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의 뿌리, 한국광복군
조승옥 지음 / 세종마루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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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욱의 『국군의 뿌리,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 국군의 기원을 미군정 경비대가 아니라 의병·독립군·한국광복군으로 이어지는 무장 독립투쟁의 계보에서 재정립하려는 책이다. 우리가 흔히 “국군은 미군정 시기 조선경비대에서 시작됐다”고 배워온 통념에 대해, 저자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국군의 뿌리를 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 이후 이어진 의병, 그 의병이 만주와 연해주에서 성장한 독립군, 그리고 1940년 충칭에서 임시정부가 창설한 한국광복군으로 이어지는 항일 무장투쟁의 계보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계보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실제 전투 경험과 지휘 방식, 작전 계획, 사람들의 연결, 그리고 군의 정신이 오늘날 국군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 메시지다.

이 책에서 특히 중요한 문제의식은 이렇다.

국군은 스스로를 누구의 후예라고 말할 것인가?

독립운동이 세운 나라의 군대인가, 아니면 미군정이 만든 치안조직의 연속인가?

이 질문은 단순히 상징 싸움이 아니다. 장병의 자부심과 직결된 문제다. 만약 국군의 기원을 조선경비대에만 둔다면, 국군은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인사들을 바탕으로 미군정이 만든 조직의 후예가 된다. 반대로 국군의 뿌리를 의병‧독립군‧광복군으로 선언한다면, 국군은 일제에 무력으로 저항하고 나라를 되찾으려 했던 무장 독립군의 후예가 된다. 저자는 이 차이가 현재 국군의 정통성과 사명감을 결정한다고 본다. 이 주장은 육군사관학교의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논란과도 직결된다. 홍범도를 기릴 것인가, 아니면 흉상을 옮길 것인가의 문제는 곧 ‘우리 군이 어떤 전통을 이어받겠다고 공식적으로 말할 것인가’를 묻는 일이다.

저자는 먼저 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짚는다. 일제는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고 무력으로 진압했지만, 장병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의병으로 전환되었다. 이 의병은 농민들의 즉흥적 봉기 같은 이미지와 달랐다. 이미 훈련받은 해산 군인들이 합류하면서 의병 부대는 조직력과 전투력을 갖춘 실질적인 무장세력으로 발전했다. 이후 많은 인물들이 만주로 넘어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체계적으로 독립군 간부를 길러냈다. 신흥무관학교는 망명지에 세운 사실상의 사관학교였고, 수천 명의 무장 독립 인재를 배출했다. 그 전통은 만주 독립군, 대한민국임시정부, 그리고 광복군으로 이어진다. 즉 국군의 원류는 이미 이때부터 “조직된 무력”의 형태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계보의 분기점이 바로 한국광복군이다. 1940년 충칭에서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창설했다. 광복군은 상징용 깃발이 아니라 실제 전투부대였다. 총사령 지청천은 만주에서 독립전쟁을 지휘한 실전 지휘관이었고, 광복군은 선전‧심리전‧정보전은 물론, 미국 전략첩보국(OSS)과 협력해 일본군 점령지(조선 본토)에 잠입해 정보 수집과 게릴라전을 수행하는 ‘독수리 작전’까지 준비했다. 이 계획은 해방 직전까지 실제로 진행되었다. 즉 광복군은 해방 후 입국하는 난민 집단이 아니라, 해방 이전에 이미 국내에 투입될 준비가 된 국군의 전신이었다. 김구는 이 점을 누구보다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임시정부 주석으로서 광복군을 국제 무대에서 ‘대한민국의 군대’로 인정받게 하려고 움직였고, 이를 통해 해방 후 군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다. 이 책은 김구를 단순한 독립운동 상징이 아니라 국군의 정통성을 설계한 인물로 다룬다.

해방 이후의 전개는 이 책의 하이라이트다. 남한을 통치하던 미군정은 조선경비대와 군사영어학교를 세워 치안과 경계를 맡길 조직을 만들었고, 여기에 일본군·만주군 출신 인사들이 대거 들어갔다. 그래서 “경비대가 국군의 모체”라는 말이 지금까지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조승욱은 “그건 절반만 본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인사 기록을 근거로, 미군정도 광복군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했다고 보여준다. 미군정은 군 통제부서의 수장 격인 통위부장에 임시정부 참모총장 출신 유동열을 임명했고, 경비대 총사령 자리에는 광복군 출신 송호성을 앉혔다. 즉 미군정조차 광복군 라인을 ‘정당한 주체’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 흐름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더 명확해진다. 초대 국방부 장관 이범석, 차관 최용덕은 모두 광복군 출신이었다. 초기 사단장들 중 상당수, 육군사관학교 교장들 역시 광복군 출신이 맡았다. 단순히 이름만 들어간 장식이 아니라, 실제로 국가 무력기관의 지휘권을 잡은 것이다. 이범석은 특히 중요하게 그려진다. 그는 광복군 지휘 경험을 바탕으로 “국군은 특정 정파의 사병이 아니라, 독립운동이 만든 국가의 군대여야 한다”라고 밀어붙이며 군의 정신적 토대를 설계하려 했던 인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광복군은 상징이 아니라 국군의 실질적 골격에 참여했다는 게 책의 주장이다.

이 책의 또 다른 강점은 인물의 서사다. 지청천(광복군 총사령), 홍범도(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상징), 이동녕(임시정부를 끝까지 지켜낸 버팀목), 유동열(임시정부 군 책임자에서 미군정·통위부장으로 이어지는 가교), 이범석(국방부 초대 수장), 최용덕(초기 공군 전력의 씨앗), 그리고 여성 광복군들까지. 특히 여성 광복군 대원들은 모병, 선전, 첩보, 심리전 방송 등 현대전의 핵심 기능을 맡은 주체로 다뤄진다. 저자는 “국군의 뿌리가 광복군이다”라는 말이 남성 영웅 몇 명의 이야기로만 소비되는 것을 거부한다.

국군의 정통성은 더 넓은 기반 위에 세워졌다는 걸 보여준다.

이 책은 마지막으로 묻는다.

국군은 스스로 어디에 닻을 내릴 것인가?

경비대의 후예라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광복군의 후예라고 말할 것인가?

이 질문은 역사 해석 싸움이 아니라 지금과 미래의 문제다.

국군이 “우리는 광복군의 법통을 잇는다”고 선언하는 순간, 군은 단순한 행정조직이 아니라 독립전쟁의 완성선상에 선 민족의 군대가 된다. 그 자의식은 장병의 사기, 국민의 신뢰, 그리고 군이 민주공화국의 통제 아래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라는 기준까지 바꾼다.

『국군의 뿌리,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 국군의 시작점은 미군정의 경비대가 아니라 의병·독립군·광복군이다”라는 사실을 다시 세우며, 국군이 스스로를 그런 역사 위에 소개해야 한다고 말하는 책이다.


'세종마루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또 하나의 역사관은, 어제가 있었기에 오늘이 있다는 믿음이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이후 우리 민족은 쉬지 않고 독립을 위한 투쟁을 이어갔고, 그 끈질긴 노력은 결국 광복으로 이어졌다. 같은 맥락에서 대한민국 국군 역시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분명한 뿌리가 있으며, 역사적 계승의 흐름이 있기에 그 뿌리를 밝히고자 이 책을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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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간 심리학 - 미술관에서 찾은 심리학의 색다른 발견
문주 지음 / 믹스커피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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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 저자의 『미술관에 간 심리학』은 미술 작품을 통해 인간의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작업,

즉 ‘내 안의 무의식을 만나는 여행’을 아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저자는 자신을 ‘미술치료사’라고 소개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한국 의료법상 ‘치료’라는 용어는 심리·정서 영역에서 자유롭게 쓰기 어렵기 때문에 공식 직함은 ‘미술심리상담사’다. 하지만 그녀가 실제로 하는 일은 단순 상담 그 이상이다. 개인 미술치료 연구소를 운영하며 만난 수많은 내담자와 수강생의 그림 속에서, 말로 다 표현되지 않은 무의식적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들을 목격해 왔다. 사람의 내면에는 이미지로 떠오르는 세계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이미지는 언어보다 더 직접적으로 감정을 말한다는 사실을 그는 반복해서 확인해왔다.

