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돌보는 철학
문성훈 지음 / 을유문화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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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훈의 『나를 돌보는 철학』은 “잘 산다”의 기준을 처음부터 다시 묻는 책이다.

돈을 많이 벌면 능력은 뛰어날 수 있지만, 그게 곧바로 좋은 삶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옛말에 재승박덕才勝薄德이라 했듯 재주가 많아도 덕이 얕으면 삶이 오래 버티기 어렵다.

IMF 이후 우리 사회에 자리를 잡은 끝없는 경쟁 속에서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지 않기 위해 달려왔고, 그 과정에서 비교와 서열이 일상처럼 굳었다. 저자는 이런 분위기에서 벗어나는 길을 “자기 계발”이 아닌 “자기 돌봄”에서 찾자고 제안한다. 남이 만든 성공 공식을 따라가는 대신, 나에게 맞는 삶을 스스로 골라 만들자는 뜻이다.

이 책은 철학을 어렵게 서술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한 이유를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각자가 자기 삶을 돌보게 하려는 실천으로 풀어낸다. 공자도 평생 “어떻게 사람답게 살 것인가”를 묻고 배웠다. 진리, 정의, 자유 같은 커다란 단어도 오늘 내가 무엇을 선택하고 어디에 시간을 쓰느냐와 바로 이어진다는 점을 차근차근 보여 준다. 로마 황제 아우렐리우스가 『명상록』에서 “누구에게서 무엇을 배웠는가”를 적어 내려간 이야기, 나이가 들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 김형석의 말도 이런 맥락에서 소박하게 다가온다.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나에게 속한 것’, ‘나의 것’, 그리고 ‘나’를 나누어 생각하는 대목이다.

재산과 지위는 나에게 속해 있을 뿐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것이라 말한다.

몸과 감정은 나의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내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짚는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책임지는 중심, 그 핵심이 바로 ‘나’라고 설명한다.

이 구분을 떠올리며 하루를 돌아보면 내가 붙잡고 애쓰던 것들 중 적지 않은 부분이 사실 ‘나’ 그 자체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때부터 겉모습이나 체면을 지키는 데 쓰던 힘을 줄이고, 내가 무엇을 선택할지 차분히 생각하고 결정하는 데 힘을 쓰게 된다.

자기를 아는 일은 혼자서만 가능하지 않다는 점도 중요한 메시지다.

사회심리학자 미드는 사람들이 보는 나와 내가 주장하는 나가 다를 수 있다고 말했다. 진짜 자아는 이 둘을 맞춰 가는 과정에서 자란다. 공자가 “열다섯에 배우기를 뜻했고 서른에 섰다, 마흔에 미혹이 없었다…”라고 자신의 길을 정리한 문장도 오랜 시간 대화하고 부딪히며 자신을 다듬은 결과로 이해된다.

때로는 노자처럼 날카로운 말을 듣기도 하지만, 그런 말을 모욕으로만 여기지 않고 나를 고치는 재료로 삼는 태도가 결국 성장을 만든다.

시간에 대한 태도도 새로 생각하게 한다. 푸시킨의 시처럼 힘든 날을 견디면 기쁜 날이 온다는 믿음을 간직하되, 아리스티포스의 말처럼 지금의 기쁨을 끝없이 미루지 말라고 권한다. 고진감래만 좇다 보면 현재를 즐기는 능력이 약해진다. 그래서 책은 작은 습관부터 바꾸자고 말한다. 거울 앞에서 오늘의 나에게 안부를 묻고, 힘든 날에는 제일 먼저 내가 나를 달래고, 필요하면 주저하지 말고 전문가의 도움을 찾는 선택을 하자고 권한다. 드라마처럼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지금의 선택과 습관을 바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편이 더 현실적이다. 애니메이션 ‘캔디’의 장면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캔디는 거울 속 자신에게 미소를 건네며 어려움을 버텼고, 결국 다른 사람을 돌보는 사람이 되었다. 나를 먼저 챙기는 태도가 왜 중요한지 쉽게 이해되었다.

책 후반부는 사람들이 흔히 기대거나 갇히는 네 가지 틀을 정리한다.

성공하는 삶, 도덕을 앞세운 삶, 다수의 기준에 맞춘 정상의 삶, 종교적 삶이다.

네 가지 모두 나름의 가치를 갖지만 공통으로 미리 만들어진 규칙을 전제로 한다.

