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가까이 더 멀리 : 현미경과 망원경 이야기 - 2025 수학도서상, 2025 유레카 논픽션 실버상 별빛그림책방
메리 올드 지음, 아드리아 메서브 그림, 이계순 옮김 / 별빛책방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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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올드의 『더 가까이 더 멀리』는 과학사의 두 거장을 한 권에 담아낸 특별한 그림책이다.

망원경으로 우주의 경계를 확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

그리고 현미경으로 보이지 않던 생명의 세계를 처음 발견한 안토니 판 레이우엔훅.

한 사람은 ‘멀리’를 보았고, 한 사람은 ‘가까이’를 들여다보았지만,

두 사람 모두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책은 1609년 베네치아에서 시작된다.

갈릴레오는 렌즈를 갈고, 조합하고, 다시 계산하며 더 멀리 볼 수 있는 망원경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했다.

그의 노력은 단순한 기술 개선이 아니라, 인간의 시선을 우주 끝까지 밀어붙이는 집념이었다.

그는 달의 산과 골짜기, 금성의 위상 변화, 태양의 흑점, 목성의 네 개의 달을 발견한다.

모두가 당연하게 여겼던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신념을 뒤흔드는 관찰이었다.

1610년 그는 이 관찰을 『별의 전령』에 담아 발표했고, 이는 우주의 판도를 뒤집은 한 권의 책이 되었다.

하지만 갈릴레오의 발견은 뜨거운 논쟁을 불러왔다.

“흑점은 렌즈의 얼룩일 뿐이다”,

“태양이 움직인다면 왜 매일 해가 뜨고 지는가?”,

“성경에는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다”라는 반박들이 쏟아졌다.

결국 그는 재판을 받고 가택 연금 상태에서 생을 마쳤지만, 연구만은 끝까지 놓지 않았다.

좁은 방에서, 그는 여전히 계산하고 관찰하고 사유했다.

멀리 있는 세계를 향해 열어둔 그의 시선은 닫히지 않았다.

한편, 네덜란드의 작은 도시 델프트에서는 이름 없는 상인이 렌즈 하나를 붙들고 새로운 세계를 열고 있었다.

판 레이우엔훅은 몇 시간이고 유리를 녹이고 갈고,

작은 렌즈의 모양을 조정하며 당시 세상 어디에도 없던 현미경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물 한 방울 속에서 인간이 한 번도 본 적 없던 생물들을 발견한다.

수천 수만 개의 작은 점, 움직임, 형태들. 그는 그것들을 ‘아주 작은 동물들’,

즉 애니멀큘이라고 불렀고, 오늘날의 미생물과 세포학의 시작이 되었다.

그는 치아에서 긁어낸 찌꺼기, 고추 물, 빗물, 우유, 혈액 등 일상의 모든 것들을 직접 들여다보고 기록했으며,

이러한 관찰을 왕립학회에 편지로 보내면서 학자들의 인정을 받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그가 과장한다고 의심했지만, 그가 보여준 작은 세계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판 레이우엔훅은 생을 마칠 때까지 수백 개의 현미경을 만들고, 새로운 생명체를 끝없이 발견해 나갔다.

책은 후반부에서 두 과학자의 발견이 현대과학에 어떤 문을 열었는지를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갈릴레오 이후 우리는 인공위성과 우주망원경으로 외계 행성을 관찰하고,

블랙홀과 은하의 구조까지 탐구하게 되었다. 판 레이우엔훅 이후

우리는 세포와 유전자, 바이러스의 존재를 이해하며 질병을 치료하는 의학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멀리 본 사람과 가까이 본 사람, 방향은 달랐지만 그들이 가르쳐 준 것은 동일하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보이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도구와 눈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확장되고 새롭게 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책의 마지막 장면은 아름다운 메시지로 마무리된다.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세요. 답을 찾기 위해 멀리 내다보거나 가까이 들여다보세요.

그리고 한 번 더 의심해 보세요. 남들과 다르게 생각할 용기를 가지세요.”

두 과학자의 삶은 바로 이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멀리 혹은 가까이, 질문하고 실험하는 태도 자체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보는 관점의 전환이다.

갈릴레오는 멀리 바라봄으로써 인간이 우주에서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닫게 했고,

판 레이우엔훅은 가까이 들여다보며 작은 세계 안에 또 하나의 우주가 존재함을 알려주었다.

우리가 아는 세계는 언제나 관찰 도구와 시선의 한계 안에 있다.

이 책을 읽으니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지금 내가 당연하다고 믿는 것들은 정말 사실일까?

내가 보지 못한 세계, 아직 모르는 분야가 훨씬 더 넓고 복잡한데

이미 다 알고 있는 척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익숙함을 잠시 내려놓고 새로운 질문을 던질 용기가 나에게 있나?

이 책이 가르쳐 준 건, 정답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중요한 건 다시 묻는 사람이 되는 일이라는 점이다.

눈을 조금만 달리 돌리면, 멀리서도·가까이서도 전혀 다른 세계가 모습을 드러난다.

나는 이 작고 끊임없는 질문들이 우리 삶을 더 깊게 바라보게 하고,

세상을 더 넓게 이해하게 만드는 출발점이 된다고 믿게 되었다.

'단단한맘 @gbb_mom' 서평단을 통해,

'별빛책방/카시오페아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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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5분 호르몬 혁명 - 우리 몸의 관제탑, 호르몬 관리로 10년 젊어지는 루틴
안철우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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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면 다 그렇지 뭐”,

“예전 같으면 안 힘들었는데 이제는 몇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

“운동은 꿈도 못 꾸지, 바쁘니까 그냥 배달 시켜 먹는 게 편하잖아.”