이게 미술치료의 핵심이다. 보통 상담은 언어로 진행된다. 하지만 미술치료에서는 ‘그림’이라는 제3의 매개가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에 놓인다. 이 그림은 방어를 약하게 만들고, 우회적으로 마음을 드러내게 하고, 때로는 스스로도 몰랐던 감정을 깨닫게 만든다. 저자는 이것을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공명성”이라고 부른다. 어떤 감정은 말로 옮기는 순간 이미 달라지지만, 이미지로 나올 때는 굉장히 솔직하고도 생생하다. 그래서 미술치료는 단순한 ‘그림 놀이’가 아니라 무의식에 닿는 하나의 통로다.

책은 이 지점을 심리학 이론과 연결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칼 구스타프 융의 분석심리학은 미술치료의 기반을 이룬다. 융은 예술을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무의식이 상징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했다. 예술가가 작품을 만드는 순간은 ‘내가 뭘 그릴지 의식적으로 통제하는 시간’이 아니라, 나보다 더 깊은 힘—개인적 무의식과 집단적 무의식—이 표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그림은 그리는 사람의 인생 전체가 묻어난다.

이 관점은 책의 첫 장 “천재인가, 광인인가?”로 이어진다. 우리는 예술가와 광기(정신질환)를 거의 자동으로 연결해 떠올린다. 반 고흐, 뭉크, 툴루즈-로트렉, 쿠사마 야요이 같은 이름은 너무 유명해서, “예술=고통”이라는 공식처럼 받아들여지기까지 한다. 저자는 그 통념을 흥미롭게 파고든다. 단순히 ‘그들은 아팠다’ 수준이 아니라, “왜 그들의 고통이 그렇게까지 강렬한 작품으로 전환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예를 들어 툴루즈-로트렉은 귀족 집안 출신이었지만 유전적 문제로 150cm 남짓의 왜소한 체격을 가지고 태어났고, 평생 우울과 불안, 편집 증세, 심각한 알코올 의존에 시달렸다. 술에 취해 눈앞에 없는 적에게 총을 겨눴다는 일화는 그의 정신이 얼마나 벼랑 끝에 서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그는 정신병원에까지 입원하게 된다. 그런데 중요한 건 바로 여기에 있다. 로트렉의 삶은 끝없이 무너지고 있었지만, 그의 예술은 그 무너짐을 정확히 기록했다는 것. 그의 캉캉 댄서, 친구이자 뮤즈였던 제인 아브릴의 초상에는 화려한 물랄리가 아니라, 신경질적 긴장감, 사회의 냉혹함, 여성 신체가 상품화되는 장소의 잔혹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단순히 ‘밤의 파리’를 그린 게 아니라, 그 세계에서 사람들의 영혼이 어떻게 닳아 없어지는지를 기록했다. 그의 수백 장의 드로잉과 수천 점에 가까운 작업을 보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정조는 화려함이 아니라 소외, 우울, 권태다. 우리는 그의 그림을 통해 그림 바깥의 인간적 고통을 감지한다.

이것은 에드가 드가에게도 이어진다. 드가는 흔히 발레리나의 화가로 불리지만, 그가 바라본 무대 뒤 현실은 우리가 상상하는 화려한 분홍 발레 의상과 눈부신 스포트라이트의 세계만이 아니었다. 19세기 말 파리 오페라의 무대 뒤, 어린 무용수들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혹독한 훈련과 통제에 놓여 있었고, 부유한 남성들은 그들을 사실상 지배했다. 발레 무대는 예술의 공간인 동시에 권력과 성적 거래의 공간이기도 했다. 드가는 그 불편한 진실을 집요하게 그렸다. 대기실, 리허설, 무대 뒤의 피로한 다리. 준비는 되어 있지만 아직 무대에 오르지 않은 몸들. 그는 무용수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그 아름다움이 어떤 대가 위에 올라서 있는가’를 포착하려 했다. 동시에 드가 자신의 삶도 어둠으로 향하고 있었다. 시력이 망가져 가는 공포, 사회적 편협함, 후기로 갈수록 심해진 고립과 우울. 드가의 발레 장면은 그래서 단순한 미인 찬양이 아니라, 자신과 타인의 취약함을 들여다보는 어두운 자화상처럼 읽힌다.

이 책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신질환과 예술은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가?”를 역사적으로 살핀다. 오래전에는 정신질환이 악령, 마법, 저주로 여겨졌고, 사람들은 두개골에 구멍을 내거나(고대 trephination), 피를 뽑거나, 고문에 가까운 방법으로 치료를 시도했다.

중세 유럽의 일부 병원은 사실상 전시장이었고, 부유층이 정신질환자들을 구경하고 조롱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만큼 인간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태도 자체가 부재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18~19세기에 들어서며 관점이 바뀌기 시작한다. 광기를 단죄할 것이 아니라 치료할 대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몇몇 정신과 의사들은 환자들의 그림을 단순한 증상의 부산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분석 가능한 기록이라고 생각했다. 예컨대 폴 막스-시몽은 환자들의 그림과 글을 체계적으로 모아 분류했고, 조울증(양극성 장애)을 앓는 환자의 상태가 그림의 형식과 에너지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관찰했다. 발터 모르겐타우어는 아돌프 뵐플리라는 환자의 작품을 진지한 예술로 다루며, 그를 환자가 아니라 ‘예술가’라고 불렀다. 이 선언은 이후 ‘아웃사이더 아트’, 즉 제도권 교육 밖에서 나온 예술을 미술사 안에 올려놓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다. 한스 프린츠혼 또한 수천 점의 환자 작업을 수집하고, 그들의 시각 언어를 미술사와 심리학 두 영역 모두에서 의미 있는 자료로 바라보자고 주장했다. 이 흐름은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의 그림 = 병적 낙서”라는 낙인을 깨고, 오히려 인간의 내면 세계를 가장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 시각 기록이라는 인식을 만들었다.

즉, 예술이 질환의 증거라는 식의 낙인 대신, 예술을 통해 고통이 ‘언어화’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표현은 곧 생존이다. 이 생각은 프리다 칼로에서 절정에 달한다.