이 규칙이 지나치면 개성을 잃거나, 다름을 비정상으로 몰고 가거나, 종교에서는 의식만 남고 사랑과 자비의 핵심이 흐려지는 일이 생긴다. 저자는 이 틀을 모두 버리자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틀 때문에 나를 잃지 말자고 권한다. 여기에서 미셸 푸코의 질문이 등장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작품이 되면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작품이라는 말은 멋을 부리자는 뜻이 아니다. 내가 고른 행동과 책임이 하루의 모양을 만든다는 뜻이다. 남이 준 정답만 따르지 말고 내가 납득할 수 있는 형식을 스스로 만들어 가자는 제안이다. 더 자유롭게 살자는 말이 아니라 더 주도적으로 살자는 말이라 이해하면 쉽다.

책을 덮고 나면 당장 해 볼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아침에는 할 일 목록을 적기 전에 “오늘 지금 당장 누릴 작은 기쁨 한 가지”를 먼저 적는다. 저녁에는 노트 왼쪽에 사람들이 본 나를, 오른쪽에 내가 느낀 나를 한 줄씩 적고 둘 사이의 어긋남을 확인한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었을 때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선택이 잠깐의 평판이나 이익 때문인지, 단지 감정에 휩쓸린 건 아닌지, 아니면 내가 정말 원해서 고른 것인지 묻는다. 이런 질문만으로도 하루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을거라는 믿음이 생긴다.

결국 이 책이 알려 준 핵심은 간단하다. 잘 산다는 것은 남이 매긴 점수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오늘의 나를 조금 더 나답게 만드는 일이다. 돈과 성과는 나에게 속한 것일 뿐 언제든 바뀔 수 있지만, 내가 판단하고 선택하는 힘은 나를 끝까지 책임질 수 있다. 그 힘을 키우기 위해 하루에 하나씩 작은 실천을 쌓아 가다 보면, 언젠가 내 삶은 내가 책임지고 빚어 낸 한 편의 작품이 되어 있을 것이다.

철학이 어렵게 느껴졌던 사람에게도 이 책은 생활의 언어로 다가와, 남이 정한 성공 공식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삶을 찾고 가꾸는 법을 차근히 보여 준다. 소크라테스와 공자부터 푸코까지의 생각을 일상 예시로 풀어, 지금 여기의 나를 돌보는 습관과 스스로 삶의 형식을 세우는 용기를 얻게 한다. 오늘의 나를 조금 더 나답게 만들고 싶다면, 이 책부터 읽어 보길 권한다.


'을유문화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미셸 푸코는 성공한 삶, 도덕적 삶, 정상적 삶, 종교적 삶과 같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삶을 이야기한다. 그는 인생을 아름다운 예술 작품처럼 창조하는 삶을 제안한다. 소크라테스에게 ‘나‘를 돌본다는 것은 이성적 사고와 판단의 주체인 ’나’를 최상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내가 과연 좋은 것과 나쁜 것,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 정의로운 것과 불의한 것을 잘 분별하고 있는지 검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푸코에게 ‘나’를 돌본다는 것은 각자 자기 인생을 예술 작품처럼 창조한다는 뜻이면, 그렇기에 자기 돌봄의 방식도 다르다.
푸코는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인생에 대한 그의 문제 제기부터 들어 보자. -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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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그녀들의 도시 - 독서 여행자 곽아람의 문학 기행
곽아람 지음 / 아트북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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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으로 떠나기 전 파리 출장을 갔을 때 센 강변의 영문 서점 ‘셰익스피어&컴퍼니’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서점 입구 칠판의 글귀를 읽다가 울었다. 사라질 뻔한 이 가게를 인수해 키워 딸에게 물려준 조지 휘트먼의 말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라탱 지구의 돈키호테라 부른다…” 이웃보다 책 속 인물을 더 가깝게 느꼈다는 그의 고백을 사람들은 괴상하다고 여겼지만, 그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 마음에 깊이 공감했다. 이웃보다 책 속 인물이 더 친구처럼 느껴질 때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를 읽고 주인공 나스타시야를 현실에서 찾아 헤맸다는 휘트먼의 이야기를 전하며 같은 마음을 확인한다. 이 지점에서 곧장 『나와 그녀들의 도시』로 이어진다. 문학과 현실의 경계에 선 독자에게, 왜 자신이 그 경계에 서 있는지를 차분히 설명해 주는 기록처럼 읽힌다.

