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좋은 책은 반드시 독자를 설득하는 책이 아니라, 읽기 전에는 하지 않았던 질문을 하게 만드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고전부적』 역시 그런 책이었다.

나는 지금 신중한 것인가, 아니면 두려운 것인가.

나는 정말 배려하는 것인가, 미움받기 싫은 것인가.

그리고 지금 내 삶의 중요한 결정권은 정말 내 손에 있는가.


결국 책을 읽고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이방원의 권력이나 승리가 아니었다.

내 삶에서 나는 얼마나 자주 ‘좋은 이유’를 만들어 결정을 미루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내가 선택하고, 결과를 바라보고, 잘못했다면 고치고, 무언가를 끊어냈다면 다시 세우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이 책에서 말하는 결단을 오늘의 삶에서 가장 건강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이 아닐까.

결단은 칼을 휘두르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칼이 지나간 자리를 책임 있게 다시 세우는 데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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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쥬리 서평단 @happiness_jury‘을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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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이성계 가문에서 무과가 아닌 문과를 택해 급제한 인물이었다.

누구보다 글을 읽었고, 누구보다 명분의 무게를 알았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명분만 외치는 자는 결코 새 시대를 열 수 없다는 사실을.
정몽주가 옳지 않아서 죽은 것이 아니다. 옳음만으로는 한 시대를 끝낼 수 없기에 죽은 것이다.
낡은 왕조의 마지막 명분은 그 자체로 견고한 성벽이었고, 그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단 한 번의 결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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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대한 부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부터 쟁취된다 - 신 국부론 ㅣ 불후의 명작 1
애덤 스미스 지음 / 에버필링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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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부자가 되는 방법을 이야기할 때 투자, 저축, 부동산, 사업처럼 ‘돈을 불리는 기술’부터 떠올린다. 하지만 『가장 위대한 부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부터 쟁취된다』는 그보다 먼저 돈은 왜 움직이는가,

사람은 왜 거래하는가, 부는 어떤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가를 묻는다.


책은 250년 전 애덤 스미스가 남긴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을 오늘의 현실로 가져온다.

마차가 자동차로, 편지가 메신저로 바뀌고 인공지능까지 등장했지만 인간은 여전히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고, 손해를 피하려 하며, 더 나은 삶을 원한다.

저자는 바로 이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 때문에 250년 전의 문장이 지금도 유효하다고 말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우리가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쉬운 ‘이기심’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스미스가 바라본 인간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타인을 짓밟는 존재가 아니다.

자신을 보존하고 삶을 개선하려는 욕망을 가진 동시에 타인의 감정을 상상하고 공감할 줄 아는 존재다.

『도덕감정론』의 ‘공명정대한 관찰자’라는 개념처럼, 인간에게는 자신의 욕망을 한 발 떨어져 바라보고 그것이 타인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지는 않는지 판단하려는 도덕적 감각도 존재한다.

그래서 이 책에서 말하는 이기심은 탐욕과 구분해서 읽어야 한다.

자신의 시간에 정당한 값을 요구하고, 더 나은 보수를 원하며, 자신의 삶을 지키려는 것까지 이기주의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어야 타인이 원하는 것도 제대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욕망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권리까지 침해하는 순간이다.


책 속 ‘빵집 주인’의 이야기는 이 원리를 가장 이해하기 쉽게 보여준다.

빵집 주인이 매일 새벽 일어나 빵을 굽는 이유가 동네 사람들을 사랑해서만은 아니다.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바로 그 이익 추구 덕분에 우리는 매일 안정적으로 빵을 살 수 있다. 누군가의 호의가 아니라 서로의 필요와 이익이 맞물리기 때문에 일상이 지속되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부에 대해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됐다.

부는 단순히 많은 돈을 소유하는 결과가 아니라, 내가 가진 능력과 시간과 자원을 다른 사람의 필요와 연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일 수 있다. 내가 돈을 벌고 싶다면 먼저 상대가 왜 나에게 돈을 지불해야 하는지를 만들어야 한다. 결국 시장에서 중요한 질문은 “나는 얼마나 절박한가”가 아니라 “나는 상대에게 어떤 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가”다.


