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14 - 박경리 대하소설, 4부 2권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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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4』는 거대한 사건이 폭발하는 권은 아니다.

대신 사람들 마음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깊게 흔들리는 변화가 중심이 된다.

배경은 일제강점기. 조선 사람들은 나라를 빼앗긴 채 각자의 자리에서 버티고 있다.

그런데 이 권을 읽다 보면 ‘독립’이나 ‘혁명’ 같은 단어보다 먼저 와닿는 건, 그 말을 꺼내기조차 조심스러운 공기다.


이야기는 길노인의 생일잔치로 시작한다.

겉으로는 잔치지만, 사실은 앞으로의 방향을 의논하는 자리다.

땅을 어떻게 할지, 조직을 어떻게 유지할지, 누가 책임을 질지 같은 문제들이 오간다.

총을 들고 싸우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이미 모두가 알고 있다.

이 시대에 ‘결정’은 곧 위험이라는 걸. 말 한마디가 집안을 망가뜨릴 수도 있고 침묵은 또 다른 죄가 될 수도 있다.

이 장면은 14권의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겉은 평온하지만 속은 팽팽하다.


이 권에서 가장 마음이 쓰인 인물은 명희다.

남편과 이혼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지만, 그 삶이 자유로워 보이지 않는다.

바느질과 수예를 가르치며 조용히 살아가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안하다.

사랑받지 못했던 기억, 혼자 감당해야 하는 책임,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라는 질문이 계속 따라다닌다.

명희를 보며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관계에서 벗어나면 자유로워질까, 아니면 또 다른 외로움 속으로 들어갈 뿐일까?

명희의 삶은 해방이 아니라, 고요한 고독에 가깝다.


인실과 오가타의 관계도 그렇다. 조선 여자와 일본 남자. 서로의 감정은 진심이지만, 시대가 그 사랑을 허락하지 않는다. 나라를 빼앗은 쪽과 빼앗긴 쪽이라는 현실이 둘 사이에 놓여 있다.

인실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가해자가 반드시 승리자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고, 체념이야말로 패배라는 사실도 안다. 그 단단함이 오히려 더 아프게 느껴진다.

사랑이 개인의 감정으로만 존재할 수 없는 시대라면, 그 사랑은 어디까지 지켜질 수 있을까?


관수와 한복은 또 다른 방식으로 시대와 맞선다.

관수는 가난과 차별 속에서 자라며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걸 뼛속 깊이 느낀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묻는다. “혁명 안 하고 애국 안 하고 살 수 없나?” 이 질문은 단순한 불만이 아니다.

애국하지 않으면 배신자 취급을 받고, 싸우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현실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옳은가를 묻는 절규다. 한복은 “살인자의 아들로 끝나느니 애국자로 끝나겠다”고 말한다.

그 말은 영웅적이라기보다, 마지막으로 붙잡을 수 있는 존엄처럼 느껴진다.

정의는 정말 존재하는가, 아니면 선택의 순간마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이름일 뿐인가?


이 권에는 인간의 잔혹함을 드러내는 문장도 등장한다.

맹수는 배부르면 사냥하지 않지만, 인간은 욕심 때문에 모든 것을 초토화시킬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읽으면서 마음이 서늘해졌다. 인간은 이념과 애국이라는 이름으로도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다.

그래서 14권은 이렇게 묻는 것 같다.

정의는 누구의 것인가. 성공한 자가 들고 있는 칼 위에 꽂힌 말은 과연 진짜 정의인가?


읽는 내내 ‘밤’이라는 이미지가 따라다녔다. 관수가 술에 취해 “왜 이리 날이 안 새느냐”고 울부짖는 장면은 개인의 한탄을 넘어 시대의 탄식처럼 느껴진다.

새벽이 오지 않는 기분. 그럼에도 사람들은 살아간다.

땅을 지키고, 사랑을 붙들고, 조직을 이어가고, 다시 모인다.

끝이 보이지 않아도 사람은 왜 계속 버티는가?

희망 때문일까, 아니면 포기할 수 없다는 자존 때문일까?


『토지 14』는 큰 사건보다 사람들의 선택을 보여준다.

어떤 이는 싸우고, 어떤 이는 버티고, 어떤 이는 떠나고, 어떤 이는 사랑한다.

그리고 그 모든 선택이 모여 시대를 만든다. 이 권을 덮고 나면 거창한 감동보다 묵직한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지금 어떤 정의를 믿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밤을 지나고 있는가.


#채손독 을 통해 #도서협찬 받았습니다.

@chae_seongmo

@dasanbooks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인종이란 신들린 무당 말이나 눈앞에 보이는 엽전 한 닢을 더 믿으니,
바늘구멍만 들여다보지 화산구멍은 눈앞에 없고,"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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