이 책은 저자가 사랑한 소설의 주인공들이 “살았던” 도시를 직접 찾아가 쓴 여행기다. 문학과 현실 사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에 가깝다. 여주인공들에 초점을 맞추어 쓰였지만 여성만을 위한 책은 아니다. 함께 읽고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싶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2018년에 나온 『바람과 함께, 스칼렛』을 넓히고 다듬은 개정증보판이라 구성은 더 단단해졌다. 작품의 원문을 인용한 이유도 분명하다. 번역을 넘어 원문 한 줄을 직접 맛보는 순간, 문장의 결이 손끝에서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가 마음을 붙잡았다. 저자는 6월의 섬을 “새잎의 초록, 민들레의 노랑, 흙의 빨강” 세 가지 빛깔로 기억할 것 같다고 쓴다. 우리나라에서 ‘빨강 머리 앤’이 공중파로 방영된 일본 애니메이션 덕분에 널리 알려졌지만, 막상 북미에서는 관심 있는 사람만 아는 작품이라는 사실도 새삼 흥미로웠다. 동행은 재미 교포 2세 ‘제이미’였다. 사촌언니의 이종사촌 여동생인 제이미와는 지난 겨울 맨해튼 코리아타운에서 디저트를 먹다가 둘 다 ‘빨강 머리 앤’ 광팬이라는 걸 알고 의기투합해 여행을 약속했다. 둘은 숙소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그린 게이블스’로 향했다. 19세기에 지어진 집은 외관을 옛 모습대로 보존했고, 내부는 소설의 묘사를 따라 충실히 꾸며 놓았다. 원래는 입장료가 있지만, 방문 당시가 캐나다 건국 150주년이라 무료로 들어갈 수 있었다. 2층에 마련된 앤의 방은 소설처럼 다락방은 아니었지만, 초록 커튼과 방문에 걸린 퍼프 소매의 갈색 드레스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매슈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퍼프 소매 드레스를 사 주는 장면을 사랑했던 독자라면 누구나 거기에서 한참을 서 있게 된다. 그린 게이블스를 돌아본 뒤에는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외가 ‘캐번디시 홈’, 뉴런던의 생가로 발을 옮겼다. ‘빨강 머리 앤’의 앤은 퀸즈 학교로 가서 교사 자격증을 따고, 레드먼드 칼리지에 진학한다. 앤은 몽고메리의 자화상에 가깝다. 몽고메리는 서른네 살에 이 소설을 썼고, 지금 그가 살던 집은 사라져 주춧돌만 남아 있지만 그가 사랑했던 사과나무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지막 ‘앤 투어’는 ‘그린 게이블스—앤 박물관’이었다. 몽고메리가 ‘은빛 수풀’이라 이름 붙인 그곳은 삼촌의 집으로, 몽고메리가 실제로 결혼식을 올린 장소다. 거실 벽난로 앞에 서자 소설 속 청혼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길버트가 병으로 깊이 앓을 때 혹여 잃을까 마음 졸이던 앤이, 마침내 길버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이 겹쳐졌다. 책은 이런 식으로 ‘문장—현장—감상’을 번갈아 보여 준다. 원문 인용과 현장 사진이 곁들여져 있어, 장면을 다시 재구성하는 재미가 크다. 책을 또 한 번 읽는 기분으로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콩코드에서는 『작은 아씨들』의 기운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었다. 저자는 루이자 메이 올컷의 집 ‘오차드 하우스’에서 오래 머문다. 거기에는 메이 올컷이 벽에 남긴 스케치, 루이자가 글을 쓰던 작은 책상, 바느질과 읽기가 함께 쌓인 생활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 앞에서 ‘마치 자매’의 성격이 왜 그렇게 결이 다른지, 가족의 생활감이 어떻게 한 권의 소설로 바뀌었는지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콩코드의 공원과 묘지, 강가를 건너며, 어린 시절 이 소설을 읽던 내가 지금의 나와 다시 마주 앉는 기분이 들었다. 오래전 책 속에서만 보던 세계가 일상 가까이 다가오면,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래서 어른이 된 뒤에도 읽기는 계속 자란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위대한 개츠비』를 따라 롱아일랜드를 읽는 대목에서는 해안도로의 넓은 잔디와 담장, 만에 비친 불빛이 곧바로 장면을 불러낸다. 웨스트 에그와 이스트 에그의 실제 배경이 된 곳들이 서로 마주 보는 지형이라는 설명을 읽으면, 왜 녹색 불빛이 그렇게 멀고도 가까운 표식이었는지 이해된다. 물결이 잔잔히 흔들릴 때 개츠비가 손을 뻗던 그 마지막 동작이 눈앞에 선해진다. 이처럼 책은 ‘지형—상징—장면’을 차분히 연결해 준다. 뉴욕에서는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떠올리며 그리니치빌리지를 걷는다. 벽돌 담벼락에 붙은 담쟁이, 좁은 골목의 바람, 늦은 오후 창문에 비친 빛을 따라가다 보면, 작은 잎사귀 하나가 어떻게 삶을 붙잡는 믿음이 되는지 체감한다.

