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신학이란 무엇인가 - 자유주의 신학의 재구성에서 포스트모던 해체까지
로저 E. 올슨 지음, 김의식 옮김 / IVP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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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라이어마허, 리츨, 트뢸치, 뉴먼, 블롱델, 하지, 도르너, 부시넬, 칼 바르트, 불트만, 니버, 틸리히, 캅, 본회퍼, 몰트만, 판넨 베르크, 구티에레스, 칼 라너, 한스 큉, 발타자르, 칼 헨리, 그렌츠, 하우어워스, 존 카푸토... 현대 신학자들과 두 명의 탈현대 신학자들의 이름이다. 이름만 듣고도 그들의 시대와 주장이 말끔하게 정리가 되면 좋겠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있을까. 생각해보면 이 모든 사람에 관한 주장과 흐름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보다 ‘그럴 필요가 있나?’라고 질문할 사람이 더 많을 것 같다.

저자는 위에 적어 놓은 현대 신학자들의 주장을 소개하되 그 시대 상황을 통해 그러한 주장이 나오게 된 배경, 주장의 강조점, 여러 신학자의 평가, 짧지만 자신의 평가까지 곁들여 설명한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에서 그 많은 현대 신학자들을 알아야 하는 이유, 적어도 그들을 배워야 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들을 비롯한 현대 신학 개척자들의 길들을 여전히, 어떤 경우는 그들의 이름도 모른 채 따라가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에 앞서 길을 걸었던 이들에 관해 아는 편이 더 좋다. 그렇지 않으면 동일한 틀에 빠지고 같은 곳에서 제자리를 맴돌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말 것이다. 그들에 관해 배우면서 스스로 빠져 있는 난국을 이해하고,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앞을 가리키는 놀라운 표지를 발견할 것이다” 949p

900페이지가 넘는 책이다 보니 마음에 남은 흥미로운 주제들이 꾀나 많았다. 그중에서도 여기에 소개된 현대 신학자들이 자신들이 마주한 현대성에 대해 대단히 진지했다는 점이다. 현대성에 진지했다는 말은 과학과 철학의 변화, 발전 가운데 살아가는 기독교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자신이 믿는 기독교를 적절하게(말이 통하게) 소개하기 위해서 학문적으로, 그리고 신앙적으로 열정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집요할 정도로 고집스럽게 자신의 주장을 이어나갔다는 뜻이다.

이 점은 위의 신학자들을 함부로 냉소하거나, 그냥 모르고 지나가도 되는 사람들로 치부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적어도 기독교 신앙에 진지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존경심을 가지고 그들이 무엇이 말했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주의를 기울여 들어보아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단지 그들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최소한의 존중 없이 현대 신학자들을 무시한다면 저자의 말처럼 우리가 처한 난국을 이해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고, 시간만 허비하다가 세상의 변화에 그냥 냉소만 하다 휩쓸려 가버릴지 모른다.

현대 신학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읽을 때마다 성경의 권위, 신론, 삼위일체론, 기독론에 대한 논쟁이 시대에 시대를 지나며 이어지고 발전해 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책에 나오는 표현대로 하자면 시대에 따라 정통 교리를 번역하는 일이 지속적이 있었고, 그것이 심한 경우엔 변형이 되는 일도 있었다. 저자는 여러 신학자의 비평을 적절하게 소개하고, 필요한 경우 본인이 생각하는 전통 기독교,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과 예수님의 역사적 부활을 인정하는 교리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지적한다.

현대 신학자라고 이러한 전통 기독교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두 긍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미세한 차이가 나는 사람,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저자는 각각의 신학자들이 자신이 마주한 현대성의 이슈를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쉽게 요약하여 재미있게 소개한다. 저자는 딱딱해지기 쉬운 내용을 독자들의 흥미를 돋우며 읽을 수 있도록 글을 정말 잘 썼다. 물론 보고 또 봐도 모르겠는 사람들이 있긴 했다.(나 같은 경우엔 틸리히와 칼 라너가 그랬다.)

청어람에서 진행하는 ‘신학책 함께 읽기 챌린지’에 참여하여 매일 정해진 분량을 여럿이 함께 읽고, 서로의 느낀 점을 공유하며 더 흥미롭고, 유익하게 읽을 수 있었다. 아마도 함께 읽지 않았으면 바쁘다는 핑계로 못 읽지 않았을까...ㅎㅎ 참여한 분들의 반응을 보아도 이 책은 두껍지만, 정말 추천할만한 좋은 책이다. 나도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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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사람들이 이들을 비롯한 현대 신학 개척자들의 길들을 여전히,
어떤 경우는 그들의 이름도 모른 채 따라가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에 앞서 길을 걸었던 이들에 관해 아는 편이 더 좋다.
그렇지 않으면 동일한 틀에 빠지고 같은 곳에서 제자리를 맴돌면서 시간을허비하고 말 것이다. 그들에 관해 배우면서 스스로 빠져 있는 난국을 이해하고,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앞을 가리키는 놀라운 표지를 발견할 것이다.
- P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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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어를 비롯한 비판자들이야말로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일반적으로는 인간을 사용한다는 데 누구나 동의한다. 하지만 이것을 복음이 곧 그것을 퍼뜨리는 인간이라는 것을의미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우어워스의 말은, 일반적으로개인주의적 기독교란 없으며 하나님이 자신의 증인으로 교회를 세웠다는것이다. 어디서도 그는 조직된 기관으로서의 교회가 복음의 구성 요소라고말하거나 암시하지 않는다. 인정하건대 그에게 교회는 복음의 필수적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에) 수단이지만, 이 경우에 수단은 메시지가 아니다. 교회와 메시지는 서로 뗄 수 없을 정도로 관련되어 있지만, 수단은 언제나 메시지의 수정을 받는다. 마이어를 비롯한 이들의 비난은 조금 어리석게보일 정도다.
- P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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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집단은 세속주의와 신학적 자유주의의 압도하는 위협을 직면해서는 서로를 찾고 손을 잡았다. 그들은 그레이엄이 활발히 활동하면서 복음주의를 하나의 운동으로 결합하는 접착제 역할을 하는 동안에는 서로 협력하고 인정했다. 하지만 그레이엄이 은퇴하면서 활동을 멈추자 두 유형의 복음주의 개신교 사이에 있는 분열은 더 넓어지고 깊어졌거나, 또는 적어도 더두드러졌다. 양측의 대표자들은 서로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들은 서로를 비방할 때가 아니면 서로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복음주의 신학은 하나의 신학이 아니다. 두 가지 매우 다른 사고방식이 오랜 분열로부터 생겨났다. 그렌츠가 경건주의 웨슬리 진영을 대표한다면, 카슨은 청교도 개혁파 진영을 대표한다.
- P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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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론은 현대성으로 이어졌고, 현대성은 세속성으로 이어졌고, 세속성은 의미의 공허함, 허무, 얻는 것 없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궁극적으로, 발타자르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현대의 사람은 자연 속의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죽었다는 끔찍한 불행을 겪었다. 현대성은 그 압도적 인간중심주의때문에 "인간이 어떤 자연의 거울을 들여다봐도 언제나 궁극적으로 자신을 보게 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단지 합리주의적 · 기술적 관점에서 사물에 접근하는 현대 문화는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오해한다. 이것은 인간들이 의미를 위해 노력하고 탐색하고 추구하면서 궁극적으로 영적이며단순히 자연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발타자르가 다소 철학적 언어로말하는 것처럼, "인류의 의식의 통일은 위에 있는 것을 향한, 즉 하나님에대한 개방적 질문 이외의 것으로서는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 P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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