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분리된 동시에 연결되어 있으며, 구별되는 동시에 관계를맺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체성을 표시하는 경계는 장벽인 동시에 다리다... 정체성은 타자와의 구별 짓기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타자와의 관계를 내면화한 결과다.
그것은 자아와 타자가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협상하는 양쪽 모두가 참여하는 ‘구별‘(differentiation)의 복잡한 역사로부터 나타난다. 리쾨르가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에서 주장했듯이, "한 사람의 자아됨은 너무나 친밀하게 타자성을 내포하기 때문에 타자 없이는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할 수없을 정도다" - P10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좋음 > 솔로 계급의 경제학 (우석훈 지음. 한울)

8년전이라니...북플쓴지도 오래됐구나. 오래된 년수에 놀라고, 그사이 빈곤청년이 더욱 늘어나는 현실에 슬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사악한 사람들의 짓이 아니라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의 짓이었다.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은 영혼이 ‘자신의 선한 양심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분이 선에 대한 자신들의관념을 거부하신 것을 악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Nietzsche 1969, p. 229, Westphal 1993, pp. 262-263). - P91

배제는 ‘악한마음‘에 의한 죄일 수도 있지만, 또한 ‘선한 양심에 의한 죄일 수도 있다. "세상의 악당들이 어떤 해를 입힌다 할지라도 선한 사람이 입히는피해만큼 해롭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니체의 경고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 P9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 주고, 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을위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우리의 정체성을 재조정하려는 의지는 그들의 인간성을 인식하려는 목적을 제외한 그들에 대한 그 어떤 판단보다 중요하다. 포용하려는 의지는 다른 사람들에 관한 그 어떤 ‘진리‘보다, 그들의 ‘정의‘에 대한 그 어떤 판단보다 우선한다. 이 의지는 절대적으로 무차별적이며,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적 세계를 ‘선‘과
‘약‘이라는 도덕적 범주로 구별하려는 시도를 초월한다. - P4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들의용기 있는 행동은 또 다른 의미에서 정치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정치를 위한 정치적 행동이 아니라 복음을 살아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이 몸에 각인되어 있었기에 사회 속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 삶의 태도,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이남달랐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들은 가장 반정치적인 방식으로 정치를 했던 건지도 모릅니다. - P1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