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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8 - 박경리 대하소설, 5부 3권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6월
평점 :

『토지』 18권, 5부 3권에 이르면 이 거대한 이야기가 어느새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1권의 평사리에서 시작된 삶의 물결은 이제 1940년대 초반,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고 태평양전쟁으로 치닫는 시기까지 흘러왔다.
시대는 더 어두워지고, 사람들은 더 깊은 고통 속으로 밀려 들어간다.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만으로 예비검속되어 끌려가고, 징병과 징용, 배급과 물자 부족, 일본식 훈련과 감시가 일상을 짓누른다.
역사를 아는 독자는 해방이 멀지 않았음을 알지만, 작품 속 인물들에게는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오늘은 그저 한 걸음 더 버텨야 하는 시간일 뿐이다.
18권에서 가장 먼저 마음을 붙잡는 인물은 여옥과 명희, 그리고 임명빈이다.
여옥은 1년 4개월의 형무소 생활 끝에 병보석으로 풀려나지만, 돌아온 모습은 살아 있는 사람이라기보다 해골에 가깝다.
명희는 그런 여옥을 보며 “죽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울부짖는다. 그런데 명희의 공포는 여옥만을 향한 것이 아니다.
오빠 임명빈 역시 병명도 없이 생명의 불길이 꺼져가고 있다.
여옥은 해골처럼, 명빈은 산송장처럼 누워 있다. 한 사람은 시대의 폭력에 짓눌렸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무능과 패배감에 짓눌려 있다.
임명빈의 고통은 단순한 육체의 병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젊은 시절부터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고 느낀다.
시인이 되고 싶었고, 작가가 되고 싶었고, 평론가가 되고 싶었지만 끝내 그 어떤 것도 되지 못했다.
독립운동이나 이념의 길에서도 자신의 의지에 능력이 따라주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삶을 쓸모없는 인생처럼 여기며 무너져 내린다.
그 말은 한 개인의 자책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시대를 살아낸 지식인의 무력감이 함께 들어 있다.
이 대목이 아픈 이유는 임명빈이 특별히 나약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하고 싶었던 삶과 실제로 살아낸 삶 사이의 간격을 끝내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이 너무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되고 싶었던 나’를 품고 산다. 그런데 시대가, 환경이, 능력의 한계가 그 길을 막아설 때 인간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가장 잔인해진다.
『토지』 18권은 그 고통을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
그런 임명빈 앞에서 명희는 냉정하게 말한다.
고통스럽다고 병이 난다면 성한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마주 보고 살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그 말은 오빠에게 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명희 역시 여옥의 참혹한 모습과 자신의 외로움을 감당해야 한다.
맞서 싸울 대상조차 없이 삶의 의욕을 잃은 사람을 보는 일은, 그 어떤 싸움보다 더 막막하다.
명희는 임명빈의 시간이 멈춰버린 것을 눈앞에서 본다.
그러나 이 권은 절망만을 말하지 않는다. 여옥은 죽고 싶었던 시간을 통과했기에 오히려 삶이 소중하다고 말한다.
“어떤 경우든 살아 있다는 것은 축복”이라는 여옥의 말은 흔한 위로처럼 들리지 않는다.
형무소를 지나고 배신을 지나고 절망의 늪을 건너온 사람이 하는 말이기에 더 무겁게 다가온다.
여옥이 말하는 힘은 단순한 신앙만이 아니다. 그는 그것을 사람에 대한 신뢰, 다시 말해 다시 사람을 믿고 싶어지는 마음이라고 말한다.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사람이 다시 삶을 붙드는 이유는 거창한 이념이나 완벽한 해답이 아닐 때가 많다.
끝까지 완전히 미워할 수 없는 사람, 아직은 믿고 싶은 한 조각의 선함, 가끔 나타나는 빛나는 사람들 때문이다.
『토지』는 인간이 얼마나 약한지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인간이 얼마나 질긴 존재인지 보여준다.
18권의 또 다른 축은 양현을 둘러싼 마음의 엇갈림이다. 서희는 양현과 윤국의 혼례를 생각하지만, 양현의 마음에는 이미 영광이 있다.
윤국은 양현을 사랑하지만 양현은 윤국을 남편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남매처럼 자란 오빠를 남편으로 받아들인다는 일은 양현에게 감당하기 힘든 일이다.
결국 윤국은 양현이 자신과 다른 길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양현은 양현의 길을 가고, 자신은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려 한다.
이 사랑의 엇갈림은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다. 『토지』에서 사랑은 늘 개인의 감정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가문의 역사, 부모 세대의 상처, 시대의 폭력, 신분과 관계의 얽힘이 함께 따라붙는다.
그래서 양현의 눈물은 한 사람의 연애 감정이 아니라, 자기 삶을 스스로 선택하기 어려웠던 시대의 슬픔으로 다가온다.
사랑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계, 마음이 있어도 그 마음을 지키기 어려운 세계가 18권의 분위기를 더욱 먹먹하게 만든다.
조준구의 죽음 역시 오래 남는다. 『토지』 전체에서 가장 악독한 인물 중 하나였던 그는 마침내 죽음을 맞이한다.