프리다 칼로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다. 소아마비로 약해진 다리, 열여덟에 당한 버스-전차 충돌 사고로 인한 골반·척추·갈비뼈·다리의 복합 골절, 장기 손상, 반복 수술, 만성 통증, 임신 불가능이라는 상실. 그녀는 거의 전신이 부서진 채 침대에 묶여 살아야 했다. 그 속에서 칼로는 붓을 들었다. 그녀에게 그림은 재능 뽐내기가 아니라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선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자신을 끝없이 그렸다. 칼로의 작품 중 자화상이 유난히 많은 이유는, 그만큼 자기 몸과 자기 마음이 전쟁터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자화상들은 단순한 ‘셀카’가 아니다. 가시 목걸이에 목이 조여 피가 흐르고, 검은 원숭이가 어깨에 얹혀 있고, 부활과 재탄생을 상징하는 새나 나비가 주변에 떠다니며, 무너진 몸이 그대로 노출된다. 이건 타자가 그린 ‘아름다운 여성 화가 프리다’가 아니라, 프리다가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냉정한 거울이다. 결혼 생활에서 겪었던 배신감, 특히 남편 디에고 리베라의 반복된 바람과 심지어 자기 여동생과의 관계까지 목격했을 때의 무너짐은 ‘짧은 머리의 자화상’ 같은 작품에서 폭발한다. 머리카락을 잘라 바닥에 흩뿌린 모습은 단순한 스타일 변화가 아니다. 여성성으로 규정되어 왔던 정체성(긴 머리, 전통적 여성 이미지)을 스스로 잘라내고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내가 아니다”라고 선언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자르는 것은 머리카락이 아니라, 과거의 관계, 순종적인 여자의 역할, 사랑에 속박된 자기 자신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사슴으로 그리기도 한다. 온몸에 화살이 박혀 피 흘리는 사슴. 어디에도 기대지 못한 채 숲에서 방치된 사슴의 얼굴은 바로 칼로 자신의 얼굴이다. 통증은 육체적인 동시에 정서적이다. 이 이미지가 15세기 르네상스의 성 세바스티안 도상과 겹쳐 보인다는 언급은 매우 상징적이다. 세바스티안은 화살 투성이의 순교자고, 칼로는 일상 자체가 순교인 사람이다. 그녀에게 그림은 고통의 증명이자 저항이다. “나는 이렇게 다쳤고, 그렇지만 아직 여기 있다.”

여기까지가 “예술은 마음의 기록”이라는 책의 절반이라면, 후반부는 “우리는 왜 이런 그림들 앞에서 강하게 반응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넘어간다. 저자는 프로이트와 융의 이론을 바탕으로 인간의 무의식 구조를 설명한다.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관리할 수 없는 충동·욕망·분노·불안의 저장고다. 겉으로는 멀쩡한 척할 수 있어도, 이 무의식은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밖으로 나온다. 몸의 증상일 수도 있고, 꿈일 수도 있고, 예술일 수도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 정신을 원초아(충동), 자아(현실 조정자), 초자아(도덕적 감시자)로 설명하면서, 인간은 이 세 힘의 줄다리기 속에서 살아간다고 봤다.

융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무의식을 개인적인 차원(개인 무의식)과 인류 전체가 공유하는 깊은 층(집단 무의식)으로 나눴다. 그리고 이 집단 무의식 안에는 ‘원형(archetype)’이라고 불리는 보편적 상징 패턴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본다. 남성 안에 있는 여성성(아니마), 여성 안에 있는 남성성(아니무스), 어머니상, 현자상 같은 것들이다. 융의 핵심은 “우리는 겉으로만 남성/여성인 게 아니다. 내 안에는 반대 성질을 가진 또 다른 자아가 살고 있다”는 통찰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처음 봤는데도 강하게 끌리거나 강하게 거부감을 느낀다. 실제의 그 사람에게 반응하는 게 아니라, 내 무의식 속 아니마/아니무스를 그 사람에게 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첫눈에 반했다’는 표현 속에는 이런 투사가 겹쳐 있다. 문제는 이 투사가 벗겨지는 순간이다. 흔히 말하는 “콩깍지가 벗겨졌다”라는 순간은 사실 ‘무의식적 투사를 회수하고, 그 사람을 실제의 사람으로 보기 시작한 것’에 가깝다. 이 과정이 잘 지나가면 관계는 성숙해지고, 나 자신도 성장한다. 못 지나가면 파국으로 간다.

책은 여기에 예술가들의 실제 작업을 다시 끌어와서 설명한다. 클림트가 여성의 성을 그리는 방식, 달과 태양 같은 상징이 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지, 그리스 신화 속 달의 여신 셀레네와 잠든 엔디미온의 장면이 왜 수백 년 동안 수많은 화가에게 그려졌는지 등은 모두 “인간은 결국 상징으로 자기 마음을 이야기한다”는 주장과 연결된다. 상징을 이해한다는 건 단순히 ‘해석 잘하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이게 왜 나를 이렇게 흔들지?”를 알아차리는 일이다.

흥미롭게도 이 책의 마지막에 현재 시대로 급격하게 넘어간다. 오늘날 인공지능 화가, 특히 휴머노이드 로봇 ‘아이다(Ai-Da)’ 같은 사례가 등장한다. AI가 그린 그림이 경매에서 엄청난 금액으로 팔리고, 로봇이 창작자로 불리는 시대다. 그럼 인간 예술가는 사라질까? 저자의 대답은 단호하게 “아니다”에 가깝다. 인간의 예술은 완벽함이 아니라 불완전함을 남겨둔다. 떨리는 선, 지워진 흔적, 망설임, 주저, 상처, 부끄러움, 집착, 의지. 그런 결함 자체가 우리의 마음을 건드린다. 하지만 AI는 너무 완벽하다.

다시 말해, “고통받는 주체로서의 나”가 없다. 결국 우리는 그림을 볼 때 결과물만 보는 게 아니라, 그 결과물을 만든 존재와 그 존재의 시간을 함께 본다.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은 그림 하나가 아니라 그녀라는 사람 전체와 마주하게 만든다. 그 체온을 AI가 대신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정리하면, 『미술관에 간 심리학』은 세 가지를 동시에 보여준다.

첫째, 예술은 고통과 무의식의 언어다.

둘째, 우리가 작품 앞에서 강하게 흔들리는 이유는 그 이미지가 나의 심리와 만나기 때문이고, 그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셋째, 그렇기 때문에 예술은 앞으로도 인간의 몫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예술은 단순히 잘 그린 그림이 아니라, 내가 살아 있었다라는 증언이기 때문이다.

+

책 내용 중에 언급 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란 말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인다.

예전에는 사람들 대부분이 “우주의 중심은 지구야. 다 우리 주변을 돈다”고 믿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가 “아냐, 지구가 중심이 아니고 태양을 돌고 있어”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의 세계관이 완전히 뒤집혔다. 즉, 내가 중심이라고 믿던 세계가 사실은 아니었다는 충격.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이 바로 그런 역할을 했다. 사람들은 “나는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선택해. 나는 나를 알아”라고 믿었는데, 프로이트는 “사실 너를 움직이는 진짜 힘은 네가 ‘모르는 곳(무의식)’에 있다”고 말한 거다. 즉, 인간은 자기 마음의 주인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마음 깊은 곳의 어둠과 상처, 욕망이 진짜 조종석에 앉아 있었다는 선언.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프로이트의 등장을 “인간 정신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우리가 생각하던 인간의 중심이 통째로 바뀐 사건”이다.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채손독) @chae_seongmo'를 통해

'믹스커피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미술사에서 우울증을 앓은 화가들은 매우 많다. 그들이 우울했기 때문에 그림을 그렸다기보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에너지로 우울감을 토해냈다고 보는 편이 더 맞을 것 같다.
천상의 아름다움과 발레리나의 역동적인 묘사로 오랫동안 우리를 매료시킨 인상주의 화가 에드가 드가도 그 중 하나다. 그의 작품 뒤에 숨어 있는 고통, 슬픔, 집착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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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경영: 소년병과 아인슈타인
여현덕 지음 / 드러커마인드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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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현덕의 『AI 경영: 소년병과 아인슈타인』은 “AI가 세상을 바꾼다” 같은 추상적인 감탄사가 아니라, 우리가 AI를 어떤 태도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묻는 책이다. 단순한 기술 해설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책이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특히 저자가 반복해서 끌어오는 비유 ― 지뢰밭에 투입된 소년병, 전혀 다른 시야를 여는 아인슈타인, 그리고 감정 없이 끝없이 일하는 AI ― 는 AI를 단순한 자동화 도구로 보지 말고 인간과 조직의 문제까지 함께 생각하라고 요구한다.