이런 관점은 일과 인간관계에서도 꽤 현실적인 메시지를 준다.

“우리는 가족이니까”,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지금만 조금 희생하면 나중에 보답할게”라는 말이 언제나 선의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정당한 보상과 조건을 흐리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선을 말하는 것과 실제로 공정한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래서 책이 강조하는 ‘정직한 교환’이 기억에 남았다. 자신의 셈을 숨기면서 상대에게만 희생을 요구하는 관계보다 “나는 이것을 얻고 싶고, 대신 이것을 제공하겠다”고 말할 수 있는 관계가 오히려 더 건강할 수 있다. 한쪽이 베풀고 다른 쪽이 빚지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수평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에서 한 가지는 반드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책 역시 생각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인간의 이기심을 강조하는 책이기 때문에 더욱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느꼈다.

예를 들어 ‘타인의 자비에 기대지 말라’는 말은 경제적 자립과 협상의 측면에서는 강력한 조언이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해 “사람은 결국 자기 이익밖에 모른다”는 결론으로 확장한다면 스미스의 사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게 된다. 인간에게는 이익 계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랑, 연대, 책임, 돌봄, 희생도 존재한다. 스미스 자신도 인간의 공감과 도덕 감정을 중요하게 다뤘다는 점을 함께 봐야 한다.


‘이익을 추구하면 사회 전체에도 도움이 된다’는 논리 역시 조건 없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기업의 이익이 소비자의 안전이나 노동자의 권리, 환경보다 앞설 때 개인의 합리적인 선택이 사회 전체에는 큰 비용을 떠넘길 수도 있다. 독점이나 담합처럼 경쟁 자체가 무너지면 ‘보이지 않는 손’이 제대로 작동하기도 어렵다. 시장에는 개인의 욕망뿐 아니라 그것을 견제하는 법과 제도, 정보의 투명성, 신뢰와 공정한 규칙이 함께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메시지를 ‘이기심을 따르라’보다 ‘인간의 이기심을 부정하지 말되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끝까지 살펴보라’는 말로 받아들이고 싶다. 누군가 선의를 이야기한다면 무조건 의심할 필요는 없지만, 그 말 뒤에서 누가 무엇을 얻고 무엇을 부담하는지는 볼 줄 알아야 한다. 반대로 돈과 이익이 개입됐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관계를 속물적이라고 판단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 교환이 투명한가, 서로 동의했는가, 한쪽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가다.

이런 의미에서 ‘보이지 않는 손’은 모든 것을 알아서 해결해주는 마법 같은 손이라기보다,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필요를 조율하면서 만들어내는 복잡한 결과에 가깝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손이 건강하게 작동하려면 그만큼 보이는 규칙과 보이는 책임도 필요하다.


결국 이 책은 부자가 되는 비법을 알려주는 재테크서라기보다 돈을 벌기 전에 인간과 시장을 이해하게 만드는 책에 가깝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상대는 무엇을 원하는가?

내가 제공할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인가?

그리고 내가 얻는 이익의 뒤에서 누군가가 부당하게 비용을 떠안고 있지는 않은가.


이 질문을 함께 던질 수 있을 때 ‘부’라는 단어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가장 단단한 부는 단순히 더 많이 소유하는 데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알고 타인의 필요를 읽으며 서로에게 지속 가능한 이익을 만들어내는 능력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동시에 좋은 책을 읽는다는 것 역시 저자의 문장을 정답처럼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라, 그 문장을 현실에 대입해 보고 어디까지 유효하며 어디에서 한계가 생기는지를 스스로 판단하는 과정일 것이다.


250년 전의 애덤 스미스를 지금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도 어쩌면 여기에 있다.

그의 답을 그대로 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인간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우리 역시 세상을 미화하지도 악마화하지도 않고, 이익과 도덕, 욕망과 책임 사이를 스스로 생각해보기 위해서다.

