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끔 이기고 자주 집니다만 - 중환자실 간호사가 전하는 속깊은 고백
김혜진 지음 / 미다스북스 / 2024년 12월
평점 :

“가끔 이기고, 자주 집니다만.”
처음 이 제목을 봤을 때는 그저 지금의 삶에서 흔히 겪는 소소한 일상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 책은 사뭇 달랐다.
우울과 불안, 공황과 ADHD, 심지어 자해와 자살 충동까지—그 모든 것이 일상의 어떤 틈에서 드러나는지를, 저자의 치열한 일상의 기록으로 담담히 보여준다.
하루에도 수없이 밀려오는 생각을 어떻게 버텨내는지 과장 없이 전한다.
게다가 세밀한 정신과 상담 기록이 촘촘히 실려 있어,
마음이 힘든 이들에게 위로가 되고 실제로 도움이 될 책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책 초반을 넘겼을 때 저자가 쓴 글에 사실 적잖이 놀랐다.
어린 시절, 화가 난 엄마가 하얀 알약을 입에 쓸어 넣고, 몸싸움 끝에 언니가 칼을 들고 위협했던 장면이 그려진다. 특히 엄마가 극단적인 상황에서 알약을 삼키려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던 장면에선 충격적이면서도, 그녀의 정신 상태가 이미 무너진 상태였음을 짐작하게 했다.
그런 시간을 지나온 사람에게 “죽고 싶다”는 말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작은 공백도 없이 사라지고 싶다는 소망에 가까웠다. 어린 나이에 죽음을 생각하던 아이에게 삶이 얼마나 힘겹고 버거웠을까 싶어, 책을 읽는 초반부터 허무함과 무력감이 밀려왔다.
저자는 이 책에서 ‘우울감’과 ‘우울증’을 구체적으로 정의하며 분리한다.
우울한 기분이나 흥미 상실이 2주 이상 지속될 때 비로소 진단을 고려한다는 기본선을 세우고,
스스로를 확인해 볼 수 있는 몇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매일 지속되는 비관, 식욕과 무관한 체중 변화, 얕고 자주 깨는 잠, 무기력과 피로, 반복되는 자살 사고와 같은 것들이다. 이 간단한 체크는 현재의 상태에 이름을 붙여주고, 도움을 청할 타이밍을 알려 주기 위한 안내에 가깝다.
저자는 첫 장에서 ‘사라지고 싶은 욕구’를 정면으로 다루고, “정신과 진료를 받을 용기”, “간호사, 환자가 되다”, “공황 발작이 대체 뭐길래” 같은 항목으로 우울과 불안의 얼굴을 하나씩 불러낸다. 각 장의 제목만으로도 독자가 자신의 상태를 짚어볼 수 있게 한 구성 덕분에, 읽는 내내 ‘이건 나한테도 해당되는 이야기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저자는 중환자실(ICU) 간호사로 일하며, 아픔이 응축된 현장에서 몸과 마음이 먼저 닳아버리는 경험을 숨기지 않고 이야기한다. 그 고백이 무겁게만 읽히지 않는 이유는, 끝내 살아내려는 의지가 문장마다 작게나마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쌓인 감정의 잔여물, 업무 뒤에 파도처럼 밀려오는 무기력과 자책 등, 이 책이 다루는 장면들은 병동의 문을 열어 본 사람이 아니어도 충분히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특히 공황 발작을 다루는 부분은 현실적이다. 저자는 그것을 “죽을 것 같은 공포”라는 표현으로, 숨이 막히고 시야가 좁아지며 바닥에 주저앉아 심호흡을 해야만 다음 행동이 가능해지는 구체적인 순간을 묘사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구체적이고 즉각적인 실천이다. 조용하고 안전한 공간으로 옮기고, 과호흡이 올 땐 두 손을 모아 입을 가리고 천천히 숨을 쉬어 이산화탄소를 재흡수하게 해야 한다.
자기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게서 이런 증상을 보았을 때도 즉각적인 실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유용한 정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포인트는 혼자 버티지 말라는 것이다.
자살 사고·계획·시도 여부를 직접, 구체적으로 묻고 말하는 대화가 오히려 위험을 낮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말하기는 예방이고, 대화는 지연이며, 그 지연이 생존으로 이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ADHD에 관한 이야기도 실려 있다. 시간 약속을 자주 놓치고, 체계가 필요한 일을 시작·마무리하기가 어렵고,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현실이 나열된다. 저자는 약을 통해 우울과 자살 사고가 누그러져도 실수가 계속되자 병원을 옮기고 자신에게 맞는 치료자를 찾는다.