요즘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내뱉는 말들이다. 밤늦게까지 휴대폰을 보다가 뒤척이며 겨우 잠들고,

아침은 대충 거르거나 달달한 음료로 대신하고, 점심·저녁은 인스턴트 음식과 배달 음식으로 채우는 게 일상이 됐다. 바쁘다는 이유로 몸을 거의 움직이지 못한 채 하루를 보내면서도,

우리는 그저 나이 먹으면 다 그런 거지!라고 스스로를 달랜다.

하지만 이 익숙한 말들과 습관들 뒤에는 생각보다 훨씬 무거운 진실이 숨어 있다.

단순히 살이 조금 찌고, 체력이 예전 같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우리 몸 안에서 호르몬의 균형이 무너지고 노화의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지는 과정이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수면 부족은 멜라토닌 분비를 떨어뜨려 만성 불면을 만들고,

엉망인 식습관은 인슐린을 교란해 혈당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끊이지 않는 스트레스는 코르티솔을 과도하게 끌어올려 면역을 무너뜨리고,

운동 부족은 성장호르몬을 줄여 에너지 대사와 회복력을 떨어뜨린다.

그 결과 우리는 “요즘 유난히 피곤하다, 나이 들어서 그렇겠지”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가속노화’ 구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일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하루 15분 호르몬 혁명』 책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호르몬을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 다시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몸과 마음의 모든 기능을 조율하는 생명의 지휘자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이름을 알고 있는 세로토닌·도파민·코르티솔·멜라토닌·성장호르몬·에스트로겐·테스토스테론 외에도 100가지가 넘는 호르몬이 24시간 내내 움직이며 삶의 질을 결정한다. 문제는 이 호르몬들이 20대 후반~30대 초반을 정점으로 점점 줄어들고,

여기에 앞서 말한 ‘늦게 자기·대충 먹기·계속 앉아 있기’ 같은 현대인의 습관이 겹치면서,

우리 몸의 노화 시계가 정상 속도를 훌쩍 넘어가 버린다는 데 있다.

이 책은 바로 그 무너진 호르몬 밸런스를 어떻게 되돌리고,

노화의 속도를 어떻게 늦출 수 있는지를 하루 15분이라는 현실적인 시간 안에 풀어낸다.

이 책에서 인용하는 연구가 특히 인상적이다.

우리는 흔히 노화를 서서히, 골고루 진행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스탠퍼드 연구팀의 결과에 따르면 노화는 40대 중반·60대 초반·70대 후반,

세 번에 걸쳐 계단식으로 급격히 가속된다.

이 시기에 심혈관 질환이 늘고, 면역이 떨어지고, 근육과 뼈, 인지 기능이 눈에 띄게 약해진다.

저자는 이 가속노화기의 뒤편에 성호르몬, 성장호르몬, 멜라토닌 등 핵심 호르몬의 급격한 감소가 겹쳐 있다는 사실을 짚어낸다. 폐경을 전후해 에스트로겐이 뚝 떨어지면서 여성들은 피부 변화, 심혈관 질환 위험, 우울감과 기억력 저하, 안면 홍조·불면 같은 갱년기 증상에 한꺼번에 노출되고, 남성은 테스토스테론이 서서히 줄어들며 성욕 저하, 근육 감소, 체지방 증가, 만성 피로와 무기력을 경험한다.

저자는 여기서 노화는 절반만 숙명이라고 말한다. 평균수명이 길어지고,

나이가 들어도 건강을 유지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은 결국 ‘적극적인 관리’의 결과라는 것이다.

피부보다 먼저 늙는 곳이 혈관이라는 설명도 마음에 남는다.

혈관은 증상이 거의 없다가 70% 이상 막혀서야 문제를 드러내는 침묵의 장기지만, 동시에 온몸의 노화 정도를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이기도 하다. 인슐린·에스트로겐·테스토스테론·코르티솔·갑상선호르몬의 불균형이 콜레스테롤을 끌어올리고 혈관 벽을 손상시키면서, 어느 날 갑자기 심근경색·뇌졸중 같은 사건으로 터진다. 그래서 저자는 당뇨, 갑상선 질환, 고지혈증을 단순히 약으로 조절하면 되는 병 정도로 여기지 말고, 가속노화를 부추기는 3대 질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가 내놓는 키워드는 “하루 15분”이다.

아침에는 짧은 스트레칭과 산책으로 생체리듬을 깨우고 멜라토닌과 코르티솔의 흐름을 바로잡고,

점심 식사 후에는 계단 오르기 같은 가벼운 근력·유산소 운동으로 혈당 스파이크를 막는다.

저녁에는 호흡과 명상,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긴장된 신경계를 내려놓고 숙면을 준비한다.

실제로 책 속에는 이런 습관만 바꿨을 뿐인데 불면에서 벗어나고, 혈당과 체중을 안정시키고,

갱년기 우울감이 완화된 환자들의 사례가 여럿 나온다.

대단한 수술이나 복잡한 식이요법, 강도 높은 운동이 아니라, 일상 안에서 가능한 작은 루틴이 호르몬 밸런스를 서서히 되돌려 놓는다는 점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이 몸의 호르몬 이야기에서 자연스럽게 마음의 호르몬 이야기로 넘어간다는 점이다. 저자는 불안과 우울을 마음이 약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 편도체와 전전두엽, 세로토닌·도파민 같은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에서 비롯되는 뇌와 호르몬의 문제로 설명한다.

그래서 ‘마음 스트레칭’으로서의 글쓰기와 필사를 제안한다.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걱정과 불안을 일기 형식으로 써 내려가다 보면 감정이 밖으로 빠져나오면서 정리되고, 상황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힘이 생긴다. 여기에 손으로 쓰는 것이 지닌 힘을 강조하는 대목도 인상적이다. 눈으로 글을 읽고, 손으로 글자를 따라 쓰는 행위는 뇌의 운동 영역과 인지 영역을 동시에 자극하는 작은 뇌 운동이며, 이 과정에서 도파민·세로토닌·노르에피네프린이 자연스럽게 분비되면서 불안과 우울이 한 발짝 물러난다. 좋아하는 문장, 짧은 시, 노래 가사를 15분 동안 필사하는 것만으로도 기억력과 집중력이 살아나고, 머릿속을 떠다니던 부정적인 생각이 글자와 함께 정리되기 시작한다는 설명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동화책 읽기와 외국어 공부를 뇌의 시냅스를 새로 잇는 15분으로 보여준다. 동화는 단순한 유아용 책이 아니라, 어른이 된 뒤에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내면의 아이를 다독이는 이야기이자, 시니어 복지 현장에서 인지·정서 프로그램으로 활용될 만큼 효과적인 콘텐츠로 소개된다.