뉴올리언스에서는 포크너의 그림자를 좇는다. 프렌치쿼터의 오래된 골목, 습하고 달큰한 공기, 느리게 흐르는 재즈 소리 속에서 문장은 자연스레 속도를 늦춘다. 작가는 소설이 태어난 도시의 기운을 먼저 보여 준 뒤, 왜 그 문장이 그곳에서 나왔는지 설명한다. 그래서 ‘성지순례’로 사진만 남기는 여행기가 아니라, 문장이 만들어지는 조건을 이해하는 산문이 된다. 이어 키웨스트와 아바나에서는 헤밍웨이를 만난다. 키웨스트의 집에서는 마당을 어슬렁거리는 여섯 발가락 고양이와 2층 집필실, 창 너머로 보이는 등대를 함께 본다. 아바나 외곽의 ‘핀카 비히아’에서는 그의 타자기와 책장, 낚싯배 ‘필라르’의 흔적을 따라가며 『노인과 바다』의 문장들이 물과 바람의 결을 얻어 되살아나는 것을 느낀다. 이 연쇄가 이어질수록 질문 하나가 또렷해진다. 우리를 움직이는 건 이야기일까, 길일까. 결론은 단순하다. 둘이 번갈아 서로를 움직인다. 읽은 이야기가 내 발걸음을 바꾸고, 내가 직접 걸어 본 길이 다시 내 읽기의 방향을 바꾼다.

각 장을 이어갈 마다 다시 읽고 싶은 책 목록이 늘어났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골목 그늘과 겹쳐 읽고 싶어졌고,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장면을 바다 물결과 함께 떠올리고 싶어졌다. 언젠가 키웨스트에 가게 된다면 『노인과 바다』를 들고 갈 것이다. 이건 단순한 추억놀이가 아니다. 읽기의 속도와 방향을 조정하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저자가 오래 사랑한 문학의 한 장면이 현실 속에서 다시 숨 쉬는 순간을 담은 책이다. 저자의 기록은 그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책과 삶 사이의 거리를 좁혀, 우리가 사랑한 문장과 우리가 서 있는 장소가 겹치면 오늘 무엇을 먼저 할지가 분명해진다. 다음에 펼칠 책, 걸어볼 거리, 붙잡을 일과 내려놓을 일이 스스로 갈라지고, 망설임 대신 한 걸음을 내딛게 된다.

이 책은 어릴 적에 읽었거나, 저자가 언급한 책을 찾아서 읽어 보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다음에 시간이 된다면 저자가 언급했던 책을 리스트로 정리해서 하나씩 읽어 보고 싶다.

그리고 상황이 된다면 문학 속에 등장했던 가보고 싶은 장소를 버킷리스트에 담아, 저자처럼 언젠가 그 장소를 찾아가보고 싶다.

'아트북스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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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놀 인스타 @hagonolza



‘빨강 머리앤‘의 배경인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는 내가 가장 오래도록 마음속에 그려온 곳이었다.
나는 애니메이션보다 책을 먼저 접했다. 열한 살 앤이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 친구하기 힘들 것 같아서 빨리 열한 살이 되기를 바랐던 그 아홉 살 무렵부터 나는 앤이 있는 그곳, 애번리, 그린케이블즈, 그러니까 캐나다의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에 가고 싶었다. 사람들이 앤을 좋아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내게 앤은 상상력의 결정체 같은 인물이었다. 어린 날 내게는 현실의 고난을 상상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걸 알려준 두 친구가 있었으니 하나는 빨강 머리 앤이었고, 또하나는 ’소공녀‘의 새라였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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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기고 자주 집니다만 - 중환자실 간호사가 전하는 속깊은 고백
김혜진 지음 / 미다스북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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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기고, 자주 집니다만.”

처음 이 제목을 봤을 때는 그저 지금의 삶에서 흔히 겪는 소소한 일상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 책은 사뭇 달랐다.

우울과 불안, 공황과 ADHD, 심지어 자해와 자살 충동까지—그 모든 것이 일상의 어떤 틈에서 드러나는지를, 저자의 치열한 일상의 기록으로 담담히 보여준다.

하루에도 수없이 밀려오는 생각을 어떻게 버텨내는지 과장 없이 전한다.

게다가 세밀한 정신과 상담 기록이 촘촘히 실려 있어,

마음이 힘든 이들에게 위로가 되고 실제로 도움이 될 책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책 초반을 넘겼을 때 저자가 쓴 글에 사실 적잖이 놀랐다.

어린 시절, 화가 난 엄마가 하얀 알약을 입에 쓸어 넣고, 몸싸움 끝에 언니가 칼을 들고 위협했던 장면이 그려진다. 특히 엄마가 극단적인 상황에서 알약을 삼키려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던 장면에선 충격적이면서도, 그녀의 정신 상태가 이미 무너진 상태였음을 짐작하게 했다.

