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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능 우울증 -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고장 나 버린 사람들
주디스 조셉 지음, 문선진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5년 11월
평점 :

이 책 『고기능 우울증』은 겉으로 보기에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유능하게 살아가지만,
속으로는 점점 기쁨과 활력을 잃어 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난 우울증까진 아닌데, 이상하게 늘 공허하고 피곤하다”라고 느끼는 이들에게,
지금의 상태에 정확한 이름을 붙여 주고, 거기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저자는 그 보이지 않는 위험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저널리스트이자 2019년 미스 USA에서 30년 만에 탄생한 흑인 우승자,
<체슬리 크리스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MBA와 법학 학위를 가진 지성인, 오프라 윈프리와 인터뷰할 정도로 인정받던 방송 기자,
사회적 성공의 상징처럼 보였던 그녀는, 미인대회 우승 이후 소셜 미디어에서 쏟아지는 악성 댓글과 “죽어 버리라”는 말들에 끊임없이 상처받고 있었다.
직장에서는 가면 증후군에 시달리며 자신의 성취를 믿지 못했고,
카메라 앞에서는 모든 흑인 여성을 대표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늘 따라붙었다.
사적인 관계에서도 불안정한 연애에 흔들리며,
마음속에서는 나는 부족한 사람이야라는 자책이 끊이지 않았다.
크리스트는 고기능 우울증 진단을 공개적으로 받은 첫 공인이었지만,
인생의 굴곡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2022년 1월 30일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이 비극적인 사례는 고기능 우울증이 단순한 기분 저하가 아니라,
충분히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몰아갈 수 있는, 매우 현실적인 위험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일깨운다.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저자는 스스로 쌓아 올린 압박감이
어느 순간 자기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우리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말한다.
팬데믹 초창기, 뉴욕이 멈춰 섰던 그 시기에 저자는 오히려 커리어의 정점에 있었다.
닫지 않은 진료실, 쏟아지는 방송 출연, 늘어나는 환자들, 명문대의 초청까지.
하지만 매일 환자와 가족, 직원들을 책임져야 하는 상사이자 의사, 엄마, 아내로 살다 보니,
정작 나라는 사람은 서서히 텅 비어 가고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은 의료진에게 새로운 일상에 대처하는 법을 강연하기 위해 자료를 준비하던 밤이었다.
남들에게는 대처법을 가르치면서 정작 자신은 그저 버티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저자는 조용히 중얼거린다. “나, 우울한 것 같은데….”
아침에 잘 일어나고, 일을 성실히 해 내고,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도 없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과 공허함이 끊이지 않는 상태를 경험했다.
이 모순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가 연구하기 시작한 증상이 “고기능 우울증”이다.
고기능 우울증은 일상 기능은 잘 유지되지만, 내면에서 기쁨과 활력이 사라지는 상태를 가리킨다.
늘 바쁘게 움직이지만, 쉬어도 쉰 것 같지 않고, 멈추면 공허함이 덮쳐 올 것 같아 일부러 더 자신을 몰아붙인다. 다들 이 정도는 견디고 사는 거지라고 넘기며, 자신의 고통에는 연민을 허락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런 상태의 뿌리에 트라우마, 무쾌감증, 마조히즘이 얽혀 있다고 설명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마조히즘, 특히 피학적 관계에 대한 대목이다.
마조히즘은 단지 성적 의미가 아니라, 타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해치는 행동 패턴을 뜻한다. 고기능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은 대개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내어주고, 그 대가로 사랑과 인정, 괜찮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얻으려 한다.
그리고 책에 나오는 예시는 놀라울 만큼 현실적이다.
밤새 프로젝트를 준비하느라 네 시간밖에 못 자고도 친구의 끝없는 하소연을 묵묵히 들어주는 사람, 충분히 이직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도 부당한 상사 밑에서 “그래도 여기까지 와 준 게 어디냐”며 스스로를 달래는 사람, 가족 앞에서는 자신을 깎아내리면서도 뒤에서는 돈을 빌려 달라는 친척에게 아무 말 없이 또다시 지갑을 여는 사람, 준비되지 않은 동거 요구를 받아들이고 결국 자신의 월급 대부분을 상대를 부양하는 데 쓰는 사람까지.