외국어 공부 역시 단어 몇 개를 외우는 것만으로도 도파민과 BDNF(Brain-Derived Neurotrophic Factor, 뇌유래신경영양인자 = 뇌세포를 건강하게 유지하고 새로 만들고 연결을 강화하는 데 꼭 필요한 뇌의 영양제 같은 단백질이다)가 증가해 새 시냅스가 만들어지고, 뇌의 노화 속도가 늦춰지는 활동으로 설명한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발음이나 유창함이 아니라, 오늘 조금 더 배웠다는 작은 성취를 통해 뇌의 보상 회로를 깨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하루 15분 호르몬 혁명』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노화는 막을 수 없지만 얼마나 빠르게 늙을지, 어떤 상태로 늙어갈지는 우리가 매일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밤마다 “어쩔 수 없지”라고 중얼거리며 배달 앱을 켜는 대신,

오늘 단 15분만이라도 몸과 마음을 위해 애써 보는 것이다.

이 책은 그 작은 15분이 어떻게 혈관과 호르몬, 뇌와 감정까지 연쇄적으로 변화시키는지를 의학적 근거와 실제 사례로 보여준다.

나이 듦을 막을 수는 없지만, “나이 먹어서 어쩔 수 없다”는 말 뒤에 숨고 싶지 않은 사람,

앞으로의 시간을 조금 더 또렷하고 단단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 펼쳐 볼 만한 책이다.

읽고 나면, 적어도 오늘 하루를 예전처럼 대충 넘기기는 조금 어려워진다.

지금 이 15분을 어떻게 쓰느냐가 내 노화의 속도와 삶의 방향을 함께 바꾸는 시작일 수 있다는 생각을 선명하게 남기는 책이었다.


'한스미디어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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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놀 인스타 @hagonolza


현대인들의 잘못된 생활 습관은 호르몬 불균형을 불러오는 가장 큰 요인이다. 수면 부족, 불규칙한 식사, 만성적인 스트레스, 운동 부족은 현대인이 일상생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 습관은 노화의 속도를 한층 빠르게 만든다.
일례로 밤에 깊은 잠을 못 자면 멜라토닌이 줄어 만성 불면증이 생기고, 영양소가 풍부한 식사를 하지 못하면 인슐린 분비에 문제가 생기며, 일상의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제때 해소하지 못하면 코르티솔이 증가해 면역 체계까지 위협받는다. 적당한 운동을 지속하지 않으면 성장호르몬이 제대로 분비되지 않아 에너지 대사에도 문제가 생긴다. 나아가 만성적인 호르몬 불균형은 불면증과 당뇨병, 고혈압, 심혈관 질환 그리고 만성적 염증으로 이어져 질병까지 불러온다. 더빨리 늙어 가는 가속노화뿐만 아니라 우리를 괴롭히는 질병의 문도 활짝 열리고 만다.
"호르몬 관리가 곧 인생 관리입니다. 짧은 시간이라도 꾸준히 할 수 있는 좋은 습관들 들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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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폼력 : 숏폼 커머스 시장을 선점하라 - 숏폼 전도사가 알려주는 숏폼 커머스의 비밀
윤승진 지음 / 이야기나무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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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폼력: 숏폼 커머스 시장을 선점하라』는 “요즘 숏폼 뜬다던데!” 수준의 가벼운 트렌드 책이 아니라, 이미 중국에서 한 차례 증명된 숏폼 커머스 생태계를 한국과 글로벌 시장에 어떻게 옮겨 심을 것인가에 대한, 꽤 본격적인 비즈니스 설계서에 가깝다. 책의 첫머리에서 저자는 중국 틱톡(도우인)의 사례를 가져온다. 2024년 후룬연구소가 발표한 중국 부자 1위가 바로 틱톡을 만든 1983년생 장이밍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숏폼 커머스 시장이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한 나라의 부(富)의 지형을 바꿀 정도의 힘을 가진 경제라는 점을 강조한다. 미국에서 틱톡을 둘러싼 정치·경제적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 또한, 틱톡이 만들어낸 숏폼 경제가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의 반증으로 읽어낸다.

하지만 이 책이 계속해서 말하는 핵심은 “중요한 것은 틱톡이 아니라 숏폼”이라는 지점이다. 틱톡이 중국이라는 세계 최대 모바일 단일 시장에서 숏폼 커머스라는 비즈니스 모델을 검증했다면, 이제 남은 질문은 “그 생태계를 한국과 글로벌 시장에서 누가, 어떻게 다시 만들 것인가”이다. 중국에서는 숏폼이 이미 미디어와 마케팅 수단을 넘어 이커머스의 구조를 바꾸고,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확장되며 오프라인 생태계까지 뒤흔들고 있다. 그 결과, “모든 비즈니스에 있어 숏폼은 기본이자 중심”이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닐 정도가 되었다. 저자는 이 중국의 변화를 미래의 거대한 예고편으로 삼아, 앞으로 한국과 글로벌 시장에서도 숏폼 커머스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예측하고, 그 흐름을 먼저 잡는 브랜드와 크리에이터가 될 것을 독자에게 권한다.

이 책의 구성은 비교적 단순하지만, 흐름이 명확하다.