길고 느린 상담을 원했다는 고백은, 내 이야기를 간절히 들어줄 사람을 간절히 찾길 바랬다는 마음처럼 들렸다.
책의 전반적인 문체는 지나치게 감정 과잉으로만 흐르지 않고, 오히려 저자는 우울을 이기는 다정을 말하고 싶어 한다. “약 잘 챙겨 먹고, 안 좋은 생각이 들면 한 발 미루기” 같은 생활 문장이 책 전체의 호흡을 이끈다. 거창한 계획이 아니라 오늘 당장 실행 가능한 작은 문장들이라 오히려 마음이 놓인다. 스스로를 꾸짖는 대신, ‘잘 버텨 준 오늘의 나’에게 말을 걸게 만드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단순히 ‘감정 에세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뒤편에는 우울 관련 자가 점검, 공황 대처 팁, 자살 고위험군을 위한 기본 간호 정보 등 실질적 안내사항을 이야기 해준다. 자기 주변에 같은 증상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같은 정보를 알아 두면 분명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도 그런 마음으로 구체적인 정보를 언급했던 게 아닐까.
그리고 밤을 지새운 사람들을 향해 ‘새벽을 지나는 법’을 천천히 적어 둔 구성도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오래 남은 장면은 ‘지는 법’을 배우는 대목이다.
저자는 밤 근무가 끝난 새벽, 침대 모서리에 주저앉아 울고 싶은 마음을 한 발 미루기로 버텼다고 한다. 그 한 발이 다음 하루를 여는 문이 되었고, 그 작은 승리가 쌓여 가끔 이기는 사람이 되게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는 ‘자주 져도 괜찮다, 다만 끝까지 살아남자’고 말한다.
중반부의 자가평가 장면들도 기억에 남는다. 권태와 무기력이 숫자로 확인될 때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는 고백과, 예민성은 외롭고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높게 나온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이런 사실은 ‘게으름의 문제가 아니라 증상의 문제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고, 자책 대신 실천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 책의 미덕은 바로 그 전환을 돕는 데 있다.
그리고 특히 마음에 오랫동안 남는 문장은 “기억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라는 문장이다.
나는 저자가 이세상에 티끌하나 없이 사라지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한켠으로는 나를 제대로 알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이런 나를 기억해달라는 의미처럼도 느껴졌다.
사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떠올랐는데, 이 책은 주어진 상황은 바꿀 수 없어도, 그 상황에 대한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책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재회, 완성해야 할 작업, 전하고 싶은 메시지 같은 ‘의미의 좌표’가 사람을 살아야겠다고 이끌었듯이, 그녀도 ‘의지를 향한 의지’를 찾았으면 좋겠다는 갈망으로까지 이어졌다.
나는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위로는 거창한 문장이 아니라,
내 몸이 오늘 해낸 사소한 생존의 리듬에서 온다.
흔들려도 괜찮다. 다만 놓지는 말자.
우리가 가는 길에 어둠이 짙게 깔려 있어, 무섭고 외롭더라도 길은 항상 열려 있다.
그 길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계속 걸어갈 수 있다. 묵묵히 걸어 나가보자.
그러면 밝은 빛을 맞이할 수도 있고, 그 길 위에서 다정한 사람을 만날 수도 있는 것 아닐까.
내 곁에 누군가가 머물며 진정한 사랑의 기운을 불어 넣어 준다면,
내가 또 살아가야 할 순간이 생길 수 있는 것 아닐까.
인생은 끝까지 살아봐야 아는 법이다. 그러니 끝까지 한 번 살아보자.
ㅡ
'미다스북스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자살에 대한 이야기는 암묵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 같지만 의외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질문, 이를테면 자살 사고, 계획, 시도 경험, 자살 위험 요인 등에 대한 사전이 자살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 이는 대상자가 솔직한 말로 감정을 표현하도록 격려해 고통을 경감하고, 자살 위험성을 감소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대상자가 구체적인 자살 계획을 세운 경우 자살 시도로 이어지는 시간을 지연시키려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자살 사고에 대해 누군가와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등 혼자 있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 - P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