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그녀들의 도시 - 독서 여행자 곽아람의 문학 기행
곽아람 지음 / 아트북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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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으로 떠나기 전 파리 출장을 갔을 때 센 강변의 영문 서점 ‘셰익스피어&컴퍼니’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서점 입구 칠판의 글귀를 읽다가 울었다. 사라질 뻔한 이 가게를 인수해 키워 딸에게 물려준 조지 휘트먼의 말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라탱 지구의 돈키호테라 부른다…” 이웃보다 책 속 인물을 더 가깝게 느꼈다는 그의 고백을 사람들은 괴상하다고 여겼지만, 그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 마음에 깊이 공감했다. 이웃보다 책 속 인물이 더 친구처럼 느껴질 때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를 읽고 주인공 나스타시야를 현실에서 찾아 헤맸다는 휘트먼의 이야기를 전하며 같은 마음을 확인한다. 이 지점에서 곧장 『나와 그녀들의 도시』로 이어진다. 문학과 현실의 경계에 선 독자에게, 왜 자신이 그 경계에 서 있는지를 차분히 설명해 주는 기록처럼 읽힌다.

이 책은 저자가 사랑한 소설의 주인공들이 “살았던” 도시를 직접 찾아가 쓴 여행기다. 문학과 현실 사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에 가깝다. 여주인공들에 초점을 맞추어 쓰였지만 여성만을 위한 책은 아니다. 함께 읽고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싶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2018년에 나온 『바람과 함께, 스칼렛』을 넓히고 다듬은 개정증보판이라 구성은 더 단단해졌다. 작품의 원문을 인용한 이유도 분명하다. 번역을 넘어 원문 한 줄을 직접 맛보는 순간, 문장의 결이 손끝에서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가 마음을 붙잡았다. 저자는 6월의 섬을 “새잎의 초록, 민들레의 노랑, 흙의 빨강” 세 가지 빛깔로 기억할 것 같다고 쓴다. 우리나라에서 ‘빨강 머리 앤’이 공중파로 방영된 일본 애니메이션 덕분에 널리 알려졌지만, 막상 북미에서는 관심 있는 사람만 아는 작품이라는 사실도 새삼 흥미로웠다. 동행은 재미 교포 2세 ‘제이미’였다. 사촌언니의 이종사촌 여동생인 제이미와는 지난 겨울 맨해튼 코리아타운에서 디저트를 먹다가 둘 다 ‘빨강 머리 앤’ 광팬이라는 걸 알고 의기투합해 여행을 약속했다. 둘은 숙소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그린 게이블스’로 향했다. 19세기에 지어진 집은 외관을 옛 모습대로 보존했고, 내부는 소설의 묘사를 따라 충실히 꾸며 놓았다. 원래는 입장료가 있지만, 방문 당시가 캐나다 건국 150주년이라 무료로 들어갈 수 있었다. 2층에 마련된 앤의 방은 소설처럼 다락방은 아니었지만, 초록 커튼과 방문에 걸린 퍼프 소매의 갈색 드레스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매슈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퍼프 소매 드레스를 사 주는 장면을 사랑했던 독자라면 누구나 거기에서 한참을 서 있게 된다. 그린 게이블스를 돌아본 뒤에는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외가 ‘캐번디시 홈’, 뉴런던의 생가로 발을 옮겼다. ‘빨강 머리 앤’의 앤은 퀸즈 학교로 가서 교사 자격증을 따고, 레드먼드 칼리지에 진학한다. 앤은 몽고메리의 자화상에 가깝다. 몽고메리는 서른네 살에 이 소설을 썼고, 지금 그가 살던 집은 사라져 주춧돌만 남아 있지만 그가 사랑했던 사과나무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지막 ‘앤 투어’는 ‘그린 게이블스—앤 박물관’이었다. 몽고메리가 ‘은빛 수풀’이라 이름 붙인 그곳은 삼촌의 집으로, 몽고메리가 실제로 결혼식을 올린 장소다. 거실 벽난로 앞에 서자 소설 속 청혼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길버트가 병으로 깊이 앓을 때 혹여 잃을까 마음 졸이던 앤이, 마침내 길버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이 겹쳐졌다. 책은 이런 식으로 ‘문장—현장—감상’을 번갈아 보여 준다. 원문 인용과 현장 사진이 곁들여져 있어, 장면을 다시 재구성하는 재미가 크다. 책을 또 한 번 읽는 기분으로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콩코드에서는 『작은 아씨들』의 기운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었다. 저자는 루이자 메이 올컷의 집 ‘오차드 하우스’에서 오래 머문다. 거기에는 메이 올컷이 벽에 남긴 스케치, 루이자가 글을 쓰던 작은 책상, 바느질과 읽기가 함께 쌓인 생활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 앞에서 ‘마치 자매’의 성격이 왜 그렇게 결이 다른지, 가족의 생활감이 어떻게 한 권의 소설로 바뀌었는지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콩코드의 공원과 묘지, 강가를 건너며, 어린 시절 이 소설을 읽던 내가 지금의 나와 다시 마주 앉는 기분이 들었다. 오래전 책 속에서만 보던 세계가 일상 가까이 다가오면,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래서 어른이 된 뒤에도 읽기는 계속 자란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위대한 개츠비』를 따라 롱아일랜드를 읽는 대목에서는 해안도로의 넓은 잔디와 담장, 만에 비친 불빛이 곧바로 장면을 불러낸다. 웨스트 에그와 이스트 에그의 실제 배경이 된 곳들이 서로 마주 보는 지형이라는 설명을 읽으면, 왜 녹색 불빛이 그렇게 멀고도 가까운 표식이었는지 이해된다. 물결이 잔잔히 흔들릴 때 개츠비가 손을 뻗던 그 마지막 동작이 눈앞에 선해진다. 이처럼 책은 ‘지형—상징—장면’을 차분히 연결해 준다. 뉴욕에서는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떠올리며 그리니치빌리지를 걷는다. 벽돌 담벼락에 붙은 담쟁이, 좁은 골목의 바람, 늦은 오후 창문에 비친 빛을 따라가다 보면, 작은 잎사귀 하나가 어떻게 삶을 붙잡는 믿음이 되는지 체감한다.

