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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5년 만에 신혼여행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9월
평점 :
판매중지
장강명(2016) / 한겨레출판사 E-book
2016-9-30 ~ 2016-9-30
E-book이 나왔다는 알림을 받자마자 다운로드해서 또 순식간에 후루룩 읽었다.
<한국이 싫어서>만큼 재밌었다. 딱 그 소설을 쓴 작가의 글이구나 싶었고. 에세이임에도 그 소설의 스핀오프나 후속편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
1. 이 작가의 문체는 정말 매력적이다. 수식어가 거의 없는 단문들. 깔끔하고 시니컬하다.
나도 생각은 단문으로 한다. 생각하는 대로 받아서 찍어주는 기계가 있다면 내 글을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글을 쓰려고 하면 언제나 문장이 질질 늘어진다. 아마 영어로 쓰면 관계대명사 절 속에 또 관계대명사 절이 나오고 그 문장 전체를 또 관계대명사가 받아서…… 식으로 쓰일 것이다. 독해를 하자면 어디서 끊어지는지 머리를 싸매고 봐야겠지. 물론 수식어도 많다. 쓰는 단어가 다양하지도 않은 주제에. 왜 그렇게 될까? 변명을 하자면, 읽는 사람이 가능한 한 내 의도대로만 읽을 수 있도록,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문장에 덧붙이다 보면 그렇게 된다. `네가 쓴 걸 읽을 사람은 많지 않아.` 안다. 하지만 나중에 내가 다시 읽을 때를, 그러니까 미래의 나라는 독자를 위해, 지금 이 순간의 생각을 가능한 한 그대로 전부 옮겨 놓고 싶은 것이다. 다시 하지만, 말의 오해는 길어질 때 생기는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자꾸만 그렇게 쓰게 된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은 없고 사족蛇足 뿐인 걸 알면서도.
2. 결혼과 부부의 의미에 대해. 이 작가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정말 흔치 않은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 남자 쪽의 부모님이 결혼을 극렬 반대하는 데다가 두 사람이 평소 한국의 `결혼식 문화` 전반에 대한 혐오를 가지고 있어서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혼인신고는 `지키기 어려운 약속을 지키겠다는 선언`(p131/174)의 의미로 했다.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결정하고 남자는 곧 정관수술을 받는다(의사에게는 아이가 둘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남자의 어머니와 여자가 서로에 대해 거의 적개심에 가까운 감정을 갖고 있다는 걸 알기에 명절에는 남자 혼자서 본가에 간다(처가에는 함께 간다. 여자의 부모님은 남자를 그렇게 싫어하지 않으시니까). `나의 주관은 이러하니까 그 주관대로 산다!`는 식으로 목에 힘을 주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냥 그렇게 하면서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다. 그건 마치 친구들이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모임을 갖는다기에 나갔는데 나는 아이스크림을 싫어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냥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식으로 간단한 일이다.
나도 정말 늦은 나이에 결혼이란 걸 했다. 늦은 나이에 나보다 나이가 세 살 많은(그러니까 더 늦은)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둘 다 집안의 맏이이다. 결혼에 대해 거의 독촉이 없으셨던 부모님이었지만 막상 내가 이런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데려간 후, 더 만나보고(만난 지 6주 만에 소개함) 천천히 생각해보는 것이 좋지 않겠냐(부모님에게 그때까지 생각할 여유가 있었다는 것이 신기했음. 그렇다고 내가 꽝을 황금으로 볼 사람도 아니고. 물론 콩깍지는 두껍게 쓰고 있었지만...), 귀가 시간이 너무 늦다(이 나이에 통금 시간이 아니라, 함께 사는 가족을 걱정시키지 않는 예의라셨다), 그 일보다는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이 좋지 않겠냐, 등등 거의 석 달을 들들 볶였다. 진짜 사춘기 소녀가 되어 부모님과 반목하는 분위기였다.
여하튼 그런 갈등이 정리되고(자식 이기는 부모 없는 상황이 아니라 그저 시간이 해결했다고 생각함. 어렸을 때보다 더 빨리 가는 시간) 결혼식을 하기로 했는데, 또래보다 거의 이십 년까지 늦은 결혼이었으니 그동안 쌓인 생각(일종의 로망)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부모님과 가까운 친척들과 아주 친한 친구 몇몇만 불러서 둥그렇게 앉혀 놓고 신랑 신부가 하객들에게 감사인사하고, 부모님과 하객들이 돌아가면서 덕담 한 마디씩 주시고, 신랑과 신부가 서로에 대해 몰랐던 엉뚱한 옛날이야기들이 간간이 폭로되어 다들 웃고, 신랑 신부가 마주 보면서 서로에 대한 다짐 같은 걸 들려준 뒤 반지를 끼워 주고 뽀뽀하면 하객들이 폭죽을 터뜨리고, 즐겁게 다 같이 한 상에 앉아서 밥 먹는 그런 결혼식이 내가 가끔 생각하던 결혼식이었다.