책의 출발점은 “지능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튜링은 “기계가 사람처럼 대답해 사람과 구별되지 않으면 그건 지능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저자는 거기에 의문을 단다. 그게 정말 인간적인 의미의 지능인가, 아니면 훈련된 흉내인가? 이 질문은 지금의 생성형 AI에 그대로 적용된다. 답변은 점점 사람 같아지지만, 그게 정말 ‘이해’인지 아니면 ‘모사’인지 우리는 여전히 구분하지 못한다.


마빈 민스키의 관점도 인용된다. 민스키는 지능을 하나의 거대한 의식으로 보지 않고, 많은 작은 기능(에이전트)의 조직적 결합으로 봤다. 오늘날 AI 역시 이 조합과 누적의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즉 AI는 이미 복잡하고 강력한 수준까지 왔고, 더 이상 장난감이 아니다.


여기서 책은 중요한 전환점을 제시한다. 생성형 AI 시대에 중요한 건 ‘협업지능(CQ, Collaborative Intelligence)’, 즉 인간과 AI가 함께 만드는 지능이다. 인간은 맥락, 감정, 책임, 윤리를 제공하고 AI는 지치지 않는 분석과 반복 실행을 제공한다. 결국 앞으로의 단위는 ‘나 혼자’가 아니라 ‘나+AI’ 팀이다. 이는 단순한 생산성 얘기가 아니다. “AI가 다 하게 두고 인간은 빠지면 된다”가 아니라, “AI가 낸 결과를 사람이 이해하고, 방향을 정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저자는 이걸 사람과 AI의 ‘공진화’라고 부른다. 인간을 없애는 AI가 아니라 인간을 확장시키는 AI. 그는 이것이 ‘신이 된 인간(호모 데우스)’을 만드는 방향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더 윤리적인 목표라고 말한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갈림길을 제시한다. 하나는 사이보그의 길, 즉 AI를 효율 극대화 수단으로만 쓰면서 더 빠르게, 더 싸게, 더 많이 돌리는 길. 다른 하나는 케이론의 길, 즉 AI가 인간의 가치와 목적을 공유하도록 만드는 길이다. “AI로 얼마나 더 벌 수 있나?”에서 멈추지 않고 “AI로 어떤 사회를 만들 건가?”까지 묻는 길이다. 저자는 이 선택이 앞으로 기업 문화, 교육 방식, 노동의 존엄을 결정할 거라고 본다.


흥미로운 건 이 거대한 얘기가 결국 현실적인 질문으로 내려온다는 점이다. 즉 “AI로 도대체 뭘 도울 건데?”라는 문제정의다. 책은 앤드루 와이어스의 ‘크리스티나’를 예로 든다. 언덕 위 집을 바라보지만 그 언덕을 오를 수 없는 한 여성. AI는 그녀의 다리를 마법처럼 고쳐줄 수는 없다. 하지만 자율주행 휠체어, 보조 외골격 슈트 같은 현실적인 해결책을 설계할 수는 있다. 결국 핵심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있다. 이걸 저자는 ‘AI Thinking’이라고 부른다. AI를 쓰는 능력보다, AI를 어디에 써야 하는지를 묻는 능력이 인간 쪽 역할이라는 거다.


저자는 또 한 가지 경고를 한다. 우리가 AI가 준 답을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인간은 점점 생각하지 않게 된다는 것. 알고리즘이 복잡하다는 이유로 “맞겠지” 하고 넘기는 순간, 우리는 검증도, 책임도, 창의성도 내려놓는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점점 ‘대체 가능한 존재’가 된다. 그래서 협업지능은 그냥 “사람+AI=시너지!”라는 낙관적인 구호가 아니라,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스스로 쓸모를 잃는다”는 현실적인 경고다.


또 하나 흥미로웠던 지점은 감정의 문제다. 우리는 보통 AI를 ‘차갑고 완벽하게 이성적인 존재’라고 상상한다. 그런데 책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끌어온다. 인간은 감정이 없으면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것. 뇌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가 보여준 것처럼, 감정이 망가지면 오히려 이성적인 판단 능력까지 무너진다. 즉 감정은 방해물이 아니라 방향 감각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지금의 LLM은 반쪽짜리다. 수많은 데이터를 먹고, 그럴듯한 답을 내지만, 맥락적 배려나 윤리적 책임은 없다. 그래서 거짓을 자신 있게 말하는 할루시네이션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책은 다음 단계를 “감성 인공지능”, 즉 인간의 정서 상태를 읽고 반응하는 AI에서 찾는다. 단순히 말을 잘하는 AI를 넘어서, 운전자의 피로를 감지해 사고를 막고, 자폐 스펙트럼 아동의 의사소통을 돕고, 돌봄과 안전 영역까지 개입하는 기술 말이다. 저자는 이것을 “2AI”라 부르며, 결국 AI가 인간의 마음과 연결되지 않으면 끝내 신뢰받지 못할 것이라고 본다.


책의 마지막은 산업의 현재로 내려온다. 빅테크와 스타트업들은 엄청난 자본과 인프라를 계속 투입하고 있고, AI는 식는 쪽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깊이 들어오는 중이다. 저자는 지금을 “AI의 겨울”이 아니라 “AI의 가을”이라고 부른다. 이미 싹은 텄고, 이제 수확과 재편의 단계라는 뜻이다. 이건 더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우리 일에 직접 영향을 주는 현재형 이슈다.


결국 이 책이 말하는 핵심은 단순하다. AI를 두려워할 이유도, 맹신할 이유도 없다. 중요한 건 AI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AI를 어떤 기준과 책임으로 사용할 것인가다. 저자는 말한다. AI는 불과 같다. 불은 방을 따뜻하게도 만들고 집을 태워버리기도 한다. 문제는 불이 아니라, 불을 쥔 사람이다. 이 책은 그 불을 쥐고 있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묻는다.




생성AI 시대가 열리면서 인공지능과 인간지능이 멋지게 만나는 협업지능(CQ:Collaborative Intelligence/Quotient)이 탄생한다면 인류 역사에 어떤 변화를 몰고 올까? 두 지능이 자유자재로 통합되어 ‘인간의 창조지능,감성지능‘과 ’AI의 무심한 지능’이 합쳐져 지능이 증강된다면 장차 무슨 지능이 탄생할까? 신을 닮은 호모데우스의 지능이 탄생할까? 초거대 증강지능이 탄생할까?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Harari)는 인간이 AI의 힘을 빌려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호모데우스(Homo Deus)가 탄생할지도 모른다고 예견했다. 호모데우스는 라틴어로 Homo(인간)와 데우스(Deus=God)를 결합한 조어로 ‘신이 된 인간’을 뜻한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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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0 - 박경리 대하소설, 3부 2권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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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0권은 거대한 역사의 한가운데서 사람들이 어떻게 버티며 자신을 지켜내는지를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보여준다. 이 권에서 중요한 건 거창한 영웅담이 아니다. 오히려 무너지는 시대 속에서도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표정과 마음이다. 그 마음들이 얽힐 때, 이 소설은 더 이상 “역사소설”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닿는 이야기로 바뀐다.