왜(Why) 숏폼이 메가트렌드가 되었는지, 숏폼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지에 대한 큰 그림을 먼저 보여 준 뒤, 그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개념과 사례(What), 마지막으로 실제로 시장을 선점하고 실행하는 방법(How)로 이어진다. 저자는 예언컨대,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면 영역과 규모에 관계없이 무조건 숏폼을 만들게 될 것이라고 단언하는데, 이 문장이 이 책 전체의 기조를 잘 드러낸다.

숏폼은 선택지가 아니라 필수 언어이며, 빨리 할 것인가 늦게 할 것인가만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숏폼 커머스’라는 개념을 단순히 물건 파는 기능으로 축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는 숏폼 커머스를 “숏폼 콘텐츠와 연계되어 확장된 커머스 생태계”라고 정의한다. 여기에는 유형의 상품 판매뿐 아니라, 서비스 예약, B2B 리드 확보, 지식 콘텐츠 구독, 오프라인 매장 방문 유도까지, 비즈니스의 거의 모든 목표 달성이 포함된다. 즉, 숏폼 커머스란 숏폼을 통해 잠재 고객에게 노출되고, 그들이 각 비즈니스의 핵심 목표(온라인 구매, 상담 신청, 매장 방문 등)에 도달하게 만드는 모든 활동을 묶는 말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조회 수만 높은 100만 뷰 영상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처음부터 “이 콘텐츠가 시청자를 어디까지 데려갈 것인가”라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기획되지 않으면, 그건 숏폼 커머스가 아니라 단순 소모성 콘텐츠일 뿐이라는 메시지가 분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숏폼을 춤·밈 중심의 ‘장르’로 오해하지만, 저자는 숏폼을 어떤 내용이든 담을 수 있는 형식이라고 규정한다. 문서 파일 안에 논문도, 계약서도, 일기장도 담을 수 있듯이, 숏폼이라는 형식 안에 B2C, B2B, 공공, 교육, 전문가 브랜드까지 다양한 비즈니스가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스타그램 릴스, 유튜브 쇼츠, 틱톡, 네이버 클립, 심지어 당근과 카카오까지 숏폼 기능 도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인스타그램은 릴스 도입 1년 만에 10대부터 60대까지 전 연령대의 체류 시간을 1.5~2배 늘렸고, 이용자의 앱 사용 시간 절반이 릴스에 쓰일 정도가 되었다. 유튜브는 쇼츠 도입 이후 MAU가 10억에서 20억으로 뛰어올라 국내 모바일 시장 체류 시간 1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네이버와 카카오 역시 체류 시간을 늘리기 위해 숏폼 카테고리를 적극적으로 붙이고 있다. 저자는 이런 흐름을 두고 숏폼은 중독 비즈니스이며, 숏폼이 만드는 유저 체류 시간의 효과가 너무 명확하기 때문에 모든 플랫폼이 숏폼 생태계에 뛰어드는 것은 필연이라고 분석한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 ‘중독’이라는 단어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미 숏폼에 깊이 빠져 있고,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방식 자체가 ‘숏폼화’되고 있다. 중국에서 하루 평균 숏폼 시청 시간이 2시간 28분에 달한다는 사실은, 아직 하루 44분 수준인 한국의 미래를 보여 주는 지표로 제시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비즈니스는 B2B인데 가능할까?”라는 질문에 저자는 단호하게 “그렇다”고 답한다. 장르가 아니라 미디어 형식이기 때문에, 모든 비즈니스는 숏폼 콘텐츠화될 수 있고, 앞으로 10년간 비즈니스 경쟁력의 상당 부분이 숏폼을 얼마나 잘 활용하는지, 즉 ‘숏폼력’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책은 기존 SNS와 숏폼 생태계의 차이도 흥미롭게 비교한다. 틱톡을 시작으로 한 숏폼 플랫폼들은 ‘소셜 그래프’가 아니라 ‘인터레스트 그래프’를 엔진으로 삼는다. 관계가 아니라 “무엇을 좋아하는가”를 기준으로 콘텐츠를 추천하는 구조다. 사용자의 짧은 체류, 스크롤 속도, 반복 재생 같은 사소한 손가락 움직임을 AI가 실시간으로 분석해, 사용자가 좋아할 만한 콘텐츠를 먼저 찾아와준다. 이 결정적인 차이는 팔로워가 거의 없는 초보 크리에이터의 영상도 하루아침에 100만 조회수를 찍게 만드는 ‘기회의 평등’을 만든다. 과거 SNS에서는 수십만 팔로워, 막대한 광고비, 기존 명성 없이는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다면, 이제는 “얼마나 많이 아는가”보다 “얼마나 재미있고 반응 나오는 숏폼을 만들 줄 아는가”가 승부를 가른다. 저자는 이것을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서 다시 경쟁을 시작할 수 있는 평평한 운동장”에 비유하며, 숏폼 알고리즘이 기존 영향력의 규칙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운동장에서 이기는 힘, ‘숏폼력’은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책의 후반부에서 가장 실질적으로 도움이 됐던 부분은 밈과 트렌드를 캐치하고 콘텐츠에 적용하는 노하우를 다루는 장이었다. 저자는 먼저 데이터 플랫폼을 활용해 소셜 지표와 웹 분석으로 타깃의 관심과 행동 패턴을 파악하라고 말한다. 글로벌 크리에이터 데이터 플랫폼(녹스인플루언서, 피처링 등)을 통해 어떤 유형의 콘텐츠가 뜨고 있는지 유료로라도 모니터링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다음에는 각 플랫폼이 직접 제공하는 트렌드 리포트를 적극 활용하라고 조언한다. 틱톡의 ‘틱톡 트렌드 레터’, 유튜브의 ‘컬처 & 트렌드 리포트’, 인스타그램의 ‘언제나 그램 트렌드 리포트’ 같은 공식 채널을 통해 최신 챌린지, 해시태그 흐름, 성공 캠페인 사례를 파악하면, 막연한 감이 아니라 데이터 기반으로 밈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Z세대의 가치관·라이프스타일을 분석하는 대학내일 20대 연구소, 오픈애즈 같은 리포트를 통해 밈을 소비하고 재가공하는 세대의 맥락을 이해하라고 덧붙인다. 트렌드를 주도하는 메가 크리에이터 계정을 정기적으로 모니터링하고, 한국보다 한 발 앞서 있는 중국 도우인의 트렌드를 확인하는 것도 유용한 팁으로 제시한다.