그런 점에서 『가장 위대한 부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부터 쟁취된다』는 돈에 관한 책이면서 동시에 사람을 읽는 법, 관계를 바라보는 법,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몫을 어떻게 정직하게 지킬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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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쥬리 서평단 @happiness_jury’을 통해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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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스가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을 관통하여 긍정한 것은 타인을 해치는 탐욕적 ‘이기심(selfishness)’이 아니라, 자신을 보존하고 삶을 개선하려는 신중한 ‘자기애(self-love)’였다. 그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발현되는 정당한 자기애야말로 공명정대한 관찰자의 승인을 받을 수 있는 미덕(virtue)이라고 보았다.
이것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비정함에 진저리를 치며, 차라리 도덕과 시장은 함께 갈 수 없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스미스의 생각은 정반대였다. 도덕이 무너진 시장은 결코 부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신뢰가 사라진 거래는 비용을 끝없이 높이고, 결국 모든 교환을 멈춰 세운다. 그러니 가장 합리적인 자본가일수록 가장 도덕적인 인간이어야 한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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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감정 수업 - 세상이란 파도를 거침없이 타기 위한 자현 스님의 가르침
자현 지음 / 오아시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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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마음을 잘 다스리는 사람을 화내지 않는 사람, 욕심이 없는 사람, 어떤 상황에서도 평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화가 나면 참으려 하고, 질투나 욕망이 생기면 그런 마음을 가진 자신을 부끄러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현 스님의 『부처의 감정 수업』은 이런 생각부터 뒤집는다.

감정을 없애거나 억누르는 것이 마음공부가 아니라,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그 감정에 잡아먹히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현 스님은 자신이 8개의 박사 학위와 200편 이상의 논문을 쓰게 된 이유를 거창한 구도의 과정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남는 시간에 공부했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실패처럼 보였던 시간이 오히려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이 대목은 책 전체의 메시지와도 닿아 있다.

우리는 계획대로 흘러가면 성공, 어긋나면 실패라고 쉽게 판단하지만 인생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

중요한 것은 모든 일을 원하는 방향으로 통제하는 능력이 아니라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그 자리에서 무엇을 만들어낼 것인가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특히 강조하는 개념은 ‘인욕긍정론’이다.

오랫동안 여러 철학과 종교는 인간의 욕망을 절제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봐왔다.

하지만 자현 스님은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 역시 인간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진 에너지라고 말한다.

우리는 화가 나거나 질투가 생기면 곧바로 “이러면 안 되는데”라고 자신을 평가한다.

그러다 보면 원래의 감정보다 그 감정을 느끼는 자신을 미워하는 마음이 더 큰 고통이 되기도 한다.

감정을 긍정한다는 것은 감정의 명령대로 행동한다는 뜻이 아니다.

화가 나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까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질투나 욕망이 생기는 것도 자연스럽지만 그것 때문에 타인의 권리를 침해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감정에는 솔직하되 행동에는 책임을 지는 것. 나는 이 구분이 이 책을 읽을 때 특히 중요하다고 느꼈다.

책에는 행복에 대한 이야기 역시 많이 등장한다. 10억을 가지면 행복할 것 같지만, 막상 10억을 가지면 비교 대상이 10억을 가진 사람들로 바뀔 뿐이라는 ‘고레벨 사냥터’의 비유가 재미있다.

특히 SNS 시대에는 남의 여행, 명품, 집, 성공을 실시간으로 보며 끊임없이 자신을 비교한다. 결국 비교하는 방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더 높은 곳에 올라가도 만족은 오래가지 않는다.

행복의 기준을 계속 타인의 삶에 두면 내 행복의 주도권 역시 타인에게 넘겨주는 셈이다.

다만 책의 “돈만으로 행복할 수 없다”는 주장 역시 한쪽으로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경제적인 안정은 주거와 의료, 교육, 시간의 자유 등 삶의 조건을 실제로 크게 바꾼다. 그래서 이 메시지는 ‘돈은 중요하지 않다’기보다 ‘돈은 중요하지만 돈만으로 인간의 모든 괴로움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정도로 읽는 편이 더 설득력 있다.

감정을 설명하는 ‘거울’의 비유도 인상 깊었다.