그런 시간을 지나온 사람에게 “죽고 싶다”는 말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작은 공백도 없이 사라지고 싶다는 소망에 가까웠다. 어린 나이에 죽음을 생각하던 아이에게 삶이 얼마나 힘겹고 버거웠을까 싶어, 책을 읽는 초반부터 허무함과 무력감이 밀려왔다.

저자는 이 책에서 ‘우울감’과 ‘우울증’을 구체적으로 정의하며 분리한다.

우울한 기분이나 흥미 상실이 2주 이상 지속될 때 비로소 진단을 고려한다는 기본선을 세우고,

스스로를 확인해 볼 수 있는 몇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매일 지속되는 비관, 식욕과 무관한 체중 변화, 얕고 자주 깨는 잠, 무기력과 피로, 반복되는 자살 사고와 같은 것들이다. 이 간단한 체크는 현재의 상태에 이름을 붙여주고, 도움을 청할 타이밍을 알려 주기 위한 안내에 가깝다.

저자는 첫 장에서 ‘사라지고 싶은 욕구’를 정면으로 다루고, “정신과 진료를 받을 용기”, “간호사, 환자가 되다”, “공황 발작이 대체 뭐길래” 같은 항목으로 우울과 불안의 얼굴을 하나씩 불러낸다. 각 장의 제목만으로도 독자가 자신의 상태를 짚어볼 수 있게 한 구성 덕분에, 읽는 내내 ‘이건 나한테도 해당되는 이야기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저자는 중환자실(ICU) 간호사로 일하며, 아픔이 응축된 현장에서 몸과 마음이 먼저 닳아버리는 경험을 숨기지 않고 이야기한다. 그 고백이 무겁게만 읽히지 않는 이유는, 끝내 살아내려는 의지가 문장마다 작게나마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쌓인 감정의 잔여물, 업무 뒤에 파도처럼 밀려오는 무기력과 자책 등, 이 책이 다루는 장면들은 병동의 문을 열어 본 사람이 아니어도 충분히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특히 공황 발작을 다루는 부분은 현실적이다. 저자는 그것을 “죽을 것 같은 공포”라는 표현으로, 숨이 막히고 시야가 좁아지며 바닥에 주저앉아 심호흡을 해야만 다음 행동이 가능해지는 구체적인 순간을 묘사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구체적이고 즉각적인 실천이다. 조용하고 안전한 공간으로 옮기고, 과호흡이 올 땐 두 손을 모아 입을 가리고 천천히 숨을 쉬어 이산화탄소를 재흡수하게 해야 한다.

자기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게서 이런 증상을 보았을 때도 즉각적인 실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유용한 정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포인트는 혼자 버티지 말라는 것이다.

자살 사고·계획·시도 여부를 직접, 구체적으로 묻고 말하는 대화가 오히려 위험을 낮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말하기는 예방이고, 대화는 지연이며, 그 지연이 생존으로 이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ADHD에 관한 이야기도 실려 있다. 시간 약속을 자주 놓치고, 체계가 필요한 일을 시작·마무리하기가 어렵고,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현실이 나열된다. 저자는 약을 통해 우울과 자살 사고가 누그러져도 실수가 계속되자 병원을 옮기고 자신에게 맞는 치료자를 찾는다.

길고 느린 상담을 원했다는 고백은, 내 이야기를 간절히 들어줄 사람을 간절히 찾길 바랬다는 마음처럼 들렸다.

책의 전반적인 문체는 지나치게 감정 과잉으로만 흐르지 않고, 오히려 저자는 우울을 이기는 다정을 말하고 싶어 한다. “약 잘 챙겨 먹고, 안 좋은 생각이 들면 한 발 미루기” 같은 생활 문장이 책 전체의 호흡을 이끈다. 거창한 계획이 아니라 오늘 당장 실행 가능한 작은 문장들이라 오히려 마음이 놓인다. 스스로를 꾸짖는 대신, ‘잘 버텨 준 오늘의 나’에게 말을 걸게 만드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단순히 ‘감정 에세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뒤편에는 우울 관련 자가 점검, 공황 대처 팁, 자살 고위험군을 위한 기본 간호 정보 등 실질적 안내사항을 이야기 해준다. 자기 주변에 같은 증상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같은 정보를 알아 두면 분명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도 그런 마음으로 구체적인 정보를 언급했던 게 아닐까.

그리고 밤을 지새운 사람들을 향해 ‘새벽을 지나는 법’을 천천히 적어 둔 구성도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오래 남은 장면은 ‘지는 법’을 배우는 대목이다.

저자는 밤 근무가 끝난 새벽, 침대 모서리에 주저앉아 울고 싶은 마음을 한 발 미루기로 버텼다고 한다. 그 한 발이 다음 하루를 여는 문이 되었고, 그 작은 승리가 쌓여 가끔 이기는 사람이 되게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는 ‘자주 져도 괜찮다, 다만 끝까지 살아남자’고 말한다.