트렌드를 실제 콘텐츠에 녹여내는 방법도 꽤 구체적이다. 저자는 “첫 3초에 트렌드를 활용하라”는 말을 반복한다. 첫 3초가 시청자의 이탈을 막고, 알고리즘이 노출을 확장할지 말지를 판단하는 최전선이기 때문이다. 인기 음원, 유행하는 멘트, 시선을 확 끄는 시각 효과 중 하나라도 첫 장면에 배치해 즉각적인 흥미를 유도하고, 트렌드를 이용해 참여를 유도하되, 브랜드의 메시지와 연결되는 방식으로 재해석할 것을 강조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트렌드를 얼마나 빨리 따라 했느냐’가 아니라 ‘트렌드를 얼마나 내 브랜드의 언어로 번역했느냐’라는 점을 끝까지 상기시킨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숏폼이 중요하다고만 하지 않고, 왜 중요한지(중국과 글로벌의 흐름), 무엇을 숏폼 커머스라 부를 수 있는지(목표 중심의 정의), 어떻게 실제로 만들고 성장시킬지(트렌드 분석, 알고리즘 이해, 실행 노하우)까지 한 권 안에서 연결해 주는 점이 강점이다. 현업 마케터, 브랜드 담당자, 1인 셀러, 크리에이터 지망생까지, “나도 숏폼 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지?”라는 막막함을 느끼는 사람에게 꽤 실용적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크게 남은 문장은 “모든 비즈니스는 숏폼 커머스가 된다”는 말과,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면 결국 숏폼을 만들게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이미 사람들의 눈과 손가락은 숏폼에 길들여져 있고, 플랫폼들은 체류 시간을 더 늘리기 위해 숏폼을 전면에 배치하고 있다. 이 거대한 흐름 앞에서 질문은 단 하나로 좁혀진다.

“언제 시작할 것인가, 그리고 얼마나 빨리 숏폼력을 키울 것인가.”

『숏폼력』은 그 질문 앞에서 미루고만 있던 사람에게,

지금 당장 카메라를 켜고 첫 3초를 고민해 보라고 등을 떠미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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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1 - 박경리 대하소설, 3부 3권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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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특별판 11권은 한마디로,

“죽음이 곳곳에서 일어나는 시대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떻게 버티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이들의 비극만이 아니라, 그 죽음을 기억하고, 잊으려 하고, 죄책감과 두려움을 안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더 깊게 다가오는 권이다.


이 권의 초반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상현과 명희의 재회다.

예전에 비 오는 밤, 명희가 상현의 하숙을 찾아갔다가 쫓겨나던 일을 두 사람이 다시 꺼내면서 장면이 시작된다.

명희는 예전에 빗길에 상현의 하숙을 찾아갔다가, 그가 자신을 빗속으로 내쫓았던 일을 떠올리며 그때의 상현을 아무 설명도 없이 문밖으로 밀어낸 비겁한 사내였다고 말한다. 상현은 그 말을 듣자, 그날 밤 자신이 한 행동과 지금 둘 다 이미 다른 가정을 꾸린 처지를 함께 떠올리며, 이런 이야기를 계속하다 보면 옛 감정까지 다시 건드리게 되는 건 아닐까, 또 자신의 비겁함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건 아닐까 두려워져 “우리가 이런 얘기 해도 되겠습니까?”라며 불안해한다. 그는 명희가 그 일을 누구보다 부끄럽게 여겼을 거라고 짐작해 왔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정면으로 그날을 꺼내드는 명희의 태도가 더욱 당혹스럽다.

그런데 명희의 대답이 인상적이다.

자신도, 상현도 이제 장래가 이미 굳어 버렸고, 앞으로 큰 변동도 없을 거라며,

그래서 오히려 두려워할 게 없다고 말한다.

이 말 속에는 “내 인생은 이미 틀이 잡혀 버렸으니, 그 안에서만 솔직해질 수 있다”는 씁쓸한 체념과,

그 체념 위에 세운 이상한 당당함이 함께 있다.

상현은 그런 명희를 보며, 자신은 세월 속에서 찌들어 버린 사람이고,

명희는 그 사이 눈에 띄게 자란 나무처럼 단단해졌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한때는 자신이 더 앞서 있다고 믿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뒤처진 사람, 초라한 사람으로 자기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 감정은 환국과 마주 앉는 장면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상현은 길상을 꼭 빼닮은 환국을 바라보며, 예전 양반·하인의 위계가 완전히 뒤집힌 세월을 실감한다.

한때 하인이었던 사내의 아들이 이제는 어느 양반 자제보다도 당당하고 총명한 눈빛을 하고

아비를 절대적으로 믿고 숭배하는 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 시선을 느끼며 상현은, 길상과 명희 얼굴이 번갈아 떠오르는 동시에,

환국이 아버지를 보지 못하는 형편과, 하동에 남겨진 자기 아들들 형편이 미묘하게 겹치는 것을 느낀다.

그건 단순한 질투가 아니라, 세월과 인생 전체에 대한 깊은 패배감에 가까웠다.

명희와 상현의 관계는 이별주를 나누는 장면에서 한 번 더 선을 넘는다.

임명빈은 둘을 앉혀놓고,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를 처지라면 이별주 한 잔쯤은 부어 줄 수 있지 않겠느냐며 술을 권한다. 그는 누이와 상현 사이에서,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이더라도 서로 사랑했었다는 기억만은 아름다울 것이라 믿는 문학청년 같은 감상에 빠져 있다.