거울은 앞에 무엇이 나타나든 그대로 비추지만 붙잡지는 않는다. 화가 났다고 내가 곧 ‘화’가 되는 것이 아니고, 슬픔이 찾아왔다고 내 인생 전체가 슬픔이 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화난 사람이다”가 아니라 “지금 내 안에 화가 올라오고 있다”라고 바라보는 작은 거리 하나가 감정에 휩쓸리지 않을 공간을 만들어준다.

《논어》의 ‘불천노(不遷怒)’ 역시 같은 맥락이다. 한 사람에게 받은 화를 다음 사람에게 옮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이 다음 관계까지 점령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성숙함이란 상처받지 않는 능력이 아니라, 내가 받은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전달하지 않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자현 스님은 이를 ‘연기하듯 살아가는 법’으로도 설명한다.

좋은 배우는 슬픈 장면에서는 진심으로 울지만 감독이 “컷!”이라고 하면 다시 다음 장면으로 이동한다.

우리 역시 슬플 때 충분히 슬퍼하고 화날 때 화를 느끼되, 동시에 그 감정을 바라보는 시선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을 관통하는 가장 인상적인 비유는 역시 이것이었다.

“감정이 파도라면 당신은 바다다.”

바다에는 끊임없이 파도가 친다. 잔잔한 날도 있고 거대한 파도가 몰려오는 날도 있다.

그러나 어느 하나의 파도가 바다 전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오늘 실패했다고 실패한 인생이 되는 것도 아니고, 오늘 화가 났다고 내가 분노로 가득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행복한 삶은 파도가 없는 삶이 아니라, 파도가 와도 그것이 지나가는 하나의 현상임을 알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삶에 가까울 것이다.

다만 이 책 역시 모든 문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한 번 더 질문하며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욕망을 긍정한다는 말은 어디까지 유효한지,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과 감정에 끌려 행동하는 것은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 개인의 관점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좋은 독서는 저자의 생각에 전부 동의하는 일이 아니라

“정말 그런가?”, “반대의 경우는 없는가?”를 물으며 결국 내 생각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부처의 감정 수업』은 감정을 없애는 기술보다 감정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생각하게 한다.

완벽해진 뒤에 행복하려 하지 말고, 지금의 불완전함 때문에 현재의 나를 실패라고 규정하지 말 것.

감정을 솔직하게 바라보되 그것이 나의 전부라고 착각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흔들린 뒤 다시 돌아올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이 책이 말하는 마음공부는 결국 그 힘을 기르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ㅡ

'카시오페아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느낌(감정)이 일어날 때
‘나에게 느낌이 일어났다’라고 여실히 알고,
느낌이 사라질 때
‘느낌이 사라졌다’라고 여실히 알아차려라.
이와 같이 오온(五蘊)을 여실히 알고 보면,
마음에 집착이 없어지고 번뇌로부터 해탈하게 된다."
《잡아함경(雜阿含經)》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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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의 사생아들 : 레프 톨스토이 x 오귀스트 르누아르 ㅣ 세계문화전집 3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외 지음, 홍선기 엮음 / 모티브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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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작가나 화가의 작품을 좋아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삶까지 궁금해진다.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했던 톨스토이

사람들의 행복한 순간을 따뜻한 색으로 그려낸 르누아르

작품만 놓고 보면 두 사람 모두 인간을 깊이 바라보고 사랑했던 예술가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거장의 사생아들』을 읽으면서 그 생각이 조금씩 바뀌게 되었다.

작품으로 알고 있던 ‘거장’의 모습과 실제 삶을 살았던 한 인간의 모습 사이에는 생각보다 큰 간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에게는 젊은 시절 농민 여성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아들 티모페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아들을 자신의 가족 안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티모페이는 훗날 톨스토이의 적자들을 태우는 마부로 살아갔다.

르누아르에게도 젊은 시절 모델이자 연인이었던 리즈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잔이 있었다.

르누아르는 딸에게 생활비를 보내고 편지를 전했지만 공개적으로 자신의 딸이라고 밝히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평생 수많은 여성과 아이들을 그렸던 그의 그림 속에서도 정작 잔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도덕을 이야기했던 톨스토이는 자기 아들을 온전히 품지 못했고,

행복한 가족과 아이들을 누구보다 아름답게 그렸던 르누아르는 자신의 딸을 화폭 밖에 두었다.

