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눈 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해냄.
저자 주제 사라마구는 노밸 문학상 까지 받았던 사람이다.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전~혀 모르고 있었다. 뭐 모를 수도 있지. 그러다 2년 전 <죽음의 중지>라는 책을 흥미롭게 읽으며 저자를 처음 알았다. 그 책에서는 몇 달 동안 어떤 사람도 죽지 않는 상황을 설정해서 각각의 조직들 – 병원, 교회, 국가, 마피아 등에 어떠한 변화가 나타나고 얼마나 큰 혼란을 겪게 되는지를 그럴듯하게 그려낸다. 그러다 갑자기 죽음은 폭풍처럼 밀려오고 또 다른 두려움이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이런 황당한 설정 안에서 인간사를 리얼하게 그려내는 저자의 실력에 놀랐고 그의 대표작들을 찾아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2년 만에 읽은 책이 <눈먼 자들의 도시>다. 이 역시 그 책만큼이나 황당한 설정을 가지고 있다. 갑자기 어떤 도시에서 사람들이 눈이 멀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하얗게 보이는 백색 실명의 상태로. 첫 발병자가 안과에 가서 진단을 받는다. 아무런 전조증상 없이 갑자기 눈이 멀었다는 말에 의사가 의아해 한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그 질병에 전염이 되었고 그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그러면서 도시는 그야말로 공포의 도가니가 된다. 이후 국가는 전에 없단 사태에 나름 체계를 갖추어 대책을 세우지만 그야말로 주먹구구이고 질서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죽이다가 결국엔 상황만 악화시킨 채 두 손을 들어버린다. 이러는 사이에 거의 모든 사람이 실명이 되어 버렸고 도시는 곳곳에 배설물과 시체가 쌓여가며 생지옥이 되어간다. 놀랍게도 지옥과 같은 현실 가운데 소수의 사람들이 인간의 최소한을 지켜내기 위해서 분투한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실명의 상태에서 벗어나 곳곳에 기뻐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생겨나지만 생지옥을 통과한 사람들은 인간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눈이 머는 전염병이라는 비현실적인 설정은 이야기를 완전한 허구의 것으로 만들며 흥미를 만들어 냈지만 가상의 세계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이야기가 전개 되며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들은 부조리한 현실을 너무나 적나라케 폭로하며 국가, 도시, 인간, 말(언어)과 같은 묵직한 주제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국가는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가? 작가는 중간 중간 국가라는 말 보다는 조직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공권력에 대해 깊은 회의를 던진다. 도대체 주어진 힘으로 하는 일이 무엇인가? 다수의 피해를 막기 위해 소수의 환자들을 어떤 병원에 격리 수용한다. 절차를 지키며 일을 하고 격리 시킨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 같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폭군으로 돌변하여 질서 유지라는 명목 하에 시설 내에서 살인을 저지른다. 그러면 질서가 유지 되는가? 잠간은 그렇게 되는 것 같았지만 시설을 제대로 통제 하지 못했을 뿐더러 궁극적으로 격리 시설을 너머서 퍼진 두려움을 진압할 수 는 없었다.
도시는 정말 살만한 곳인가? 무수한 자동차, 건물들 안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이름이 없다. 안과 의사, 안과 의사 부인, 검은 안경을 쓴 사람, 경찰, 노인.... 단지 좀 더 편안하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는 이유로 도시에 살려 하지만 정작 한 꺼풀 벗겨 보아도 도시는 그렇게 살기에 좋은 곳은 아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쏟아내는 거짓과 배설물들이 뒤엉켜 있는 곳이 도시 아닐까? 등장인물 중에 한 명이 시골에서 살면 어떨까...라는 막연한 소원을 흘리지만 그저 한 마디 던질 뿐이다. 도시 말고 다른 대안은 없는 것일까?
인간은...? 눈이 보이지 않자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처음엔 벌벌 떨지만 나름의 살 길을 찾아 나선다. 국가의 권력 아래 격리 수용된 사람들 안에는 또 다른 폭력이 존재한다. 그저 총 한 자루 가지고 있을 뿐인데 그와 함께 하는 소수의 몇몇이 먹을 것을 독점하고 그것을 빌미 삼아 모든 물질을 강탈하고 여성들을 강제로 학대한다. 수용소를 벗어나면 좀 더 나았을까? 통제하는 사람이 없으니 자유로운 것 같지만 곳곳에 쌓여있는 배설물, 점점 늘어나는 시체들은 도시 전체가 수용소와 다를 게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면 희망은 없는가? 역설적이지만 희망은 인간에게 있었다. 도시를 만들고 국가를 만들어 온 세상을 갑갑하게 만들고 더럽고 냄새나는 곳으로 만든 주체가 인간이지만 그러한 지옥 같은 곳에서도 돕고 헌신하고 배려하고 사랑을 이어가는 것도 인간이다. 이야기 전체에서 모든 사람이 눈이 멀어 버린 다는 설정과 함께 주목할 만한 것은 한 사람, 안과 의사의 아내만이 눈이 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는 눈이 멀지 않았지만 남편을 돕기 위해 수용소로 자진해서 들어가고 자신도 눈이 멀었다는 연기를 치열하게 하면서 동시에 볼 수 없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함께 모여 있던 몇몇이 그녀를 중심으로 공동체가 되어간다. 서로의 부족한 모습도 보고 의견이 달라 충돌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서로를 의지하고 배려하고 함께 싸우고 그 안에서는 사랑이 싹트기도 한다.
소설 가운데 인간에 대한 부정과 긍정이 섞여서 나타나는 가운데 중요한 주제가 ‘말’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이런 식으로 진실이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거짓으로 위장을 하기도 하는 법이다”(177) “침대 하나를 건널 때마다 뉴스는 점점 왜곡되었다.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의 개인적 낙관주의나 비관주의에 따라 세부 사항이 축소되기도 하고 과장되기도 했기 때문이다.”(211) “상황의 힘과 특성이 사람의 언어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319) “상투적인 표현이란 그런 것이다. 의미의 미묘한 차이를 무시해 버린다.”(342) “말이란 것이 그렇다. 말은 속이는 것이니까. 과장하는 것이니까. 사실 말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말이란 것이 그렇다. 말은 속이는 것이니까. 과장하는 것이니까. 사실 말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395) “아저씨는 내가 함께 살고 있는 남자예요. 결국 이 말들이 드러내지 않은 말들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459) 심히 거짓된 것이 사람의 말이지만 삶으로 지켜내고 살아내는 말에는 의미가 있고 가치가 더한다.
작가는 황당한 설정을 만들어 내는 뛰어난 상상력도 가졌지만 그러한 설정 가운데 국가와 같은 조직이 어떻게 대처를 하는지, 개인은 그러한 카오스의 상태에서 어떠한 반응을 이어가는지를 소름끼칠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한다. 국가가 가진 권력 아래 자행되는 폭력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지, 체계적이고 세련되기 까지 한 도시가 한 꺼풀만 벗겨내자 얼마나 허술한 기반 위에 있는 것인지, 사람이 더럽고 비열한 존재인면서 동시에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사건이 진행되는 가운데 쉽지 않은 주제들을 극적이면서 진지하게 풀어낸다.
재미있으면서도 도시와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던 이 책, 추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