중반부의 자가평가 장면들도 기억에 남는다. 권태와 무기력이 숫자로 확인될 때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는 고백과, 예민성은 외롭고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높게 나온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이런 사실은 ‘게으름의 문제가 아니라 증상의 문제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고, 자책 대신 실천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 책의 미덕은 바로 그 전환을 돕는 데 있다.

그리고 특히 마음에 오랫동안 남는 문장은 “기억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라는 문장이다.

나는 저자가 이세상에 티끌하나 없이 사라지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한켠으로는 나를 제대로 알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이런 나를 기억해달라는 의미처럼도 느껴졌다.

사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떠올랐는데, 이 책은 주어진 상황은 바꿀 수 없어도, 그 상황에 대한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책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재회, 완성해야 할 작업, 전하고 싶은 메시지 같은 ‘의미의 좌표’가 사람을 살아야겠다고 이끌었듯이, 그녀도 ‘의지를 향한 의지’를 찾았으면 좋겠다는 갈망으로까지 이어졌다.

나는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위로는 거창한 문장이 아니라,

내 몸이 오늘 해낸 사소한 생존의 리듬에서 온다.

흔들려도 괜찮다. 다만 놓지는 말자.

우리가 가는 길에 어둠이 짙게 깔려 있어, 무섭고 외롭더라도 길은 항상 열려 있다.

그 길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계속 걸어갈 수 있다. 묵묵히 걸어 나가보자.

그러면 밝은 빛을 맞이할 수도 있고, 그 길 위에서 다정한 사람을 만날 수도 있는 것 아닐까.

내 곁에 누군가가 머물며 진정한 사랑의 기운을 불어 넣어 준다면,

내가 또 살아가야 할 순간이 생길 수 있는 것 아닐까.

인생은 끝까지 살아봐야 아는 법이다. 그러니 끝까지 한 번 살아보자.


'미다스북스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자살에 대한 이야기는 암묵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 같지만 의외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질문,
이를테면 자살 사고, 계획, 시도 경험, 자살 위험 요인 등에 대한 사전이 자살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 이는 대상자가 솔직한 말로 감정을 표현하도록 격려해 고통을 경감하고, 자살 위험성을 감소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대상자가 구체적인 자살 계획을 세운 경우 자살 시도로 이어지는 시간을 지연시키려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자살 사고에 대해 누군가와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등 혼자 있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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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로 가는 길
L. 프랭크 바움 지음, 존 R. 닐 그림, 강석주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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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는 집 근처에서 털이 복슬복슬한 아저씨를 만난다. 길을 묻던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둘은 자연스레 옆길로 접어든다. 갈림길이 주르륵 이어진 곳에서 도로시는 잠깐 숨을 고른 뒤 말한다. “일곱은 행운의 숫자니까 일곱 번째 길로 가자.” 토토가 꼬리를 흔들고, 아저씨는 주머니에서 반짝이는 자석을 꺼낸다. 사랑을 끌어당기는 ‘사랑자석’이다. “이걸 지니고 있으면 사람들이 좀 더 친절해질 거야.” 그렇게 세 친구의 모험이 시작된다.

비가 그치고 공기가 맑아졌을 때, 길가에서 조용히 앉아 있는 소년을 만난다. 이름은 ‘빛나는 단추’. 말수는 적지만 눈빛이 환하다. 도로시가 먼저 손을 내민다. “같이 갈래?” 곧 무지개 위에서 한 소녀가 빙글빙글 내려온다. “나는 폴리크롬, 무지개의 딸이야.” 잠시 하늘의 길을 잃었다며 함께 걷자고 한다. 이제 일행은 넷. 낯선 길도 덜 무섭다. 웃음과 발자국이 보폭을 맞춘다.

첫 번째로 도착한 곳은 여우들이 사는 마을이다. 멀리서 보면 사람과 비슷하지만, 가까이 보면 귀가 뾰족하고 꼬리가 살랑인다. 규칙도 까다롭다. 잠시 머무는 사이, ‘빛나는 단추’의 머리가 여우처럼 변한다. 모두 깜짝 놀란다. 이곳에서는 마을의 규칙이 사람의 모습까지 바꿔 버린다. 서둘러 길을 재촉하니 이번엔 당나귀들이 사는 곳이다. 이번에는 털북숭이 아저씨의 머리가 당나귀로 변한다. 다행히 숲속에서 “진실의 못”을 만난다. 이 물로 씻으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지만 거짓말은 할 수 없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차례로 손과 얼굴을 씻자 여우 귀와 당나귀 귀가 사라진다. 폴리크롬이 말한다. “정직하면, 다시 자기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어.”