두 사람의 작품 속 세계와 실제 삶을 나란히 놓고 보니,

예술가가 작품에서 이야기한 가치와 그 사람이 현실에서 살아낸 삶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거장의 숨겨진 사생활을 들려주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작품을 통해 만들어온 거장의 이미지 너머로 모순과 결핍을 안고 살아간 한 인간의 모습을 함께 바라보게 한다.

작품을 사랑하는 것과 그 작품을 만든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일 수도 있다.

좋은 작품을 만든 사람은 반드시 좋은 사람이어야 할까?

예술가의 삶과 작품은 어디까지 함께 바라봐야 할까?

책을 읽다 보니 톨스토이와 르누아르에게는 분명한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평생 사람을 바라봤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을 바라보는 방향이 완전히 달랐다.

톨스토이는 인간의 마음속으로 계속 들어갔다.

사람이 왜 욕망에 흔들리는지, 무엇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는지,

돈과 신분은 인간을 어떻게 바꾸는지, 죽음을 앞두면 무엇이 남는지를 끊임없이 물었다.

반대로 르누아르는 눈앞에 펼쳐진 삶을 바라봤다.

햇빛 아래 앉아 있는 사람, 춤추는 연인, 아이들의 발그레한 얼굴, 함께 식사하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그렸다.

같은 인간을 바라보면서도 톨스토이는 사람의 내면으로 향했고, 르누아르는 사람을 둘러싼 삶의 순간으로 향했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두 사람이 조금 더 선명하게 이해됐다.

내게 톨스토이는 ‘거울’을 들여다보는 사람처럼 느껴졌고, 르누아르는 ‘창문’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거울은 나를 보여준다. 보고 싶은 모습뿐 아니라 감추고 싶은 모습까지 보여준다.

반면 창문은 나의 시선을 바깥으로 돌려준다. 내 마음속에만 갇혀 있던 시선을 햇빛과 사람, 풍경과 일상으로 옮겨준다.

톨스토이는 거울을 통해 인간이 외면하고 싶은 모습을 들여다봤고, 르누아르는 창문을 통해 인간이 놓치기 쉬운 아름다운 순간을 바라봤다.

한 사람은 인간의 어둠을 오래 바라봤고, 한 사람은 인간의 밝음을 오래 바라봤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이 평생 바라본 대상은 같았다.

인간이었다.

이 차이는 책에 실린 톨스토이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더욱 선명해졌다.

『주인과 일꾼』에는 부유한 상인 바실리 안드레이치와 그의 일꾼 니키타가 등장한다.

바실리는 좋은 조건으로 땅을 사기 위해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에도 길을 나선다.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 그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다 두 사람은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고 죽음의 위기에 놓인다.

처음의 바실리는 자신부터 살아남으려고 한다.

니키타를 남겨두고 혼자 빠져나가지만 눈보라 속에서 계속 길을 헤매다 결국 다시 그가 있던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죽어가는 니키타를 발견한다.

그 순간 바실리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한다.

자신의 몸으로 니키타를 덮어 체온을 나눠준다.

평생 무엇을 더 가질 것인가를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준다.

나는 이 장면이 오래 남았다.

죽음 앞에서는 돈도, 소유도, 주인과 일꾼이라는 위치도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결국 남는 것은 한 인간과 또 다른 인간이다.

평생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던 바실리가 마지막 순간에 경험하는 것은 더 많은 소유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자신의 삶이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다.

어쩌면 톨스토이가 말하고 싶었던 구원도 거창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만 살면 된다’는 마음에서 벗어나는 순간에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이 작품을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톨스토이 자신의 삶이 떠오른다.

작품에서는 사랑과 희생을 이야기했지만 현실에서는 자신의 아들을 품지 못했다.

처음에는 이 모순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사람은 자신이 완벽하게 해낸 것만 글로 쓰지는 않는다.

오히려 하지 못했던 것, 후회했던 것,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끝내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글 속에서 반복해서 묻기도 한다.