뉴올리언스에서는 포크너의 그림자를 좇는다. 프렌치쿼터의 오래된 골목, 습하고 달큰한 공기, 느리게 흐르는 재즈 소리 속에서 문장은 자연스레 속도를 늦춘다. 작가는 소설이 태어난 도시의 기운을 먼저 보여 준 뒤, 왜 그 문장이 그곳에서 나왔는지 설명한다. 그래서 ‘성지순례’로 사진만 남기는 여행기가 아니라, 문장이 만들어지는 조건을 이해하는 산문이 된다. 이어 키웨스트와 아바나에서는 헤밍웨이를 만난다. 키웨스트의 집에서는 마당을 어슬렁거리는 여섯 발가락 고양이와 2층 집필실, 창 너머로 보이는 등대를 함께 본다. 아바나 외곽의 ‘핀카 비히아’에서는 그의 타자기와 책장, 낚싯배 ‘필라르’의 흔적을 따라가며 『노인과 바다』의 문장들이 물과 바람의 결을 얻어 되살아나는 것을 느낀다. 이 연쇄가 이어질수록 질문 하나가 또렷해진다. 우리를 움직이는 건 이야기일까, 길일까. 결론은 단순하다. 둘이 번갈아 서로를 움직인다. 읽은 이야기가 내 발걸음을 바꾸고, 내가 직접 걸어 본 길이 다시 내 읽기의 방향을 바꾼다.

각 장을 이어갈 마다 다시 읽고 싶은 책 목록이 늘어났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골목 그늘과 겹쳐 읽고 싶어졌고,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장면을 바다 물결과 함께 떠올리고 싶어졌다. 언젠가 키웨스트에 가게 된다면 『노인과 바다』를 들고 갈 것이다. 이건 단순한 추억놀이가 아니다. 읽기의 속도와 방향을 조정하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저자가 오래 사랑한 문학의 한 장면이 현실 속에서 다시 숨 쉬는 순간을 담은 책이다. 저자의 기록은 그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책과 삶 사이의 거리를 좁혀, 우리가 사랑한 문장과 우리가 서 있는 장소가 겹치면 오늘 무엇을 먼저 할지가 분명해진다. 다음에 펼칠 책, 걸어볼 거리, 붙잡을 일과 내려놓을 일이 스스로 갈라지고, 망설임 대신 한 걸음을 내딛게 된다.

이 책은 어릴 적에 읽었거나, 저자가 언급한 책을 찾아서 읽어 보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다음에 시간이 된다면 저자가 언급했던 책을 리스트로 정리해서 하나씩 읽어 보고 싶다.

그리고 상황이 된다면 문학 속에 등장했던 가보고 싶은 장소를 버킷리스트에 담아, 저자처럼 언젠가 그 장소를 찾아가보고 싶다.

'아트북스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빨강 머리앤‘의 배경인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는 내가 가장 오래도록 마음속에 그려온 곳이었다.
나는 애니메이션보다 책을 먼저 접했다. 열한 살 앤이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 친구하기 힘들 것 같아서 빨리 열한 살이 되기를 바랐던 그 아홉 살 무렵부터 나는 앤이 있는 그곳, 애번리, 그린케이블즈, 그러니까 캐나다의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에 가고 싶었다. 사람들이 앤을 좋아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내게 앤은 상상력의 결정체 같은 인물이었다. 어린 날 내게는 현실의 고난을 상상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걸 알려준 두 친구가 있었으니 하나는 빨강 머리 앤이었고, 또하나는 ’소공녀‘의 새라였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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