평생 남의 것을 탐하고, 사람을 짓밟고, 최참판댁을 무너뜨렸던 인물의 마지막이다. 그런데 그의 죽음은 예상보다 씁쓸하다.
악인이 벌을 받는 장면이라기보다, 죽음 앞에서는 그 역시 아무것도 아닌 한 인간이 되어버리는 장면처럼 보인다.
더구나 아들 조병수가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하는 모습을 보면, 죄와 혈연, 업보와 책임이 단순히 선악으로 나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토지』가 대단한 이유는 악인의 죽음마저 통쾌함 하나로 끝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누군가는 죄를 지어도 비교적 평온한 죽음을 맞고, 누군가는 죄 없이 끌려가 고통을 겪는다.
세상은 언제나 공평하게 보상하고 처벌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결국 남는 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지켜야 할 믿음, 그리고 순간의 이익이 아니라 진실로 오래 버티는 삶이다.
18권에서는 3세대 인물들의 움직임도 눈에 띈다. 용이의 죽음 이후 그 뜻을 이어가는 홍이와 그의 딸 상의, 최참판댁의 후손 윤국, 그리고 여러 젊은 인물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시대를 받아들이고 해석한다. 상의는 학교와 통영에서 일본인과 조선인, 교사와 학생, 장터와 선창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 과정에서 일본과 일본인을 어떻게 바라볼지 스스로 판단해 나간다. 부모 세대가 겪은 상처와 역사 위에서, 다음 세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시대를 배워간다.
그 점에서 18권은 끝을 향해 가는 권이면서 동시에 다음 세대가 전면에 등장하는 권이기도 하다. 1세대와 2세대가 남긴 원한, 사랑, 실패, 신념, 상처가 3세대에게 이어진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과거를 반복하는 존재가 아니다. 서로 얽힌 가문의 역사 속에서도 새롭게 힘을 합치고, 살아남을 방법을 찾고, 자기만의 판단을 만들어간다. 전쟁 중 언제 폭격이 떨어질지 모르는 비상시국에서도 젊은이들은 술잔을 부딪치며 서로 등지고 살 까닭이 없다고 말한다. 그 장면은 어둠 속에서도 다음 시대가 조금씩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토지』 18권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무겁고 어둡다. 하지만 그 어둠은 단순한 절망이 아니다. 여옥과 명빈이 조금씩 회복해가는 모습, 모화와 몽치의 인연, 윤국이 자기 마음을 받아들이는 과정, 상의가 시대를 바라보는 눈을 키워가는 장면들은 이 거대한 소설이 끝까지 삶의 편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전쟁은 사람들의 밥그릇과 말과 몸과 자유를 빼앗아가지만, 사람들은 그 안에서도 사랑하고, 걱정하고, 서로를 일으켜 세운다.
책 속에는 “인간이란 끝없이 약한 거예요. 하지만 살기 위해선 끝없이 질긴 거예요”라는 말이 나온다. 이 문장이야말로 18권 전체를 관통하는 말처럼 느껴진다. 약하기 때문에 무너지고, 질기기 때문에 다시 일어난다. 절망하기 때문에 삶의 소중함을 알고, 배신당했기 때문에 진실의 가치를 더 또렷하게 본다.
『토지』 18권은 해방 직전의 가장 어두운 시간을 보여주지만, 역설적으로 인간이 왜 끝내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책이다. 삶이 아름다워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너무 고통스럽고, 너무 억울하고, 너무 무의미해 보여도, 살아 있는 한 다시 믿을 가능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박경리의 『토지』가 오래 남는 이유는 바로 그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힘을 끝까지 놓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권은 두 권뿐이다. 독자는 빨리 해방을 만나고 싶으면서도, 이 거대한 세계와 헤어지는 일이 아쉬워진다. 『토지』 18권은 완결을 앞둔 길목에서 인간의 생명력, 시대의 폭력, 사랑의 엇갈림, 세대의 이어짐을 한데 묶어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독자에게 조용히 말한다. 바닥 모를 늪 속에서도 사람은 살아간다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슬픔 속에서도, 사람은 끝내 다시 살아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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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평하다면 병신이라도 다 살아가는 길이 어찌 없을 것이여? 손발 없는 배암도 묵고 살고 물속의 개기도 묵고 사는디, 일찍이 가고 더디게 가는 거사 천지조화, 사람이 하는 일은 아닌께로."
‘할머니 말씀이 옳아요. 가두는 자가 없으면 갇히는 자도 없을 것이며 들판의 곡식이며 열매며, 많이 갖는 자가 없으면 굶어 죽는 자도 없을 것이며, 죽이는 자 없으면 죽는 자도 없을 것이며 주인이 있으니 하인도 있는 것, 부리 하나, 작은 밥통 하나 몸속에 달고서 수만 리 창공을 날아 먹이를 찾고 번식하는 새, 겨울 한 철 나무뿌리 갉아먹으며 연명하는 작은 짐승들, 그들은 자유롭다! 해방된 존재들이다! 오직 인간들만이 사로잡혀 있다.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걸까? 말에 사로잡혀 있는 걸까? 말, 말, 그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구원의 연장[道具]이기도 했지만 피로 물든 흉기는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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