그래서 상현이 명희에게 술을 건네며 “울지 마십시오. 견디지도 마십시오.”라고 말하는 장면은 아주 잠시나마 애틋하게 보인다. 하지만 곧바로 상현과 명희, 그리고 임명빈까지 모두 간음자이거나 간음을 방조한 죄인이라는 문장이 이어진다. 이 관계는 이미 각자의 자리와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 현실의 경계 밖에서만 살짝 허락된 감정에 취해 보는 것일 뿐이다.


『토지』는 인물의 감정을 충분히 보여 주면서도, 그 감정이 어떻게 현실과 부딪히는지를 끝까지 함께 보여준다.

이 권에서 “죽음”이라는 키워드가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복동네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혼자 사는 과부 복동네는 소문과 말 한마디에 휘말려, 마을에서 미묘한 시선과 수군거림의 대상이 된다.

봉기 노인이 자기 딸을 감싸고 오래 묵은 앙금을 풀겠다고 입을 잘못 놀린 것이,

복동네를 향한 모욕과 의심의 말로 바뀌어 퍼져 나간다.

늙은 과부가 요망하다는 식의 구체적인 증거도, 뚜렷한 죄도 없는 말들이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이어지며 그녀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인다.

야무네가 과부 설움보다 더한 게 없다고 눈물을 훔치며 말하는 대목은,

복동네의 죽음이 단지 한 사람의 자살이 아니라 이 시대에 혼자 남은 여자가 홀로 견뎌야 하는 구조적 폭력이라는 걸 절실하게 보여준다. 머리 한 번 손질해도, 옷 한 벌 갈아입어도, 남자와 마주쳐도 모두 눈치를 봐야 하고, 조금만 티가 나면 “남자를 밝힌다”, “신들렸다” 같은 말이 쉽게 붙는 삶이다.

그 지독한 감시와 수군거림 속에서 결국 복동네는 양잿물을 마시고 죽음을 선택한다.

뒤늦게서야 사람들은 말이 사람을 죽였다고 깨닫는다.

석이는 봉기를 찾아가, 복동네의 죽음이 그의 혀끝에서 비롯되었음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복동네 어머니의 죽음과 두리누님에 대한 소문을 함께 꺼내며,

두리의 명예를 지키고 싶다면 마을 사람들 앞에서 사실을 고백하라고 요구한다.

봉기가 끝까지 버티자 석이는 강가까지 데리고 가 등을 내리치며 짐승만도 못한 늙은 것이라며 쏟아낸다.

이 장면은 통쾌하면서도 섬뜩하다.

이미 한 사람은 죽었고, 그 죽음은 돌이킬 수 없다.

복동네의 죽음은 그래서 더 잔인하다.

죽음으로도 자기 편을 얻지 못하고, 죽은 뒤에야 겨우 몇 마디 반성 섞인 말이 오갈 뿐이었다.


죽음의 그림자는 다른 인물들에게도 계속 겹쳐진다.

용이는 문득,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 배신자, 나쁜 놈이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윤보를 비롯해, 부모와 누이, 강청댁, 월선, 임이네, 최치수, 윤씨부인, 별당아씨, 수많은 노비와 마을 사람들,

이름을 다 세기도 힘든 이들 얼굴이 한꺼번에 떠오른다.

그의 눈앞에서 죽음은 마치 가을 들판에 베어 누인 볏단처럼 여기저기 무더기로 널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사이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을 떠올릴 때, 용이가 느끼는 건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아니라,

“왜 나만 살아남았을까” 하는 고독과 죄책감이다.

이 장면은 11권 전체의 정서를 압축한다.

죽음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고, 살아남은 사람은 그 죽음들 사이에서 홀로 버티고 서 있는 존재라는 감각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관수, 석이, 용이가 술자리를 함께하며 시대와 계급, 형평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관수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가난한 집 자식이라고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한다.

그 말 속에는 아직 남아 있는 오래된 농민식 도덕과 양심이 있다.

석이는 옛날 종이었다가 지금 잘 산다고, 과거를 잊고 주인 행세를 하며 거들먹거리는 사람을 비꼬며,

가난을 벗어나도 품격을 잃으면 결국 천해지는 것뿐이라고 냉소한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묻는다.

예전처럼 서로 도우며 살던 인심은 어디로 갔는지, 이제 사람들은 장사꾼처럼 계산만 남은 것은 아닌지.

예전 촌락의 상부상조는 사라지고, 각자도생의 시대가 되었음을 실감하는 대목이다.

관수는 또 형평사운동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단지 백정과 농민의 싸움, 백정 신분만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 내부의 계급과 차별, 그리고 일제 강점기 속에서 조직된 힘이 왜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운동이다. 형평사 조직이 전국으로 퍼질 수 있었던 것도 일본과의 정면 충돌이 아니라, 겉으로 보기엔 조선인끼리의 문제로 보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겉으론 차분하게 이야기하지만, 그 속에는 백정 집안과 얽힌 자기 처지, 차별을 향한 분노와 자부심이 섞여 있다.

이 술자리에서 석이는 형평운동, 계급 문제와 함께 기화를 떠올린다.

옥색 치마와 분홍 저고리의 기화는 석이에게 단순한 동생 같은 존재가 아니라,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사랑, 말로 꺼내는 순간 모든 걸 잃게 될지도 모를 청춘 그 자체였다. 그는 기화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 감정을 떨쳐내지 못한다.

11권의 인물들은 이렇게 사적인 사랑과 시대적 고민이 한 사람 안에서 충돌하고 겹쳐진다.


이야기의 다른 흐름에서는 계명회 사건이 벌어진다. 서의돈, 성삼, 선우일·수신, 유인성·유인실 남매, 일본인 오가타, 그리고 길상까지 줄줄이 검거된다. 계명회는 사회과학연구를 내세운 비밀결사에 가까운 모임으로, 노동공제회나 청년회, 공산청년회 같은 여러 좌경 조직이 생겨나던 흐름 속에서 나온 집단이다. 황태수는 그들의 사상에 완전히 동의해서가 아니라, 반일운동에 조금이라도 보태고 싶다는 마음으로 운영비를 대주었다.

