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여인의 선물
데니스 존슨 지음, 김승욱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일을 겪는다. 성공과 실패, 사랑과 이별, 기쁨과 슬픔….

우리는 특별한 사건들이 인생을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면 오래 남는 것은 의외로 평범한 순간들이다.

함께 밥을 먹던 저녁, 아무렇지 않게 나눴던 대화, 끝내 하지 못했던 사과,

그리고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던 침묵.

데니스 존슨의 유작 《바다 여인의 선물》은 바로 그런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처음에는 다섯 편의 단편이 서로 흩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줄거리도 선명하지 않고, 현실과 기억, 꿈이 뒤섞여 있어 쉽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다.

하지만 한 편 한 편 따라가다 보니, 이 작품은 사건을 들려주는 소설이 아니라 삶을 오래 살아본 사람이 자신의 기억을 한 장씩 넘겨 보여주는 기록에 더 가까웠다.

결국 모든 이야기는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무엇을 후회하며, 마지막에는 무엇을 붙잡고 살아가는가?’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첫 번째 단편인 〈바다 여인의 선물〉이었다.

이야기는 사람들이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지금까지 들었던 가장 큰 소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누군가는 이혼을 통보받던 순간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심장이 터질 듯 뛰던 순간이나 아이가 태어나 처음 울던 소리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전쟁에서 다리를 잃은 크리스는 뜻밖의 말을 꺼낸다.


“내가 들은 가장 조용한 소리는 지뢰가 내 다리를 날려버리던 소리였다.”


처음에는 이 문장이 이해되지 않았다. 폭발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가장 조용한 소리일 수 있을까. 하지만 책을 읽고 나니 데니스 존슨이 말한 침묵은 귀로 듣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 큰 충격은 오히려 모든 소리를 지워 버린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도, 삶이 한순간에 무너졌을 때도 사람은 크게 울부짖기보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진짜 고통은 비명을 지르는 것이 아니라, 말조차 잃게 만드는 침묵에 더 가까운 것이다.


이어지는 장면은 더욱 인상 깊었다. 크리스는 농담처럼 자신의 잘린 다리를 보여주겠다고 말하고, 사람들은 웃으며 받아들인다. 하지만 의족을 벗는 순간 디어드리는 눈물을 흘린다.

처음에는 상처가 너무 충격적이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다시 읽으니 그녀가 본 것은 다리가 아니었다. 늘 유쾌하게 웃던 사람이 사실은 전쟁이라는 시간을 견디고 살아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마주한 것이다. 몇 달 뒤 두 사람이 결혼했다는 결말도 처음에는 갑작스럽게 느껴졌지만, 작가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당신도 나도 이유를 안다.“라는 한 문장만 남긴다. 그 여백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우리는 사람을 겉모습으로 너무 쉽게 판단하며 살아간다.

늘 웃는 사람은 아무 걱정이 없을 것 같고, 씩씩한 사람은 상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구나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시간을 견디며 살아간다.

진짜 이해란 지금 눈앞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여기까지 오기 위해 견뎌 온 시간을 상상해 보는 일이다. 어쩌면 사랑도 마찬가지다. 완벽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이 장면은 전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후 이어지는 ‘공범’에서는 침묵이 또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한 남자가 자신이 아끼던 그림을 벽난로 속에 던져 버린다.

그는 “내 것이니 내가 태워도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더 이상했던 것은 그 장면을 바라보던 사람들이었다.

누구도 그를 말리지 않는다. 모두가 불타는 그림만 바라볼 뿐이다.

왜 아무도 말리지 않았을까?

데니스 존슨은 끝내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질문을 남긴다.


살아가면서 가장 큰 후회는 내가 저지른 잘못보다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했던 순간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 힘들어하는데 괜히 나섰다가 불편해질까 봐 모른 척했던 일,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침묵했던 일,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미루다 끝내 하지 못했던 일처럼 말이다.

그때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그 침묵이 가장 크게 마음에 남는다.

그림을 태운 사람은 한 명이지만, 그 광경을 끝까지 지켜본 사람들도 결국 그 순간의 일부가 된다.

