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은 우리의 영역이나 능력을 벗어나는 과업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 있는 "당신"(Thou) 안에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습이지, 다른 종교들에서처럼 동물의 모습이 아니다.…추상적 - 절대적, 형이상학적, 무한적등 형태도 아니고, 자율적 인간이라는 그리스의 신인(神人)도 아닌, 타자를위해 존재하는 사람, 그런 이유로 십자가에 달린 존재다. - P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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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전능은 사랑하는 백성을 위해 기꺼이 사람이 되시고 고난까지 받으시는 능력이다...라고 하나님의 전능함에 대해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사도신경 강의 준비할때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굳이 포기해야 했을까...싶네요.


과정 신학에 대한 나의 비판은 이 신학의 하나님이 너무 약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는 하나님, 화이트헤드의 문구대로 "고난의 동반자"
이지만, 또한 어떤 위대한 성취를 통해 고난을 상쇄하는 존재이어야 한다. 직설적으로 말해, 과정 신학의 하나님은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중에서 일으킨 하나님이 아니다. - P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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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키는 내슈빌에서 틸리히의 강연을 들은 한여자가 그녀의 친구에게 말하는 것을 들은 일을 말한다. "나는 저 사람이 말하는 것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겠어. 하지만 그는 강의 내내 나에게 직접말하고 있었어."
- P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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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버는 혹시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두가지의 악 중에서 더 작은 악에 참여해야 한다면 하나님의 용서가 있을 것을 확신했으며, 히틀러와 그의 주축국들을 저지하기 위한 전쟁이 바로 그런 필요악이라 보았다. 그렇다면 기독교 사회 윤리는 실천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완벽한 것을 성취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이상주의적 확신이어서는 안 된다. 현실에 대한 합리적 사고에 기초한 타협은 정의를 위해 필연적인 한, 기독교적 미덕이다. 니버의 제자들은 실천적 기독교사회 윤리에 대한 이 접근법을 "기독교 현실주의 (Christian realism)라고 불렀다. 자유주의자들은 그것을 비관주의라고 불렀다. 니버 자신은 그것을 예언자적이라고 불렀다.
- P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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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트만이 원한 것은 겉껍질(신화, 초자연적인 것)을 벗겨 내고 그 속의 알맹이 (영원한 본질)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기획을 가리키는 독일어 단어(Entmythologizierung)는 안타깝게도 영어로는 "비신화화"(demythologizing)라는 말로 번역된다. 하지만 이 독일어는 벗겨 내는 것또는 버리는 것을 함축하지 않으며, 신화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신화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서의 해석을 암시한다.
만약 불트만이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였다면 아마도 그의 논문에 대한반응이 그렇게 신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바르트와 브루너에의해 시작된 상대적으로 새로운 변증법 신학, 신정통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들은 성경 안의 모든 기적 이야기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초자연적인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불트만의 논문은 모든 문자주의에 대한 선전포고로 보였고,
그의 비판자들 다수는 그가 모든 초자연적인 것을 신화로 거부하면서 어떻게 성경이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고 주장할 수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불트만이 거부한 것은 초자연적인 것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문자적 해석이었다. 불트만은 현대 세계의 어떤 사람이 - P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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