길상에게 계명회는 국내로 돌아오기 위한 디딤돌 같은 존재였고, 그 조직의 선은 형평운동, 부산의 관수, 그리고 다시 평사리로까지 이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김환의 자살 이후 느슨해진 운동의 흐름이 다른 경로로 이어지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모든 일들을 지켜보는 임명빈의 마음은 점점 짓눌린다. 서참봉댁에서 나오는 길에 그는 보이지 않는 힘이 머리를 땅 속으로 밀어 넣는 것 같은 절망을 느낀다. 자기 땅, 자기 나라에서 숨 한 번 크게 쉬지 못하고 눈치만 봐야 하는 처지, 은행에 다니는 영돈이 상사의 눈치를 보며 형무소로 뛰어가는 초라한 모습이 그 절망을 더 키운다. 헐벗고 굶주리는 것보다, 언제 어디서 찍힐지 몰라 마음을 늘 조이고 살아야 하는 이 정신적 압박이 더 무서운 병 같다는 그의 생각은, 식민지 조선인들의 일상을 고스란히 전한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감옥에 갇혀 있거나, 목적을 향해 뛰는 사람들의 편이 더 속 편할지도 모르겠다고 느낀다. 가만히 썩어가는 고인 물 같은 삶에서 미쳐 가는 것보다는, 무엇이라도 하다가 부딪히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쓸쓸한 자각이다.


한편 홍이는 일본에서 보낸 시간들을 떠올리며 일본에 대한 혐오와 경멸을 드러낸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겪은 수모, 왜헌병에게 당한 고문과 모욕, 일본 여자들의 정욕과 기모노 아래 맨살의 풍습까지 모든 것이 역겨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하숙집 여자들이 밤마다 이불 속으로 파고들던 경험을 하면서도, 그는 겉으로 화를 내지 못하고 그저 웃는 시늉만 해야 했다. “잘난 말 몇 마디 하는 건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 살아남으려면 바보 시늉, 미친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는 말을 하며, 감정에 휩쓸려 힘을 허비하는 것은 바보짓이라고 정리한다. 여기서 보이는 건, 정면으로 맞붙을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몸을 낮추고 비켜 서면서도, 속으로는 끝까지 잊지 않고 있는 저항의 감각이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겹쳐지며, 11권은 분명 “죽음”을 중심에 두고 있지만, 단순히 누가 어떻게 죽었는가를 나열하는 책은 아니다. 환이, 복동네, 기화, 이미 떠나간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은, 결국 그들이 어떤 말을 듣고, 어떤 시대를 살았고, 어떤 사랑과 모멸 속에서 버티다 무너졌는지를 보여주는 장치다. 그리고 그 죽음들 사이에 남겨진 사람들—상현, 명희, 석이, 관수, 용이, 임명빈, 홍이, 서희—의 마음이 11권을 진짜로 무겁게 만든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면, 누구 하나 편안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먹먹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서로를 붙잡으려 했던 손길, 말로라도 누명을 벗겨주려 했던 마음, 가난한 아이를 차별하지 말라는 당부, 그래도 어떻게든 조직해 보려는 몸부림 같은 작은 움직임들이 희미하게 남는다.

이 책은 죽음의 들판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그 와중에도 완전히 꺼지지 않는 인간다움의 불씨를 보여 주는 이야기라고 느꼈다.


#채손독 을 통해 #도서협찬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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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능 우울증 -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고장 나 버린 사람들
주디스 조셉 지음, 문선진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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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고기능 우울증』은 겉으로 보기에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유능하게 살아가지만,

속으로는 점점 기쁨과 활력을 잃어 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난 우울증까진 아닌데, 이상하게 늘 공허하고 피곤하다”라고 느끼는 이들에게,

지금의 상태에 정확한 이름을 붙여 주고, 거기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저자는 그 보이지 않는 위험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저널리스트이자 2019년 미스 USA에서 30년 만에 탄생한 흑인 우승자,

<체슬리 크리스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MBA와 법학 학위를 가진 지성인, 오프라 윈프리와 인터뷰할 정도로 인정받던 방송 기자,

사회적 성공의 상징처럼 보였던 그녀는, 미인대회 우승 이후 소셜 미디어에서 쏟아지는 악성 댓글과 “죽어 버리라”는 말들에 끊임없이 상처받고 있었다.

직장에서는 가면 증후군에 시달리며 자신의 성취를 믿지 못했고,

카메라 앞에서는 모든 흑인 여성을 대표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늘 따라붙었다.

사적인 관계에서도 불안정한 연애에 흔들리며,

마음속에서는 나는 부족한 사람이야라는 자책이 끊이지 않았다.

크리스트는 고기능 우울증 진단을 공개적으로 받은 첫 공인이었지만,

인생의 굴곡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2022년 1월 30일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이 비극적인 사례는 고기능 우울증이 단순한 기분 저하가 아니라,

충분히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몰아갈 수 있는, 매우 현실적인 위험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일깨운다.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저자는 스스로 쌓아 올린 압박감이

어느 순간 자기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우리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말한다.

팬데믹 초창기, 뉴욕이 멈춰 섰던 그 시기에 저자는 오히려 커리어의 정점에 있었다.

닫지 않은 진료실, 쏟아지는 방송 출연, 늘어나는 환자들, 명문대의 초청까지.

하지만 매일 환자와 가족, 직원들을 책임져야 하는 상사이자 의사, 엄마, 아내로 살다 보니,

정작 나라는 사람은 서서히 텅 비어 가고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은 의료진에게 새로운 일상에 대처하는 법을 강연하기 위해 자료를 준비하던 밤이었다.

