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10 - 박경리 대하소설, 3부 2권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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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0권은 거대한 역사의 한가운데서 사람들이 어떻게 버티며 자신을 지켜내는지를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보여준다. 이 권에서 중요한 건 거창한 영웅담이 아니다. 오히려 무너지는 시대 속에서도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표정과 마음이다. 그 마음들이 얽힐 때, 이 소설은 더 이상 “역사소설”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닿는 이야기로 바뀐다.


무엇보다 먼저 드러나는 건 세대의 교체다. 이전 세대가 겪었던 고통과 책임이 고스란히 다음 세대에게 넘어가는 순간이 아주 선명하게 그려진다. 서희와 길상의 아들인 환국은 서울 K학교에 들어가며 조선 지식인 계층으로 들어갈 기회를 얻는다. 겉으로만 보면 가능성의 세대로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학교 안에서도 그는 여전히 “조선인”으로 취급되고, “누구의 아들이냐”로 판단받는다. 같은 학생에게 “아버지가 종놈 아니냐”라는 모욕을 듣고 참지 못해 싸움이 벌어진다. 그 일 앞에서 서희는 분명하게 말한다. 환국의 아버지는 종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사람이라고. 이 장면은 단순히 아이들끼리의 다툼이 아니다. 식민지 조선에서 사람의 가치는 여전히 집안과 출신으로 평가되고, 독립운동을 한 삶조차 떳떳하게 존중받지 못한다는 현실을 드러낸다. 환국의 세대는 공부만 잘하면 올라갈 수 있는 세대가 아니다. 존재 자체를 의심받고, 스스로를 증명해야만 하는 곳에서 출발한다. 이전 세대가 “집안과 땅을 지켜라”라는 요구 속에 살았다면, 이 세대는 “너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증명해라”라는 요구를 받고 시작한다.


이 지점은 서희와 길상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두 사람은 서로 깊이 의지했고 가정을 꾸렸지만 결국 다른 길을 택한다. 서희는 무너진 최참판댁의 땅과 이름을 되찾으며 집안의 명예와 삶의 기반을 다시 세우려 한다. 길상은 편안한 삶을 거부하고 독립운동의 길을 간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았지만, “함께 있는 것”보다 “각자의 자리를 지키는 것”을 택한다. 이별은 냉정함이 아니라 선택이다. 우리는 서로를 믿지만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없다는, 어른들의 사랑이다. 사랑을 감정으로 붙잡아두는 대신 책임으로 바꾸어 버티는 방식이다. 이별이 곧 단절이 아니라 역할의 분리라는 감각이 여기서 생긴다. 이 감각은 곧 세대의 감각이기도 하다. 이전 세대가 한 가문을, 한 터전을 붙들고 버텼다면 다음 세대는 자기 존엄을 어떤 방식으로 지켜낼지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시대에 던져진다.


이 권에서 사랑 이야기는 계속해서 등장하지만, 그것은 달달하거나 안정된 결말을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은 삶의 방향을 드러내는 장치다. 명희는 대표적이다. 그녀는 ‘신여성’이라 불리며 교육을 받고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흔들린다. 이상현을 향한 마음을 고백하지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결국 안정적인 집안과 조건을 가진 쪽으로 현실적인 결혼을 택한다. 그러나 그 결혼은 곧 자기 자신이 점점 비어가는 과정이 된다. 그녀는 말한다. “다 버리고 나니까 편하다.” 이것은 진짜 평안이라기보다 모든 기대와 부끄러움까지 다 잘라낸 후의 무감각에 가깝다. 명희는 그 무감각을 들여다보며 묻는다. 사랑 없는 결혼을 선택한 나, 이게 내가 원하는 삶인가. 나는 지금 누구인가. 그녀는 체면을 위해 순응하는 여자가 아니라, 순응하고 있는 자신을 낱낱이 들여다보는 여자다. 그래서 명희는 단순히 누군가의 연인이나 누군가의 신부로 소비되지 않는다. 시대 앞에서 흔들리는 ‘한 사람’으로 선다.


홍이와 보연, 장이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홍이는 그저 조용하고 평범하게 살고 싶어 한다. 부산에서 운전 일을 하며 돈을 벌고, 보연과 결혼하고, 아이도 본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완전히 현재에만 머물지 못한다. 과거의 인연인 장이가 다시 찾아오면서 관계가 흔들리고, 그 일은 곧바로 개인적 문제를 넘어서 사회적 비난, 도덕적 낙인, 집안의 갈등으로 번진다. 보연은 상처를 입으면서도 홍이를 버리지 않고 붙든다. 사랑은 서로에게 피난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안 그 자체이기도 하다. 결혼식 날 비바람이 몰아치고 초례청에서 닭이 이유 없이 죽는 장면 같은 징조는, 이 사랑이 쉽게 안정될 수 없음을 미리 알려준다. 이 서사는 “사랑하면 된다”는 위로를 거부한다. 이들은 사랑을 가지고 있지만, 사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현실 속에 살고 있다.