무엇보다 먼저 드러나는 건 세대의 교체다. 이전 세대가 겪었던 고통과 책임이 고스란히 다음 세대에게 넘어가는 순간이 아주 선명하게 그려진다. 서희와 길상의 아들인 환국은 서울 K학교에 들어가며 조선 지식인 계층으로 들어갈 기회를 얻는다. 겉으로만 보면 가능성의 세대로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학교 안에서도 그는 여전히 “조선인”으로 취급되고, “누구의 아들이냐”로 판단받는다. 같은 학생에게 “아버지가 종놈 아니냐”라는 모욕을 듣고 참지 못해 싸움이 벌어진다. 그 일 앞에서 서희는 분명하게 말한다. 환국의 아버지는 종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사람이라고. 이 장면은 단순히 아이들끼리의 다툼이 아니다. 식민지 조선에서 사람의 가치는 여전히 집안과 출신으로 평가되고, 독립운동을 한 삶조차 떳떳하게 존중받지 못한다는 현실을 드러낸다. 환국의 세대는 공부만 잘하면 올라갈 수 있는 세대가 아니다. 존재 자체를 의심받고, 스스로를 증명해야만 하는 곳에서 출발한다. 이전 세대가 “집안과 땅을 지켜라”라는 요구 속에 살았다면, 이 세대는 “너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증명해라”라는 요구를 받고 시작한다.


이 지점은 서희와 길상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두 사람은 서로 깊이 의지했고 가정을 꾸렸지만 결국 다른 길을 택한다. 서희는 무너진 최참판댁의 땅과 이름을 되찾으며 집안의 명예와 삶의 기반을 다시 세우려 한다. 길상은 편안한 삶을 거부하고 독립운동의 길을 간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았지만, “함께 있는 것”보다 “각자의 자리를 지키는 것”을 택한다. 이별은 냉정함이 아니라 선택이다. 우리는 서로를 믿지만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없다는, 어른들의 사랑이다. 사랑을 감정으로 붙잡아두는 대신 책임으로 바꾸어 버티는 방식이다. 이별이 곧 단절이 아니라 역할의 분리라는 감각이 여기서 생긴다. 이 감각은 곧 세대의 감각이기도 하다. 이전 세대가 한 가문을, 한 터전을 붙들고 버텼다면 다음 세대는 자기 존엄을 어떤 방식으로 지켜낼지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시대에 던져진다.


이 권에서 사랑 이야기는 계속해서 등장하지만, 그것은 달달하거나 안정된 결말을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은 삶의 방향을 드러내는 장치다. 명희는 대표적이다. 그녀는 ‘신여성’이라 불리며 교육을 받고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흔들린다. 이상현을 향한 마음을 고백하지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결국 안정적인 집안과 조건을 가진 쪽으로 현실적인 결혼을 택한다. 그러나 그 결혼은 곧 자기 자신이 점점 비어가는 과정이 된다. 그녀는 말한다. “다 버리고 나니까 편하다.” 이것은 진짜 평안이라기보다 모든 기대와 부끄러움까지 다 잘라낸 후의 무감각에 가깝다. 명희는 그 무감각을 들여다보며 묻는다. 사랑 없는 결혼을 선택한 나, 이게 내가 원하는 삶인가. 나는 지금 누구인가. 그녀는 체면을 위해 순응하는 여자가 아니라, 순응하고 있는 자신을 낱낱이 들여다보는 여자다. 그래서 명희는 단순히 누군가의 연인이나 누군가의 신부로 소비되지 않는다. 시대 앞에서 흔들리는 ‘한 사람’으로 선다.


홍이와 보연, 장이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홍이는 그저 조용하고 평범하게 살고 싶어 한다. 부산에서 운전 일을 하며 돈을 벌고, 보연과 결혼하고, 아이도 본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완전히 현재에만 머물지 못한다. 과거의 인연인 장이가 다시 찾아오면서 관계가 흔들리고, 그 일은 곧바로 개인적 문제를 넘어서 사회적 비난, 도덕적 낙인, 집안의 갈등으로 번진다. 보연은 상처를 입으면서도 홍이를 버리지 않고 붙든다. 사랑은 서로에게 피난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안 그 자체이기도 하다. 결혼식 날 비바람이 몰아치고 초례청에서 닭이 이유 없이 죽는 장면 같은 징조는, 이 사랑이 쉽게 안정될 수 없음을 미리 알려준다. 이 서사는 “사랑하면 된다”는 위로를 거부한다. 이들은 사랑을 가지고 있지만, 사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현실 속에 살고 있다.


『토지』 10권에서 특히 강하게 다가오는 건 여성 인물들의 존재감이다. 이 소설은 여성들을 주변 인물로 두지 않는다. 선혜는 명동에서 찻집을 운영하며 자기 공간을 스스로 만든다. 여옥은 전도사업을 하면서 신앙과 애국을 분리할 수 없다고 말하고, 그것을 실제 사명으로 삼는다. 그녀에게 복음은 단순히 “참아라”라고 말하는 위로가 아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굶주리는 현실을 바꿀 힘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미국 선교사에게까지 직접 말한다. 기화(봉순)는 기생 출신이라는 낙인을 안고도 사랑했던 상현의 아이를 혼자 낳아 키우며 자신의 책임을 혼자 떠안는다. 그리고 임이네 같은 인물은 불편할 만큼 집요하고 주변을 괴롭히기도 하지만, 소설은 그조차 쉽게 치워버리지 않는다. 그녀의 존재는 관계를 집어삼키는 집착이 결국 어떤 파열을 낳는지를 보여준다. 이 여성들은 누구의 그림자나 장식이 아니라, 자기 신념과 자기 한계를 가지고 스스로의 자리를 선택하는 사람들이다. 당시 시대를 생각하면 이건 매우 과감한 시선이다. 여성은 단순히 보호받는 대상이 아니라, 시대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주체로 나온다.


이 권은 또한 식민지 현실을 배경이 아니라 현재형의 위협으로 가져온다. 일본 헌병이 평사리에 들이닥쳐 마을 사람들을 몰아세우고 협박하고 끌고 가는 장면은 이전과 다르다. 이전까지 폭력은 “누가 잡혀갔다더라” 하고 전해 듣는 이야기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았다면, 이제는 독자가 그 폭력의 한가운데를 직접 목격하게 된다. 공포는 소문이 아니라 현장이다. 관동대지진 이후 퍼진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거짓 소문과 그에 따른 조선인 학살 장면은 더 노골적이다. 국가가 불안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는 과정을 통해, 혐오가 어떻게 제도화되는지 보여준다. 이 소설은 일본의 폭력만 말하지 않는다. 1920년대 조선 내부에서 벌어지는 물산장려운동, 형평사 운동 같은 흐름도 비춘다. ‘국산품을 쓰자’, ‘사람을 사람답게 대우하자’는 구호는 자부심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서민에게 새로운 부담을 안기거나 조선 사회 안의 오래된 차별 구조를 건드리며 갈등을 만든다. 적은 바깥에만 있는 게 아니라 내부에도 있다는 것을, 소설은 외면하지 않는다.


이런 시대에 사람들은 어떻게 무너지지 않고 버팅기는가. 『토지』 10권은 그 답을 거창하게 쓰지 않는다. 버틴다는 건 전투에 나서는 거대한 영웅의 행동만을 뜻하지 않는다. 버틴다는 건 깨지지 않는 척 억지로 웃는 것도 아니다. 버틴다는 건 가족이라는 복잡하고 상처투성이의 관계를 쉽게 끊어버리지 않으면서도 자기 마음을 조금이라도 지켜내려는 일이다. 홍이는 아버지 용이를 보며 존경과 미안함을 함께 느낀다. 동시에 어머니 임이네에겐 애증, 부담, 죄책감이 한꺼번에 겹친다. 사랑하기 어렵지만 완전히 끊어낼 수도 없는 관계. 그 모순이 그를 붙잡아 준다. 또 다른 방식의 버팀은 스스로 마지막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이상현에게 그 자리는 글이다. 그는 술을 끊고, 의지하던 관계를 일부러 멀리하고, 소설 쓰기에 매달린다. 글쓰기는 그에게 취미가 아니라 “적어도 이 말만은 내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길상과 홍이가 참새 어미를 보며 나누는 짧은 순간처럼,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고 조용히 마음을 건네는 장면 또한 버팀의 방식으로 나온다. 거칠게 말하자면, 사람들은 “나는 완전히 혼자는 아니구나”라는 감각 하나를 붙잡기 위해 산다. 그 작은 온기가 그들을 완전히 무너지지 않게 한다.