이 장면들에는 언제나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한쪽은 계속 주고, 다른 쪽은 계속 받기만 한다. 마조히즘적 자기희생은 상대를 자연스럽게 ‘받는 사람’의 자리에 고착시키고, 관계의 균형을 서서히 무너뜨린다. 저자는 이렇게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피학적 관계에서 쌓이는 스트레스와 압박감이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이 흡연만큼이나 해롭다고 경고하며, 지금 이 불균형을 자각하는 순간이야말로 자신을 회복시킬 첫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이 문제를 깨닫게 하기 위해 저자가 제안하는 간단한 방법이 인상적이다.
종이를 한 장 꺼내 가장 중요한 사람 한 명의 이름을 적고, 왼쪽에는 내가 그 관계를 위해 지난 한 주 동안 한 일, 오른쪽에는 그 사람이 나를 위해 한 일을 적어 보는 것. 그리고 그 종이를 시소처럼 바라보며 어느 쪽이 더 무겁게 내려가 있는지 확인해 보는 작업이다. 이 과정을 가장 가까운 세 사람에게 반복하면, 내가 어떤 패턴의 관계를 맺어 왔는지가 서서히 드러난다.
책 속에서 또 하나 눈에 남는 개념은 ‘공정한 세상 가설’이다.
우리는 착하게 살면 좋은 일이 생긴다, 나쁜 사람에겐 언젠가 벌이 돌아간다는 믿음에 기대 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선한 사람에게도 나쁜 일이 일어나고, 정직한 사람이 부당하게 해고되기도 한다.
하지만 고기능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은 유독 자신의 트라우마에 대해서는 “이건 내 잘못이야”라는 해석만을 고집한다. 죄책감과 수치심을 내면화한 채 스스로를 벌주듯 살아가며, 자신이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악순환을 끊기 위해, 트라우마와 무쾌감증, 마조히즘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위에서 자신을 돌보는 작은 실천들을 쌓아 가는 ‘5V 원칙’ 같은 회복의 도구들을 제시한다. 팬데믹과 이혼이라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마주한 끝에 이 책을 쓰게 되었다는 고백은, 개인의 고통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언어로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다소 아이러니하지만, 그 두 사건이 없었다면 이 책도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독자로서는 그 시간이 고맙게 느껴지기도 했다.
현대 사회에서 고기능 우울증을 전혀 겪지 않고 사는 사람을 찾는 것이 더 어려운 시대 같다.
늘 바쁘고, 책임감 강하고, 이 정도면 괜찮지라며 자신을 설득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특히 필요한 것 같다. 『고기능 우울증』은 지금까지 “그냥 내 성격이 문제인 것 같아”라며 넘겨버린 감정과 패턴들에 정확한 이름을 붙여 주고, 이제는 그 무게에서 조금씩 벗어나 다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갈 수 있도록 방향을 밝혀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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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키다 @ekida_library'님을 통해
'포레스트북스 출판사' 도서와 소정의 제작비를 지원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피학적masochistic 관계란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느라 겨우 네 시간도 채 잠을 못 잤음에도 피로를 버텨내며 친구가 끝도 없이 늘어놓는 시어머니 험담이나 최근에 다녀온 여행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있다거나, 충분히 이직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비합리적이고 모욕적인 상사 밑에서 일하고 참아내며 맺어가는 관계도 있다. 가족들 앞에서는 무자비하게 자신을 깎아내리면서 뒤에서는 돈을 빌려 달라고 요청하는 친척에게 돈을 빌려주면 그들에게 조용히 미소를 지어주기까지 한다. 아직 진지한 관계를 맺을 준비가 되지 않았음에도 대뜸 동거하자고 하는 연인 관계에 있는 사람과 헤어지지 못하고, 결국 자신이 힘들게 일하며 번 월급으로 상대를 부양하게 되는 관계도 그에 해당한다. 이렇게 타인을 기쁘게 하고 도와주는 것에 자존감이 매여있다. 하지만 정작 그런 자신은 어떠한가? 결국 피학적 관계는 건강에도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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