길은 들판과 숲을 번갈아 지난다. 어느 고개에서 그들은 머리를 떼어 던지는 무서운 스쿠들러를 만난다. “수프를 끓일 거야!” 스쿠들러가 위협하며 머리를 휙휙 던진다. 도로시는 짧게 외친다. “말은 적게, 몸은 낮게!” 털북숭이 아저씨가 사랑자석을 휘두르자 스쿠들러의 움직임이 잠깐 느려진다. 그 틈에 모두가 바위 틈으로 빠르게 몸을 숨기고, 다시 골짜기 너머로 달린다. 가슴이 쿵쾅대지만, 서로 손을 꼭 잡은 덕분에 무사하다.

멀리 초록 성벽이 보인다. 에메랄드시, 오즈마가 사는 곳이다. 사실 이 여정은 우연이 아니었다. 오즈마는 자신의 생일에 도로시를 초대하고 싶었고, 그래서 길이 살짝 비틀어졌던 것이다. 성문이 열리자 반가운 얼굴들이 달려 나온다. 양철 나무꾼, 허수아비, 겁쟁이 사자, 호박머리 잭까지. 모두 “왔구나!” 하고 맞아 준다. 성대한 생일 연회가 열리고 일행은 오늘의 모험을 차례로 들려준다. 여우 마을에서의 실수, 당나귀 마을에서의 웃음, 진실의 못에서의 맑은 물, 스쿠들러를 피해 달리던 순간까지. 이야기 끝마다 웃음이 번진다. 폴리크롬은 창가에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얇은 구름 사이로 무지개의 길이 다시 열린다. “이젠 돌아가야 해. 하지만 오늘의 색은 오래 남을 거야.” 친구들은 손을 흔들며 작별한다.

나는 이 이야기에서 “큰 싸움이 없어도 괜찮다”는 걸 느꼈다.

크게 터지는 사건이 없어도, 친구들과 발맞춰 걸으며 서로 숨을 맞추는 것만으로 마음이 따뜻해진다.

저자가 보여 주고 싶었던 건 “누가 이겼나”가 아니라 “누가 함께였나”이다.

그래서 마지막 축제는 끝이 아니라, 우리가 왜 같이 걸었는지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털북숭이 아저씨의 사랑자석은 마법 같지만, 사실 친절한 태도와 비슷하다.

먼저 웃고 먼저 인사하면, 굳게 닫힌 문도 조금씩 열린다.

진실의 못은 솔직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뜻을 가진다.

거짓말을 멈추고 사실을 말하면,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이 다시 보인다.

용기는 거창한 게 아니다. 무서울 때 친구 손을 더 꽉 잡는 것, 그게 바로 용기다.

일곱 번째 길은, 지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택을 고르는 일과 닮았다.

우연처럼 보인 초대에도 도로시는 “그래, 가 볼게” 하고 답한다.

그 한마디가 곧 도로시의 리더십이다. 두려워도 한 걸음 내딛고, 친구들과 끝까지 함께 걷는 마음이다.

이 책의 형식도 재미 있다.

이 판본은 장면마다 종이 색이 바뀌어 마치 다른 조명을 켠 듯 분위기가 달라진다.

버터필드로 가는 길 노랑, 짐승들의 도시 파랑, 진실연못의 주황, 에메랄드시의 초록

색의 변화로 장면을 또렷하게 기억하게 하고, 과장되지 않은 환상은 오히려 더 깊이 스며든다.

분량도 잠들기 전에 한 꼭지씩 읽기 좋아, 부담 없이 천천히 즐길 수 있다.

책을 덮고 나면 두 가지가 또렷하게 남는다.

하나는 오래된 친구들을 다시 만난 듯한 따뜻한 반가움,

다른 하나는 친절과 정직, 그리고 작은 용기가 있으면 내일의 길도 두렵지 않다는 확신이다.

길에서 잠시 나를 잃을 때가 와도, 진실의 물로 마음을 씻고(솔직해지고) 서로에게 미소를 건네면 우리는 다시 우리 모습으로 돌아와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 책이 말하는 핵심은 목적지보다 ‘같이 걷는 마음’이며,

그 마음을 움직이는 진짜 마법은 친절·정직·작은 용기라는 것이다.


북스타그램_우주 @woojoos_story 모집,

지만지 출판사 지원으로 우주서평단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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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는 서툴수록 좋다
이정훈 지음 / 책과강연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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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저자는 오랫동안 마음에 걸렸던 순간들을 메모처럼 적어두었고, 그 조각들을 한 데 모아 지금의 책으로 엮었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책장을 펼치면 완성된 철학서나 감성에 힘을 준 에세이라기보다,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천천히 발효된 생각들을 조용히 넘겨보는 느낌이 든다. 책 전체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아니라 원하는 페이지를 펼쳐 아무 대목이나 읽어도 부담이 없다.