남들에게는 대처법을 가르치면서 정작 자신은 그저 버티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저자는 조용히 중얼거린다. “나, 우울한 것 같은데….”

아침에 잘 일어나고, 일을 성실히 해 내고,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도 없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과 공허함이 끊이지 않는 상태를 경험했다.

이 모순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가 연구하기 시작한 증상이 “고기능 우울증”이다.

고기능 우울증은 일상 기능은 잘 유지되지만, 내면에서 기쁨과 활력이 사라지는 상태를 가리킨다.

늘 바쁘게 움직이지만, 쉬어도 쉰 것 같지 않고, 멈추면 공허함이 덮쳐 올 것 같아 일부러 더 자신을 몰아붙인다. 다들 이 정도는 견디고 사는 거지라고 넘기며, 자신의 고통에는 연민을 허락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런 상태의 뿌리에 트라우마, 무쾌감증, 마조히즘이 얽혀 있다고 설명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마조히즘, 특히 피학적 관계에 대한 대목이다.

마조히즘은 단지 성적 의미가 아니라, 타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해치는 행동 패턴을 뜻한다. 고기능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은 대개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내어주고, 그 대가로 사랑과 인정, 괜찮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얻으려 한다.

그리고 책에 나오는 예시는 놀라울 만큼 현실적이다.

밤새 프로젝트를 준비하느라 네 시간밖에 못 자고도 친구의 끝없는 하소연을 묵묵히 들어주는 사람, 충분히 이직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도 부당한 상사 밑에서 “그래도 여기까지 와 준 게 어디냐”며 스스로를 달래는 사람, 가족 앞에서는 자신을 깎아내리면서도 뒤에서는 돈을 빌려 달라는 친척에게 아무 말 없이 또다시 지갑을 여는 사람, 준비되지 않은 동거 요구를 받아들이고 결국 자신의 월급 대부분을 상대를 부양하는 데 쓰는 사람까지.

이 장면들에는 언제나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한쪽은 계속 주고, 다른 쪽은 계속 받기만 한다. 마조히즘적 자기희생은 상대를 자연스럽게 ‘받는 사람’의 자리에 고착시키고, 관계의 균형을 서서히 무너뜨린다. 저자는 이렇게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피학적 관계에서 쌓이는 스트레스와 압박감이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이 흡연만큼이나 해롭다고 경고하며, 지금 이 불균형을 자각하는 순간이야말로 자신을 회복시킬 첫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이 문제를 깨닫게 하기 위해 저자가 제안하는 간단한 방법이 인상적이다.

종이를 한 장 꺼내 가장 중요한 사람 한 명의 이름을 적고, 왼쪽에는 내가 그 관계를 위해 지난 한 주 동안 한 일, 오른쪽에는 그 사람이 나를 위해 한 일을 적어 보는 것. 그리고 그 종이를 시소처럼 바라보며 어느 쪽이 더 무겁게 내려가 있는지 확인해 보는 작업이다. 이 과정을 가장 가까운 세 사람에게 반복하면, 내가 어떤 패턴의 관계를 맺어 왔는지가 서서히 드러난다.

책 속에서 또 하나 눈에 남는 개념은 ‘공정한 세상 가설’이다.

우리는 착하게 살면 좋은 일이 생긴다, 나쁜 사람에겐 언젠가 벌이 돌아간다는 믿음에 기대 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선한 사람에게도 나쁜 일이 일어나고, 정직한 사람이 부당하게 해고되기도 한다.

하지만 고기능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은 유독 자신의 트라우마에 대해서는 “이건 내 잘못이야”라는 해석만을 고집한다. 죄책감과 수치심을 내면화한 채 스스로를 벌주듯 살아가며, 자신이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악순환을 끊기 위해, 트라우마와 무쾌감증, 마조히즘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위에서 자신을 돌보는 작은 실천들을 쌓아 가는 ‘5V 원칙’ 같은 회복의 도구들을 제시한다. 팬데믹과 이혼이라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마주한 끝에 이 책을 쓰게 되었다는 고백은, 개인의 고통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언어로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다소 아이러니하지만, 그 두 사건이 없었다면 이 책도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독자로서는 그 시간이 고맙게 느껴지기도 했다.

현대 사회에서 고기능 우울증을 전혀 겪지 않고 사는 사람을 찾는 것이 더 어려운 시대 같다.

늘 바쁘고, 책임감 강하고, 이 정도면 괜찮지라며 자신을 설득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특히 필요한 것 같다. 『고기능 우울증』은 지금까지 “그냥 내 성격이 문제인 것 같아”라며 넘겨버린 감정과 패턴들에 정확한 이름을 붙여 주고, 이제는 그 무게에서 조금씩 벗어나 다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갈 수 있도록 방향을 밝혀 주는 책이다.

'이키다 @ekida_library'님을 통해

'포레스트북스 출판사' 도서와 소정의 제작비를 지원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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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학적masochistic 관계란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느라 겨우 네 시간도 채 잠을 못 잤음에도 피로를 버텨내며 친구가 끝도 없이 늘어놓는 시어머니 험담이나 최근에 다녀온 여행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있다거나, 충분히 이직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비합리적이고 모욕적인 상사 밑에서 일하고 참아내며 맺어가는 관계도 있다. 가족들 앞에서는 무자비하게 자신을 깎아내리면서 뒤에서는 돈을 빌려 달라고 요청하는 친척에게 돈을 빌려주면 그들에게 조용히 미소를 지어주기까지 한다. 아직 진지한 관계를 맺을 준비가 되지 않았음에도 대뜸 동거하자고 하는 연인 관계에 있는 사람과 헤어지지 못하고, 결국 자신이 힘들게 일하며 번 월급으로 상대를 부양하게 되는 관계도 그에 해당한다. 이렇게 타인을 기쁘게 하고 도와주는 것에 자존감이 매여있다. 하지만 정작 그런 자신은 어떠한가? 결국 피학적 관계는 건강에도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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