『토지』 10권에서 특히 강하게 다가오는 건 여성 인물들의 존재감이다. 이 소설은 여성들을 주변 인물로 두지 않는다. 선혜는 명동에서 찻집을 운영하며 자기 공간을 스스로 만든다. 여옥은 전도사업을 하면서 신앙과 애국을 분리할 수 없다고 말하고, 그것을 실제 사명으로 삼는다. 그녀에게 복음은 단순히 “참아라”라고 말하는 위로가 아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굶주리는 현실을 바꿀 힘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미국 선교사에게까지 직접 말한다. 기화(봉순)는 기생 출신이라는 낙인을 안고도 사랑했던 상현의 아이를 혼자 낳아 키우며 자신의 책임을 혼자 떠안는다. 그리고 임이네 같은 인물은 불편할 만큼 집요하고 주변을 괴롭히기도 하지만, 소설은 그조차 쉽게 치워버리지 않는다. 그녀의 존재는 관계를 집어삼키는 집착이 결국 어떤 파열을 낳는지를 보여준다. 이 여성들은 누구의 그림자나 장식이 아니라, 자기 신념과 자기 한계를 가지고 스스로의 자리를 선택하는 사람들이다. 당시 시대를 생각하면 이건 매우 과감한 시선이다. 여성은 단순히 보호받는 대상이 아니라, 시대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주체로 나온다.


이 권은 또한 식민지 현실을 배경이 아니라 현재형의 위협으로 가져온다. 일본 헌병이 평사리에 들이닥쳐 마을 사람들을 몰아세우고 협박하고 끌고 가는 장면은 이전과 다르다. 이전까지 폭력은 “누가 잡혀갔다더라” 하고 전해 듣는 이야기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았다면, 이제는 독자가 그 폭력의 한가운데를 직접 목격하게 된다. 공포는 소문이 아니라 현장이다. 관동대지진 이후 퍼진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거짓 소문과 그에 따른 조선인 학살 장면은 더 노골적이다. 국가가 불안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는 과정을 통해, 혐오가 어떻게 제도화되는지 보여준다. 이 소설은 일본의 폭력만 말하지 않는다. 1920년대 조선 내부에서 벌어지는 물산장려운동, 형평사 운동 같은 흐름도 비춘다. ‘국산품을 쓰자’, ‘사람을 사람답게 대우하자’는 구호는 자부심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서민에게 새로운 부담을 안기거나 조선 사회 안의 오래된 차별 구조를 건드리며 갈등을 만든다. 적은 바깥에만 있는 게 아니라 내부에도 있다는 것을, 소설은 외면하지 않는다.


이런 시대에 사람들은 어떻게 무너지지 않고 버팅기는가. 『토지』 10권은 그 답을 거창하게 쓰지 않는다. 버틴다는 건 전투에 나서는 거대한 영웅의 행동만을 뜻하지 않는다. 버틴다는 건 깨지지 않는 척 억지로 웃는 것도 아니다. 버틴다는 건 가족이라는 복잡하고 상처투성이의 관계를 쉽게 끊어버리지 않으면서도 자기 마음을 조금이라도 지켜내려는 일이다. 홍이는 아버지 용이를 보며 존경과 미안함을 함께 느낀다. 동시에 어머니 임이네에겐 애증, 부담, 죄책감이 한꺼번에 겹친다. 사랑하기 어렵지만 완전히 끊어낼 수도 없는 관계. 그 모순이 그를 붙잡아 준다. 또 다른 방식의 버팀은 스스로 마지막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이상현에게 그 자리는 글이다. 그는 술을 끊고, 의지하던 관계를 일부러 멀리하고, 소설 쓰기에 매달린다. 글쓰기는 그에게 취미가 아니라 “적어도 이 말만은 내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길상과 홍이가 참새 어미를 보며 나누는 짧은 순간처럼,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고 조용히 마음을 건네는 장면 또한 버팀의 방식으로 나온다. 거칠게 말하자면, 사람들은 “나는 완전히 혼자는 아니구나”라는 감각 하나를 붙잡기 위해 산다. 그 작은 온기가 그들을 완전히 무너지지 않게 한다.


결국 『토지』 10권은 거대한 역사가 어떻게 개인의 삶 속으로 직접 내려앉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잃지 않으려 했는지를 따라간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거대한 사건 이름보다 얼굴들이 먼저 떠오른다. 서울에서 맞서야 했던 환국의 눈빛, 체념과 자존심 사이에 매달린 명희의 침묵, 비바람 속에서 위태롭게 시작된 홍이의 혼인, 끝까지 남편 곁을 지키려는 보연의 단단함, 참새를 보며 마음 깊은 곳이 흔들리는 길상의 순간, 그리고 평사리로 들이닥친 헌병의 발소리. 이 소설이 던지는 질문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무너지는 시대 속에서 이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기 자리를 지키려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지키며 버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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