저자는 삼십 대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과 싸우며 살았다고 한다.

그때는 삶이라는 것이 노력하면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사십 대가 되자 생각이 달라졌다고 고백한다. 완벽하게 살려고 애쓰기보다는, 주어진 현실을 나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쪽이 훨씬 낫다는 걸 깨달았다고. 결국 삶을 결정하는 건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보다 ‘그 일을 어떻게 해석하며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이 문장을 읽으며 나 역시 내가 지나온 과거를 되짚어 보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책에서 기억나는 장면은 ‘찬밥’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느 날 친구가 자신을 “냉장고에 말라붙은 찬밥” 같다고 말했을 때, 저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 어떤 위로의 말도 그 절망에 닿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날은 그저 옆에 머물렀다. 세월이 흐른 뒤, 삶을 다시 붙잡고 선 친구에게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 찬밥, 라면에 말아 먹으면 맛있어.” 결국 이 말도 전하지 못한 말이 되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건네 보는 따뜻한 위로가 담긴 말이었다.

이후에도 말보다 태도가 더 중요한 순간들을 계속 보여준다.

사람에게 다칠 일이 물건에 다칠 때보다 훨씬 많았다는 고백과 마음에 든 멍은 몸의 멍보다 훨씬 오래간다는 이야기, 그래서 때로는 단 두 평이라도 나만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고백도 그랬다.

특히 새벽 네 시마다 들려오던 어머니의 불경 소리가 기도가 아니라 ‘오늘을 버티려는 의지의 소리’였다는 고백은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 구절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하루를 버티고 있으며, 그 방식은 꼭 거창한 말이나 대단한 각오일 필요도 없다.

묵묵히 반복되는 행동 하나에도 위로가 스며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아들이 다니던 복싱장에서 5학년 생과 6학년 생의 스파링 대결을 통해 깨달은 이야기가 기억난다. 이 링 위의 대결은 누가 더 강한지를 증명하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의 힘을 확인하고 조절해가는 장면이 펼쳐졌다. 상대를 아프게 한 미안함을 눈빛과 자세로 표현하는 법, 자신이 더 강하다는 걸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약한 상대를 배려하는 법을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며 저자는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떠올렸다. 나이를 먹는 것, 몸집이 커지는 일이 아니라 힘을 제때 멈출 줄 아는 것, 누군가의 고통을 눈치채고 리듬을 맞춰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결국 위로란 화려한 말이 아니라 바로 그런 태도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저자가 강조하는 메시지 가운데 가장 강하게 다가온 문장이 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감정을 미루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 감정을 끝내 드러내지 않는 것은 결코 건강하지 않다.” 이 문장은 위로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위로란 슬픔의 우선순위를 매기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감정이 같은 자리에서 동시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하는 행위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우리는 위로를 ‘말’로 해결하려 하지만, 정말 필요한 것은 완벽한 한 문장이 아니라,

옆에 머물러 주겠다는 의지 그 자체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어쩌면 좋은 위로란 준비된 문장이 아니라, 말이 어색하게 꼬이더라도 상대의 마음을 쉽게 판단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 있어주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아니, 말조차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는 순간에야 비로소 진짜 위로가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상대는 그 침묵을 통해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차릴테니까 말이다.

결국 위로란 말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떠나지 않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이 내게 남긴 가장 큰 위로는 그런 확신이었다.

서툴러도 괜찮다. 머뭇거려도 괜찮다.

그 마음이 진짜라면, 이미 그것으로 충분한 위로가 된다는 것이다.

아들이 다니는 복싱장에 2라운드에 5학년 아이와 6학년 아이의 복싱 대결이 있었다.

이날 링 위에서 벌어진 일은 관계의 아름다운 일면을 보여주었다. 상대를 아프게 한 미안함을 몸으로 표현하는 법, 자신이 더 강하다는 과시하지 않고 오히려 약한 상대를 배려하는 법을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것은 나이를 먹는 것도, 몸이 커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약속한 것을 끝까지 지키려는 의지, 상대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추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그날이 마음에 남는 이유는, 힘을 함부로 쓰지 않는 절데, 약해도 끝까지 해내려는 의지, 무엇보다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뭉클하게 남아서이지 않았을까.


'책과강연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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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이란 미래의 것이다. 손에 잡히지 않는 시간에 대한 감정이니까. 당연히 현재에게 미래의 불안을 극복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불안의 극복’이라는 무모한 시도 대신 ’불안과의 동거‘라는 현실적인 방법을 택하게 됐다. 그것은 의도라기보다는, 긴 시간의 경험으로 도달한 자연스러운 전향이었다. 불안을 내 안으로 들여야, 비로소 불안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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