결국 『토지』 10권은 거대한 역사가 어떻게 개인의 삶 속으로 직접 내려앉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잃지 않으려 했는지를 따라간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거대한 사건 이름보다 얼굴들이 먼저 떠오른다. 서울에서 맞서야 했던 환국의 눈빛, 체념과 자존심 사이에 매달린 명희의 침묵, 비바람 속에서 위태롭게 시작된 홍이의 혼인, 끝까지 남편 곁을 지키려는 보연의 단단함, 참새를 보며 마음 깊은 곳이 흔들리는 길상의 순간, 그리고 평사리로 들이닥친 헌병의 발소리. 이 소설이 던지는 질문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무너지는 시대 속에서 이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기 자리를 지키려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지키며 버티고 있는가.


#채손독 을 통해 #도서협찬 받았습니다.

@chae_seongmo

@dasanbooks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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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씹어먹는 기술 - 공부보다 재밌는 독서법, 여기 다 있음
김수영 지음 / 포춘쿠키출판국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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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살고 있다. 짧은 영상, 빠르게 소비되는 요약, 타인의 생각을 짧게 편집한 클립들. 그래서일까, 요즘 많은 사람들이 “이 정도면 굳이 책까지 읽어야 하나?”라는 질문을 던진다. 김수영 책임 프로듀서의 『책을 씹어먹는 기술』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단순히 “책을 많이 읽자”가 아니라 “왜 지금도 책을 읽어야 하는가, 그리고 읽었다면 어떻게 나의 것으로 만들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내놓는다. 저자는 독서를 ‘행위’로 끝내지 않고 ‘기술’로 끌어올린다. 읽기 전 준비, 읽는 중의 집중과 사유, 읽은 후의 확장까지 전 과정을 설계 가능한 루틴으로 보여주면서 독서를 삶의 인프라로 만드는 방법을 안내한다.

책은 먼저 독서의 가치를 아주 기본에서부터 다시 짚는다. 저자는 말한다. 인터넷 검색이나 짧은 영상이 ‘점’이라면, 책은 ‘선’이자 ‘면’이라고. 어떤 주제든 한 문장짜리 사실 조각만 모으면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전체 구조가 보이지 않는다. 반면 한 권의 책은 저자가 오랜 시간 생각하고 다듬은 논리, 맥락, 역사, 배경, 반론까지 품고 있어서 지식의 뼈대와 살을 한꺼번에 제공한다. 예를 들어 기후 변화에 관해 검색하면 “지구가 뜨거워진다”라는 단편 정보는 금방 얻을 수 있지만, 그 현상이 왜 일어났는지, 어떤 사회적・경제적 영향을 낳는지, 앞으로 어떤 선택이 필요한지는 전문가가 구성한 책을 통해서만 ‘연결된 그림’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독서는 이처럼 흩어진 퍼즐 조각을 맞춰 주는 과정이다. 한 챕터, 한 문단을 따라가다가 갑자기 ‘아하’ 하고 연결되는 순간이 온다. 그냥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깊이 이해하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은 바로 그 순간들 덕분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해력 또한 한 겹이 아니다. 표면에 적힌 내용만 받아들이는 수준에서 멈추지 않고, 말하지 않은 함의를 읽어내고, 타당성을 점검하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생각을 만들게 된다. 저자는 이를 표면적 이해, 함축적 이해, 비판적 이해, 창조적 이해의 네 층으로 설명한다. 이 네 층이 단지 시험 성적이나 지식 자랑에만 쓰이는 건 아니다. 실제로 복잡한 상황에서 감정과 사실을 구분하거나, 상대의 의도를 읽고, 판단해야 하는 순간마다 우리가 꺼내 쓰는 건 이 여러 층의 이해력이다. 즉 독서는 단순히 “아는 사람”이 아니라 “판단할 줄 아는 사람”으로 우리를 설계해 준다.

이 지점에서 책은 사고력과 비판적 사고 능력을 강조한다. 책 읽기는 눈으로 따라가는 수동적 활동이 아니라 저자와의 일대일 토론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말은 사실일까?”, “왜 이런 결론으로 갔지?”, “나는 동의하지 않는데?” 같은 내적 질문을 던지며 읽는 순간, 우리는 이미 생각하는 훈련을 하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과정이 뇌 과학적으로도 확인된다는 점이다. 전전두엽을 비롯해 논리적・종합적 사고를 담당하는 여러 영역이 책을 읽을 때 동시에 활성화되며 뇌의 연결망이 강화된다는 설명은, 독서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지능의 기초 체력 훈련’이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텍스트를 읽으며 구조를 분석하고(분석적 사고), 정보들을 엮어 전체 맥락을 잡고(종합적 사고), 그 주장에 설득력이 있는지 따져보는 과정(평가적 사고)은 결국 비판적 사고의 근육을 만드는 루틴이다. 이 능력은 지금처럼 가짜 뉴스와 과장된 주장, 자기 확신만 큰 목소리가 넘쳐나는 시대에야말로 필수적인 생존 장비다. 무엇을 믿을지 고르는 힘, 무엇을 거를지 알아보는 힘, 무엇이 나에게 유리하게 왜곡된 정보인지 냄새 맡는 힘. 저자는 이 힘이 독서로 길러진다고 말한다.

독서는 사고만 날카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넓히는 일이라는 점도 강조된다. 특히 소설이나 전기, 서사 중심의 책을 읽을 때 우리는 한 사람의 내면에 깊숙이 들어가게 된다. 누군가의 상처, 선택, 망설임, 죄책감, 기쁨을 따라가다 보면 ‘저 사람 입장에서 세상을 보면 저건 이해가 되네’라는 감각이 생긴다. 심리학 연구에서는 이런 몰입 독서를 통해 뇌의 거울 뉴런이 활성화되고, 실제로 타인의 감정을 더 잘 읽고 공감하는 능력이 높아진다고 본다. 공감은 단순히 “너 힘들겠다” 하고 말하는 감정적 동조에서 끝나지 않는다. 왜 그런 상황이 생겼는지 이해하는 인지적 공감, 그 감정을 내 몸으로 받아들이는 정서적 공감, 그리고 실제로 돕는 행동적 공감으로까지 이어진다. 난민의 기록을 읽고 나면 ‘안타깝다’에서 멈추지 않고 그 사람이 떠밀린 조건 자체를 생각하게 되고, 어떤 시대의 정치적 탄압을 다룬 전기를 읽고 나면 그 선택이 ‘나 같으면 왜 못했을까?’라는 질문으로 바뀐다. 이렇게 공감 능력은 타인에 대한 관용, 다양성에 대한 존중, 쉽게 단정하지 않는 태도로 확장된다. 즉 독서는 나라는 좁은 세계를 기준으로 타인을 재단하던 태도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언어 능력과 표현력 역시 독서의 큰 축으로 다룬다. 저자는 어휘력은 단순히 말을 많이 알고 있는 게 아니라 ‘내 감정을 정확하게 붙잡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기쁘다 한 단어로 끝나는 날과, 들뜬 마음인지 뿌듯함인지 안도인지 설렘인지까지 구분해서 말할 수 있는 날은 다르다. 단어의 수는 곧 사고의 해상도다. 다양한 표현을 알고 쓸 수 있을수록, 나 자신을 더 세밀하게 이해할 수 있고 타인과도 더 정확하게 소통할 수 있다. 독서는 먼저 듣고 이해하는 ‘수용 어휘’를 폭발적으로 늘려주고,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내가 실제로 구사하는 ‘표현 어휘’로 옮겨 붙는다. 단어만이 아니다. 문장 구성, 수사법, 문체도 달라진다. 긴 호흡으로 논리를 쌓는 글을 많이 읽은 사람은 자기 생각을 전달할 때에도 기승전결이 생기고, 설득을 할 수 있는 구조가 생기며, 감정을 건드릴 수 있는 표현의 온도 조절이 가능해진다. 이건 발표 자리에서든, 친구와의 갈등 조율에서든, SNS 캡션 한 줄을 쓸 때든 전부 영향을 준다. 결국 말과 글은 그냥 나오는 게 아니라, 읽은 만큼 정교해진다는 점을 이 책은 아주 집요하게 상기시킨다.

