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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 - 피해자 없는 범죄, 성폭력 수사 관행 고발 보고서
T. 크리스천 밀러.켄 암스트롱 지음, 노지양 옮김 / 반비 / 2019년 8월
평점 :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 반비. 크리스천 밀러. 켄 암스트롱. 노지양 옮김
여고생 마리가 강간을 당했다. 자고 일어났더니 덩치 큰 한 남자가 자신의 몸위에 있었고, 눈을 뜨자 협박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 범인이 나간 뒤 마리는 여기저기에 전화했다. 자신의 위탁모, 남자 친구, 친구들... 처음에는 마리의 말에 너무 놀라 당장 찾아왔고 함께 했고 위로했다. 그러다 경찰의 조사가 진행되면서 갑자기 이들의 태도가 바뀐다. 평소 마리가 관심을 받기 좋아한다는 근거로 마리가 강간을 당한 것이 아니라 거짓말을 꾸며 허위 신고를 했을 것으로 의심한다. 처음엔 위탁모가, 친구들이 다음엔 경찰도 그들의 말이 타당하다고 느꼈다. 결국, 경찰은 강간 수사를 허위 신고로 방향을 바꾸었고 마리를 협박하듯 몰아붙였다. 자기편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마리는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몸과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경찰의 의심과 질문에 자신이 허위신고를 했다고 허위자백을 한다. 마리는 자신이 강간을 당했다고 신고를 시작했으나 허위신고 범죄자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마리의 사건이 어처구니없게 마무리가 된 이후에 연쇄 강간 사건이 일어난다. 증거를 거의 남기지 않아서 경찰이 애를 먹는다. 그러다 두 명의 여 형사의 집요한 추적과 몇 번의 행운으로 범인을 붙잡았다. 붙잡고 보니 그의 집에는 그동안 범행을 저질렀을 때마다 수집해 온 온갖 증거들이 쌓여 있었다. 강간한 집에서 훔쳐 온 카메라, 여성의 팬티,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나체 사진들. 경찰에 신고하면 인터넷에 올리겠다고 협박하며 찍은 그 사진들이었다. 놀랍게도 형사들은 그 사진들을 보다가 우연히 피해자가 더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사진 속의 여성이 마리라는 것이 밝혀지고 마리의 수사가 엉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도 드러난다. 감사하게도 사실이 드러나자 핑계를 대거나 도망가는 사람은 없었다. 엉망으로 사건을 마무리한 경찰, 마리를 의심했던 가족과 친구들 모두 진심으로 미안함을 느끼고 사과한다. 마리는 그때 왜 그랬냐며 추궁하지 않았고 용서한다.
책을 읽는 내내 얼마나 한숨을 많이 쉬었는지 모른다. 범인이 잡혀서 마리의 허위신고 누명이 벗겨지는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눈물도 나더라.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탓이라고 해야할까, 강간 피해자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못된 문화 때문이라고 해야할까...어떤 이유에서든 누구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은 마리의 처지가 너무나 안타깝게 느껴졌다. 혹시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안 될텐데...하는 조바심을 가지고 끝까지 책을 읽었다. 감사하게도 마리는 그 어려운 순간을 이겨내고 가정을 꾸리고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멋지게 살아간다.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책에 나타난 현실은 끔찍했다. 물론 가부장 문화, 남성 중심의 세상에서 강간의 위험을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도 없는 내가 끔찍했다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괜찮을까....싶을 정도로 책을 보면서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왜 하필 강간 피해자는 신뢰받지 못하는 것일까. 워낙 은밀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보니 회색 지대가 많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이 피해자가 도저히 숨조차 쉬기 힘든 세상을 만들었다. 마리의 주변에 있던 경찰, 간호사, 복지사, 심지어 가족들까지 그 누구도 마리를 믿어주지 않았다.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것은 이미 오래된 전통이고 마치 숨을 쉬는 공기처럼 되어 있어서 누구도 자신들이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못 했다.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이미 누명을 뒤집어쓰고 운 좋게 그것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난 뒤에나 가능했다.
물론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마음에 드는 게 있었다. 연쇄 강간범이 327년 6개월 형을 받았다는 것. 언제쯤 우리는 이렇게 될 수 있을까....
당연히 책을 읽는 내내 우리나라 생각이 났다. 이것저것 많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죽었나....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억울하다고 소리치지도 못한 채 울고 있을까. 이제는 나아져야 한다. 분명 우리 주변에는 성폭력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온전히 자기의 편을 되어주더라도 말하기 힘든 일을 온통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가득한 분위기에서 누가 감히 나 아프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성폭행을 직접 다루는 사람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읽어보면 좋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무의식적으로 요구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워낙 글을 잘 쓰는 저자가 우리 사는 세상의 치부 한 곳을 드러냈다. 그들의 지적에 동의하고 공감한다. 그리고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