침묵은 누군가를 이해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잘못을 완성시키는 공범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이 장면이 조용히 일깨워 준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나이 들어가는 화자의 삶으로 이어진다.

성공한 광고인이었던 그는 오랜 시간이 지나 상을 받게 되지만, 기쁨보다 허무함을 먼저 느낀다.

몸은 조금씩 고장 나고, 신경통은 점점 심해지며, 예전의 영광은 기억 속 이야기가 되어 간다.

그가 말한 “삶의 속도에 관한 엄청난 슬픔”이라는 문장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젊을 때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계절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한 해가 너무 빨리 끝나 버린다. 성공은 남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시간도 함께 흘러가 버린 것이다.


우리는 늘 더 높은 곳을 향해 달린다. 더 좋은 직장, 더 많은 돈, 더 큰 성공을 이루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을 오래 붙잡아 주는 것은 성취보다 기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결국 삶은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었느냐보다, 하루를 얼마나 진심으로 살아냈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언젠가 오늘을 돌아봤을 때 후회보다 따뜻한 기억이 하나라도 더 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을 앞둔 첫 번째 아내에게서 걸려 온 전화도 잊기 어려웠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사과를 주고받는다.

그런데 화자는 통화 도중 자신이 첫 번째 아내와 이야기하는지, 두 번째 아내와 이야기하는지조차 헷갈리기 시작한다. 황당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기억도 함께 늙어 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누구였든 그는 두 사람 모두에게 같은 잘못을 저질렀고, 이제야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사형수와 그의 아내가 등장하는 이야기 역시 오래 남는다.

그녀는 남편을 속이기 위해 거짓말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앞둔 사람이 마지막만큼은 행복한 마음으로 떠나기를 바랐기 때문에 거짓말을 선택한다.

거짓말조차 사랑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이 씁쓸하면서도 아름다웠다.

반대로 화가 토니의 이야기는 예술조차 인간을 완전히 구원하지 못한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뛰어난 재능과 깊은 감수성을 지녔지만 끝내 외로움을 이겨 내지 못한 그의 삶은 예술도 인간의 고통을 모두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인정한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크게 남은 단어는 ‘침묵’이었다.

우리는 침묵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상태라고 생각하지만, 데니스 존슨은 가장 깊은 진실은 말보다 침묵에 담겨 있다고 이야기한다. 사랑도, 상실도, 용서도, 후회도 결국은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은 친절하게 의미를 알려주지 않는다.

대신 독자가 자신의 삶을 떠올리며 빈칸을 채우기를 기다린다.

어쩌면 이것이 이 작품이 어려운 이유이면서도 오래 기억되는 이유일 것이다.

살아온 시간이 쌓일수록 같은 문장을 전혀 다른 마음으로 읽게 되는 책~!

그래서 이 소설은 한 번 읽고 끝나는 작품이 아니라, 삶의 어느 순간 다시 꺼내 읽고 싶은 책으로 남았다.


《바다 여인의 선물》은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더 잘 살아가라고 말하는 소설이다.

인생은 거창한 사건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평범했던 하루, 누군가와 나눈 대화, 끝내 하지 못한 말, 그리고 조용히 곁을 지켜 준 사람들.

그런 작은 순간들이 모여 한 사람의 삶을 만든다.

책을 읽고 나니 나 역시 오늘 하루를 조금 더 소중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언젠가 마지막 순간에 떠올릴 기억을 만드는 일은 거창한 내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이 책은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으로 전해 주었다.


ㅡ

'이키다 @ekida_library'님을 통해 '다산책방(다산북스) 출판사'로부터

도서와 소정의 제작비를 지원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젊은 크리스 케이스는 대화의 방향을 거꾸로 뒤집어서 침묵이라는 주제를 꺼내 들었다.
그는 자신이 들은 가장 고요한 소리는 아프가니스탄 카불 외곽에서 지뢰에 자신의 오른쪽 다리가 날아가던 소리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침묵에 대해 전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사실 이제 우리가 침묵에 빠져 있었다. 크리스가 다리 한쪽을 잃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린 사람도 있었다.
크리스는 아주 미약하게 다리를 절 뿐이었다.
나는 심지어 그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참전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