간접 경험과 상상력에 대한 부분은 이 책이 특히 쉽게 설득하는 대목이다. 책은 안전한 ‘시뮬레이션 공간’이다. 우리는 책 속에서 우주비행사가 되었다가, 전쟁터의 간호병이 되었다가, 어느 절벽 끝에서 인생을 걸어야 하는 누군가의 순간을 통과한다. 실제로 가지 못할 장소, 실제로 겪기 두려운 장면, 실제로는 너무 위험한 선택을 정신적으로는 체험해본다. 뇌는 상상된 경험과 실제 경험을 완전히 구분하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에, 이런 간접 경험은 단순한 상상놀이를 넘어서 실제 대응력, 문제해결력, 선택지의 폭까지 키워준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다른 결말은 가능했을까?” 같은 가정 질문을 던지는 버릇은 결국 창의력의 근육이 된다. 저자는 상상력은 예술가에게만 필요한 재능이 아니라, 문제를 새 방향으로 풀고자 할 때 누구에게나 필요한 기본 역량이라고 설명한다. 독서는 이 상상력 발전소를 꾸준히 돌리는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비용 없는 방법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자는 독서가 주는 즐거움 그 자체를 놓치지 않는다. 우리는 독서를 때때로 너무 ‘유익’의 언어로만 이야기한다. 공부에 좋다, 사고력에 좋다, 진로에 좋다. 하지만 이 책은 독서가 주는 순수한 쾌감 자체를 한 축으로 세운다. 서사에 빨려 들어가며 시간 개념이 사라지는 몰입감, 궁금했던 질문이 풀릴 때 오는 “아하!”의 짜릿함, 누군가의 문장을 만났을 때 마음이 툭 치이는 감각, 그리고 그 감각이 천천히 나를 안정시키며 하루의 긴장을 풀어주는 경험들. 이건 빠르고 강한 자극을 주는 디지털 콘텐츠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충만함이다. 저자는 이를 “느린 즐거움”이라 부른다. 이 느린 즐거움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정신의 회복이라고까지 설명된다. 실제로 독서는 스트레스를 유의미하게 낮추고, 수면의 질을 돕고, 감정을 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연구 결과들이 반복적으로 소개된다. 즉 독서는 ‘멍 때리기’가 아니라, 뇌는 움직이지만 마음은 쉬는 적극적 휴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흥미로운 지점은 독서를 그 자체로 끝내지 않고, 독서를 내 삶에 편입시키는 방법까지 아주 구체적으로 알려준다는 점이다. 그냥 “읽어라”가 아니라 “읽을 책을 어떻게 고를 것인가”, “언제 읽을 것인가”, “어디에서 읽을 것인가”,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하나하나 짚는다. 먼저 책 선택에 관해서 저자는 호기심을 출발점으로 삼으라고 조언한다. ‘요즘 내가 계속 생각하게 되는 주제가 뭐지?’, ‘요즘 왜 이 감정이 자꾸 반복되지?’ 같은 질문이 결국 독서의 방향을 잡아준다. 흥미롭게도 이는 단순 취향 문제가 아니라, 나의 현재 상태를 점검하는 일과도 맞닿아 있다. 지식이 필요해서 읽는 책, 위로가 필요해서 읽는 책, 다른 시각을 만나고 싶어서 읽는 책 등 독서의 목적을 명확히 하면, 수많은 제목들 앞에서 길을 잃지 않게 된다. 이건 결국 ‘나한테 맞는 책’을 고르는 감각을 키우는 훈련이다.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저자는 독서 편식을 경계한다. 우리가 익숙한 장르만 계속 읽다 보면 생각은 편안해지지만, 시야는 좁아진다. 비슷한 주장만 반복해서 만나는 동안 우리는 점점 확신만 커지고 균형감각은 떨어질 수 있다. 그래서 책은 새로운 분야로의 가벼운 확장을 꾸준히 권한다. 예를 들면 소설을 좋아한다면 과학자의 에세이로 건너가 보고, 인문학을 읽는 사람이라면 사회과학의 입문서를 더해보고, 논픽션을 주로 읽는 사람이라면 실화 기반 소설로 감정을 흔들어보라는 식이다. 이런 횡단 독서는 내가 모르던 흥미와 재능을 발견하게 해주고, 다른 분야의 언어로 내 분야를 다시 바라보게 만들며, 결과적으로는 창의적 사고의 원천이 된다.

실제로 책을 고를 때 도움이 되는 방법도 구체적으로 다룬다. 서평을 읽을 때는 “재밌어요” 같은 감상보다, 왜 좋았는지/어디서 막혔는지를 구체적으로 말해주는 서평을 참고하라고 제안한다. 나와 비슷한 배경을 가진 사람이 쓴 솔직한 서평은 의외로 큰 힌트가 된다. 추천 알고리즘, 지인의 추천, 서점이나 도서관이 선정한 ‘이 달의 책’ 같은 큐레이션도 잘만 쓰면 고르는 시간을 줄여준다. 또 한 가지 실용적인 팁은 목차 분석이다. 목차를 한 번 훑는 것만으로도 이 책이 어떤 흐름으로 전개되는지, 주장과 사례의 비중이 어떤지, 내가 지금 원하는 정보가 실제로 들어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목차는 말 그대로 책의 지도다. 지도를 보고 길을 떠나는 것과, 감으로 떠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책은 “나에게 맞는 난이도”를 고르는 문제도 중요하게 다룬다. 독서에는 ‘근접 발달 영역’이 있다고 설명한다. 너무 쉬우면 지루해서 금방 흥미를 잃고, 너무 어려우면 좌절해서 금방 포기한다. 가장 성장에 도움이 되는 건 “약간 어렵다”라고 느껴지는 책이다. 한 페이지를 읽었을 때 모르는 단어가 서너 개 정도 나오지만 맥락은 따라갈 수 있고, 80~90%는 이해되지만 나머지 10~20%는 생각을 요구하는 정도. 이것이 뇌를 자극하면서도 꺾지 않는 난이도다. 이 감각을 익히면 독서는 더 이상 의지력 싸움이 아니라 재미있는 훈련이 된다. 초급 단계에서는 가독성이 좋은 입문서를 통해 완독 경험을 쌓고, 중급에서는 다양한 장르와 비판적 읽기를 연습하며, 고급으로 갈수록 전문서나 고전을 통해 한 주제를 깊이 판다. 즉, 독서는 ‘읽었다/안 읽었다’가 아니라 ‘어디까지 올라갔나’를 보는 계단식 성장 과정이다.

