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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는 서툴수록 좋다
이정훈 지음 / 책과강연 / 2025년 9월
평점 :

이정훈 저자는 오랫동안 마음에 걸렸던 순간들을 메모처럼 적어두었고, 그 조각들을 한 데 모아 지금의 책으로 엮었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책장을 펼치면 완성된 철학서나 감성에 힘을 준 에세이라기보다,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천천히 발효된 생각들을 조용히 넘겨보는 느낌이 든다. 책 전체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아니라 원하는 페이지를 펼쳐 아무 대목이나 읽어도 부담이 없다.
저자는 삼십 대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과 싸우며 살았다고 한다.
그때는 삶이라는 것이 노력하면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사십 대가 되자 생각이 달라졌다고 고백한다. 완벽하게 살려고 애쓰기보다는, 주어진 현실을 나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쪽이 훨씬 낫다는 걸 깨달았다고. 결국 삶을 결정하는 건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보다 ‘그 일을 어떻게 해석하며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이 문장을 읽으며 나 역시 내가 지나온 과거를 되짚어 보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책에서 기억나는 장면은 ‘찬밥’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느 날 친구가 자신을 “냉장고에 말라붙은 찬밥” 같다고 말했을 때, 저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 어떤 위로의 말도 그 절망에 닿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날은 그저 옆에 머물렀다. 세월이 흐른 뒤, 삶을 다시 붙잡고 선 친구에게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 찬밥, 라면에 말아 먹으면 맛있어.” 결국 이 말도 전하지 못한 말이 되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건네 보는 따뜻한 위로가 담긴 말이었다.
이후에도 말보다 태도가 더 중요한 순간들을 계속 보여준다.
사람에게 다칠 일이 물건에 다칠 때보다 훨씬 많았다는 고백과 마음에 든 멍은 몸의 멍보다 훨씬 오래간다는 이야기, 그래서 때로는 단 두 평이라도 나만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고백도 그랬다.
특히 새벽 네 시마다 들려오던 어머니의 불경 소리가 기도가 아니라 ‘오늘을 버티려는 의지의 소리’였다는 고백은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 구절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하루를 버티고 있으며, 그 방식은 꼭 거창한 말이나 대단한 각오일 필요도 없다.
묵묵히 반복되는 행동 하나에도 위로가 스며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아들이 다니던 복싱장에서 5학년 생과 6학년 생의 스파링 대결을 통해 깨달은 이야기가 기억난다. 이 링 위의 대결은 누가 더 강한지를 증명하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의 힘을 확인하고 조절해가는 장면이 펼쳐졌다. 상대를 아프게 한 미안함을 눈빛과 자세로 표현하는 법, 자신이 더 강하다는 걸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약한 상대를 배려하는 법을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며 저자는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떠올렸다. 나이를 먹는 것, 몸집이 커지는 일이 아니라 힘을 제때 멈출 줄 아는 것, 누군가의 고통을 눈치채고 리듬을 맞춰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결국 위로란 화려한 말이 아니라 바로 그런 태도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저자가 강조하는 메시지 가운데 가장 강하게 다가온 문장이 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감정을 미루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 감정을 끝내 드러내지 않는 것은 결코 건강하지 않다.” 이 문장은 위로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위로란 슬픔의 우선순위를 매기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감정이 같은 자리에서 동시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하는 행위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우리는 위로를 ‘말’로 해결하려 하지만, 정말 필요한 것은 완벽한 한 문장이 아니라,
옆에 머물러 주겠다는 의지 그 자체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어쩌면 좋은 위로란 준비된 문장이 아니라, 말이 어색하게 꼬이더라도 상대의 마음을 쉽게 판단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 있어주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아니, 말조차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는 순간에야 비로소 진짜 위로가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상대는 그 침묵을 통해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차릴테니까 말이다.
결국 위로란 말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떠나지 않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이 내게 남긴 가장 큰 위로는 그런 확신이었다.
서툴러도 괜찮다. 머뭇거려도 괜찮다.
그 마음이 진짜라면, 이미 그것으로 충분한 위로가 된다는 것이다.
아들이 다니는 복싱장에 2라운드에 5학년 아이와 6학년 아이의 복싱 대결이 있었다.
이날 링 위에서 벌어진 일은 관계의 아름다운 일면을 보여주었다. 상대를 아프게 한 미안함을 몸으로 표현하는 법, 자신이 더 강하다는 과시하지 않고 오히려 약한 상대를 배려하는 법을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것은 나이를 먹는 것도, 몸이 커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약속한 것을 끝까지 지키려는 의지, 상대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추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그날이 마음에 남는 이유는, 힘을 함부로 쓰지 않는 절데, 약해도 끝까지 해내려는 의지, 무엇보다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뭉클하게 남아서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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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강연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불안이란 미래의 것이다. 손에 잡히지 않는 시간에 대한 감정이니까. 당연히 현재에게 미래의 불안을 극복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불안의 극복’이라는 무모한 시도 대신 ’불안과의 동거‘라는 현실적인 방법을 택하게 됐다. 그것은 의도라기보다는, 긴 시간의 경험으로 도달한 자연스러운 전향이었다. 불안을 내 안으로 들여야, 비로소 불안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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