사람은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답보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질문에 더 오래 매달리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톨스토이의 작품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사랑과 구원, 욕망과 절제에 대한 질문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그가 누구보다 도덕적으로 완벽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 역시 그렇게 살아내기 어려웠기 때문에 평생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고 또 물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의 문학은 완성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말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답을 찾지 못한 한 인간이 평생 써 내려간 질문에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악마』에서는 그런 톨스토이의 내면이 훨씬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젊은 지주 예브게니는 결혼 전에 한 농촌 여성과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다.

결혼하고 새로운 가정을 꾸린 뒤에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시 그 여자를 보는 순간 과거의 욕망이 되살아난다.

자신에게 좋은 아내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잘못된 선택 하나가 현재의 삶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런데 알고 있는 것과 욕망을 통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이 부분은 생각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많은 잘못은 무엇이 옳은지를 몰라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할 때가 있다.

옳고 그름을 아는 것과 실제로 옳은 선택을 하는 것 사이에는 생각보다 긴 거리가 있다.

그래서 읽다 보니 제목의 ‘악마’가 바깥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계속 그쪽으로 마음이 끌리는 것. 인간 안에서 스스로도 통제하기 힘든 욕망 자체가 악마처럼 느껴졌다.

톨스토이 역시 젊은 시절 자신의 욕망과 성적 경험, 그로 인한 죄책감을 오랫동안 기록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악마』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멀리서 관찰하며 쓴 작품이라기보다 자신의 내면을 꺼내놓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이야기처럼 읽혔다.

그래서 다시 ‘거울’이라는 생각으로 돌아오게 된다.

거울은 우리가 원하는 모습만 보여주지 않는다. 외면하고 싶은 모습도 그대로 비춘다.

톨스토이에게 글쓰기는 자신을 아름답게 보이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가능하면 외면하고 싶은 자기 모습을 오래 바라보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크로이체르 소나타』에서는 욕망이 질투로 이어진다.

아내가 한 바이올리니스트와 베토벤의 《크로이체르 소나타》를 함께 연주한 뒤 남편의 의심과 질투는 점점 커지고 결국 비극으로 향한다.

이 작품을 읽으며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톨스토이와 음악의 관계였다.

그는 음악을 무척 사랑했다.

차이콥스키의 《현악 사중주 1번》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고,

쇼팽을 들을 때면 자신이 직접 그 음악을 작곡한 것처럼 느낀다고 할 만큼 음악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러면서도 음악이 인간의 감정을 순식간에 움직이는 힘을 두려워했다.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다.

음악 한 곡을 듣다가 오래전에 잊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떠오르기도 하고, 아무렇지 않았던 마음이 갑자기 흔들리기도 한다.

음악은 우리에게 무엇을 생각하라고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마음을 움직인다.

톨스토이가 두려워했던 것도 어쩌면 바로 이 지점이 아니었을까.

이성이 준비되기도 전에 감정이 먼저 움직여버리는 순간 말이다.

그래서 책 앞부분에 소개된 클래식 여덟 곡도 흥미로웠다.

쿠프랭,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구노, 차이콥스키, 바그너.

단순히 책을 읽을 때 틀어놓는 배경음악이 아니라 실제 두 거장의 삶과 연결된 음악들이다.

르누아르 역시 어린 시절 노래에 재능이 있어 작곡가 샤를 구노와 인연을 맺었고,

조금만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화가가 아닌 음악가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특히 바그너를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는 정말 재미있다.

르누아르는 바그너를 동경해 직접 찾아가 그의 초상화를 그렸다.

반면 톨스토이는 『예술이란 무엇인가』에서 바그너의 예술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같은 음악가 앞에서 한 사람은 붓을 들었고, 다른 한 사람은 펜을 들었다.

짧은 일화지만 두 사람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다.

르누아르는 자신이 아름답다고 느낀 것을 오래 바라보고 남기려 했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거나 옳지 않다고 생각한 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끝까지 질문했다.