책은 읽기 전 준비, 읽는 환경까지도 깊게 파고든다. 머리말(프롤로그)과 맺음말(에필로그)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라는 조언이 특히 흥미롭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 머리말에서 저자가 던지는 문제의식과 질문을 먼저 잡아두면, 읽는 동안 “그래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이건가?”라는 식으로 독서의 초점이 생긴다. 다 읽은 뒤엔 맺음말로 돌아가 결론과 메시지를 다시 수집하면서 전체 구조를 재정리할 수 있다. 심지어 다시 읽을 땐 맺음말부터 먼저 보고 시작해도 새로운 각도로 책이 열린다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한 팁 같지만, 사실은 ‘아무 생각 없이 읽고 잊어버리는 독서’와 ‘내 사고 체계 속으로 설치되는 독서’를 가르는 차이이기도 하다.

독서 공간에 대한 부분도 현실적이다. 독서 공간은 그냥 의자와 책상이 아니라, “여기 앉으면 읽는 모드로 전환되는 곳”이어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반복적으로 같은 자리에서 읽으면 그 장소 자체가 “이제 집중할 시간”이라는 신호가 된다. 이것은 심리학적으로 맥락 의존 학습이라고 불리는 부분인데, 결국 장소와 행동 사이에 연결고리를 만들어 집중 에너지를 아끼는 전략이다. 완벽한 고요만이 답도 아니다. 일정한 배경 소음(자연음처럼 안정적인 40~50dB 정도)은 오히려 집중을 돕고, 갑작스러운 말소리나 알림처럼 주의를 끊어먹는 요소만 제거해 주면 된다. 빛 역시 중요하다. 너무 어둡지도, 너무 눈부시지도 않은 중간 밝기에서 책 전체가 고르게 보이도록 조명 환경을 만드는 게 눈의 피로를 줄이고 오래 버티게 해준다. 특히 한 번 집중이 깨지면 다시 몰입 상태로 돌아오는 데 평균 20분 이상 걸린다는 연구 결과를 인용하면서, 방해 요소(소음, 화면 알림, 마음속 걱정)를 줄이는 건 사소한 게 아니라 독서 효율성 그 자체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저자는 읽기 전 짧은 호흡이나 메모를 통해 머릿속 잡념을 덜어내라고 조언한다. “읽어야 하는데…”라는 죄책감 상태로 억지 독서하지 말고, 읽을 수 있는 마음 상태로 스위치를 옮겨놓으라는 것이다.

시간 관리에 대한 조언도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대부분의 사람은 “언젠가 한가해지면 책 좀 읽어야지”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한가한 때’는 오지 않는다. 저자는 이것을 인간이 미래의 여유를 과대평가하고 당장의 급한 일에 끌리는 심리적 편향(계획 착오, 즉시만족 편향)이라고 설명한다. 해결책은 의외로 단순하다. 거창하게 주말 3시간을 비워놓는 게 아니라, 아침 15분, 점심시간 10분, 자기 전 20분 같은 작고 반복 가능한 시간을 먼저 확보하라는 것이다. 이 작은 시간을 하루의 블록으로 미리 예약해두면, 독서는 ‘남는 시간에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이미 갖고 있는 생활 리듬’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쌓인 리듬이 결국 습관이 된다. 연구에서 평균 66일 정도면 새로운 습관이 몸에 붙는다고 알려져 있듯, 독서는 의지로 벼락치기하는 활동이 아니라 일과에 포함시켜 길게 가는 활동이라는 관점이 중요하다. 자신이 아침형인지 밤형인지(크로노타입)를 고려해 가장 머리가 맑거나 가장 방해가 적은 시간을 고르는 것도 전략이다. 출퇴근 지하철, 점심 후 10분, 잠들기 직전처럼 이미 존재하는 ‘틈’을 독서 시간으로 지정하는 것만으로도 꾸준함은 확률이 확 올라간다.

이런 준비와 읽기 과정을 바탕으로, 책은 독서 이후의 단계까지 확장한다. 즉, 읽고 덮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반드시 ‘내 언어로 남겨라’고 강조한다. 독서 노트를 쓰는 방법, 기억에 남은 문장을 옮겨 적고 왜 좋았는지 적어두는 방법, 내 삶과 연결되는 아이디어를 정리하는 방법 등이 소개된다. 이 과정은 내가 읽은 책을 한 번 더 내 안에서 씹는 과정이며,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인 “씹어먹는”이 다시 의미를 얻는다. 단순히 필사나 요약을 넘어서, “이 문장이 나한테 왜 중요하지?”, “이 상황을 내 일에 적용하면 뭐가 달라지지?” 같은 질문을 붙이면, 그 책은 더 이상 남의 책이 아니라 내 책이 된다. 더 나아가 책은 독서 내용을 말로 꺼내 보는 것을 권한다. 주변 사람과 토론하거나, 짧은 서평을 쓰거나, SNS에 핵심 인사이트를 정리해 올리는 것 또한 사고를 외부로 내보내면서 다시 정리하는 과정이다. 실제로 다른 사람의 반응이나 질문은 내가 미처 보지 못한 사각지대를 드러내주고, 그 순간 생각은 한 번 더 확장된다.

한편 책은 독서가 항상 순조롭지 않다는 것도 인정한다. 누구에게나 독서 슬럼프는 온다. 바쁘고, 지치고, 한 권을 붙들 힘이 없을 때가 있다. 저자는 이런 순간을 실패로 규정하지 말고 시스템으로 돌보라고 제안한다. 난이도를 잠깐 낮추거나(편안하게 읽히는 책으로 전환), 전자책으로 가볍게 훑어보거나, 아예 기존에 읽던 책의 맺음말만 다시 보는 식으로 독서의 끈만 유지하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독서를 완전히 끊어버리지 않는 감각, 즉 ‘나는 읽는 사람’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독서는 열심히 할 때만 하는 기획 프로젝트가 아니라, 컨디션에 맞게 형태를 바꿔가며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생활 습관이라는 메시지다.

결국 『책을 씹어먹는 기술』은 책 읽는 법을 가르치는 책을 넘어서, “독서를 통해 생각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법”을 묻는 책이다. 지식을 구조화해 이해하는 힘, 비판적으로 골라내는 힘, 타인을 깊이 감각하는 힘, 정교하게 말할 수 있는 힘, 상상력으로 미래를 시험해보는 힘, 그리고 무엇보다 일상 속에서 나를 회복시키는 힘까지. 저자는 이 힘들을 어느 날 갑자기 얻는 게 아니라, 하루 단위의 읽기, 나에게 맞는 책 고르기, 공간과 시간 설계, 기록과 나눔 같은 반복 가능한 기술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이 제안하는 독서는 어느 누구의 전유물도 아니다. ‘지금의 나’에서 출발해 ‘조금 더 생각하는 나’로 가기 위한,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행동 설계다. “언젠가 책을 제대로 읽어봐야지” 하고 미뤄두던 사람이라면, 이 책은 그 막연한 다짐을 ‘오늘 당장 실천할 수 있는 한 번의 읽기’로 바꿔 준다. 그리고 그 작은 한 번의 읽기가 계속 이어지면, 결국 당신의 하루와 생각, 그리고 삶 전체를 바꾸는 힘이 된다고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말해준다.


'포춘쿠키출판국'을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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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통한 지식 습득은 단순한 정보 수집과 다릅니다. 인터넷 검색이나 짧은 영상이 ‘점‘ 형태의 정보를 제공한다면, 독서는 ‘선’이나 ‘면’ 형태의 체계적 지식 구조를 제공합니다. 책은 저자가 오랜 연구와 사색으로 구축한 완성된 지식 체계를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후 변화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인터넷 기사들보다 전문가의 책을 통해 역사적 배경, 과학적 원리, 사회적 영향, 미래 전망까지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체계적 지식은 우리 사고를 더 풍부하고 깊이 있게 만듭니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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