그리고 책에 실린 르누아르의 그림을 넘기다 보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톨스토이의 작품을 읽으며 한참 인간의 욕망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다 르누아르의 그림을 만나면 정말 창문 하나를 활짝 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발그레한 볼, 부드러운 피부, 아이와 여성, 꽃과 햇빛.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는 욕망과 죄책감, 죽음 같은 무거운 문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웃고, 햇볕을 쬐고, 누군가의 얼굴을 바라보는 평범한 행복도 존재한다.

톨스토이가 ‘인간은 왜 이렇게 괴로운가’를 묻는 사람처럼 느껴진다면,

르누아르는 ‘그래도 삶에는 이런 아름다운 순간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딸 잔의 존재를 알고 난 뒤 그의 그림을 다시 보면 그 밝음마저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톨스토이가 자기 삶의 어두운 부분까지 작품 안으로 끌어들였다면,

르누아르는 어쩌면 자신의 어두운 부분은 화면 밖에 두고 자신이 사랑하고 싶었던 세계를 오래 그렸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어느 쪽이 더 솔직하고 어느 쪽이 더 옳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생각해보면 우리 역시 두 가지 방식으로 살아간다.

힘든 일이 생기면 그것을 끝까지 들여다보며 해결하려고 할 때도 있고,

어떤 날에는 잠시 그 문제에서 눈을 돌려 산책을 하거나 좋은 음악을 듣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서 다시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한다.

자기 안을 들여다보는 것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일이 아니라 어쩌면 사람이 무너지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모두 필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톨스토이의 거울과 르누아르의 창문이라는 이미지가 더 마음에 남는다.

거울만 보고 있으면 자기 안에 갇힐 수 있고, 창밖만 바라보면 자신의 문제를 외면할 수도 있다.

때로는 거울 앞에 서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솔직하게 바라봐야 하고, 때로는 창문을 열어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세상의 좋은 것들을 다시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묘하게도 톨스토이의 아들 티모페이와 르누아르의 딸 잔은 같은 해인 1934년 세상을 떠났다.

거장들의 이름은 지금도 수없이 이야기되고 있지만 그 이름 뒤에 가려져 있던 두 사람의 삶은 오랫동안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강렬한 제목이라고만 생각했던 『거장의 사생아들』이라는 말도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조금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톨스토이를 덜 위대한 작가라고 생각하게 된 것도 아니고, 르누아르의 그림이 덜 아름답게 느껴진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그들도 우리처럼 욕망하고 실수하고 모순을 안고 살아간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작품을 이전보다 조금 더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예전에는 거장의 작품을 보면 그 결과물만 보았다면,

이제는 그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질문과 모순을 품고 살아갔을지를 생각하게 된다.

위대한 작품은 완벽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끝내 해결하지 못한 질문을 오래 붙들고 살아간 사람이 남긴 흔적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예술의 의미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완벽한 삶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 자신의 부족함과 모순 속에서도 무엇인가를 이해하려 했던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그 흔적을 수십 년, 수백 년 뒤의 우리가 다시 읽고 바라보면서 우리 자신의 삶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

그래서 좋은 예술은 정답을 남기기보다 오래 생각하게 만드는 질문을 남기는지도 모르겠다~!

톨스토이는 거울을 보며 인간의 안쪽을 들여다봤고, 르누아르는 창문을 열어 삶의 아름다운 순간을 바라봤다.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도 둘 다 필요하다.

내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봐야 할 때도 있고, 너무 내 안에만 갇혀 있지 말고 고개를 들어 바깥을 바라봐야 할 때도 있다.

문학과 미술, 음악을 함께 따라간 책인데 마지막에는 이상하게도 두 거장보다 내 삶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됐다.

나는 내가 보고 싶지 않은 모습까지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지,

그리고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데 너무 몰두한 나머지 지금 내 곁을 지나가고 있는 좋은 순간들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의 어둠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삶의 밝은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잘 살아간다는 것은 그 두 가지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거울을 들여다봐야 할 때와 창문을 열어야 할 때를 아는 것.

『거장의 사생아들』을 읽고 나서 가장 오래 남은 생각이었다.

ㅡ

'단단한맘킴히 서평단'을 통해 '모티브 출판사'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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