실제 결혼식은 남들과 거의 똑같이 했다. 예단은 생략했고, 부모님이 강력히 원하셔서 두 분이 다니시는(나도 어렸을 때는 다녔던) 교회에서 평범한 예식을 치렀다. 목사님의 주례사가 짧았던 게 큰 위안이었다(짧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도 기억에 남은 것이 없다...). 폐백도 했다. 그렇게 했던, 아니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부모님이 그때까지 남들에게 뿌리셨던 것도 있고 보여줘야 할 사람도 많아서였다. 석 달 간 들볶인 게 너무 힘들어서 그냥 그러시라고, 좋은 게 좋도록 넘어가자 생각했다. 결혼식을 물론 후회하지는 않는다. 교회에서 섭외한 성가대 중창단이 축가를 부르는데 화음이 맞지 않아 웃음을 참던 것이나, 여고 동창생들이 동창들 중 거의 막차를 탄 나를 위해 대거 몰려와 아낌없이 웃겨주고 손뼉 쳐 주었고, 치렁치렁한 웨딩드레스 입고 걸었던 것도, 폐백식 때 어른들이 던져주시던 대추와 밤을 받은 것도, 다 즐거운 기억이다. 작게 한답시고 내 로망대로 밀어붙이기보다 그 정도로 부모님과 타협한 것이 내가 목에서 힘을 빼는 방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혼수나 예물이나 예단 때문에 실랑이가 있었다면(시어머니께서 일절 받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그에 비해 과한 예물을 주셔서 좀 난감하긴 했지만), 스드메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면(이건 정말 왜 그렇게 과하게 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는데, 남자와 나 딱 두 사람만 동의하면 되는 일이라서 간단히 넘겼다), 그래서 내가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 비용이 들었다면 결혼식을 이렇게 재밌는 일로 기억할 수는 없었겠지.
남편과 나의 취향은 상당히 다르다. 남편은 대체로 집에 가만히 있는 게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고 나는 방콕에 데굴데굴하다가 잠자는 걸 좋아한다. 남편은 술을 좋아하고 즐기고 잘 마시지만 나는 술을 많이 마시지도 못할뿐더러 어마어마한 숙취 때문에 아예 무서워한다. 남편은 소설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는데 내 인생의 로망은 소설가이다. 심지어는 남편은 자기가 관심이 있는 주제들에 대한 블로그는 매일 밤늦게까지 정독하면서도 내가 이따금 SNS나 블로그에 이런 걸 올린다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둘 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것을 선호하지만 출근 압박이 있는 나는 한 시를 넘기지 않으려고 하는 반면 남편은 보통 세 시나 되어서야 잠자리에 든다. 이렇게 쓰다 보니 리스트의 끝은 없을 것만 같다.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은 싫어하는 것,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비슷하다. 먹는 것과 입는 것에 큰 관심이 없고, 아껴서 노후 준비 같은 것에도 크게 관심이 없고(...) 남들 눈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도 크게 없고, 무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인생에 있어서의 우선순위와 세상을 보는 눈, 가치관이 닮아 있다. 그래서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함께 있다 보면 이 사람과 함께 한 시간이 백 년이 된 것 같기도 하고 바로 어제 만난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내 입장에서 보면 단점-나를 불편하게 하는 점-도 많은 남편이고, 나 역시 그에게 많은 단점을 보이고 사는 거겠지만, 그런 것들이 용납할 수 없는 정도는 아니거나 이 사람에 한해서는 왠지 너그러워지는 그런 마음으로 함께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두 사람도 뭐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허기가 지면 곧 신경이 사나워지는 여자와 먹으면 바로 졸음에 허덕이는 남자가 함께 여행을 떠나 첫 부부싸움도 하고 여행 중 서로에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도 달랐지만, 그런 건 취향의 문제이고 삶의 우선순위와 가치관이 비슷하니 취향의 어긋남쯤은 흥미로운 관찰 대상이 되면서 오히려 함께 하는 생활의 표정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나와 나의 남편처럼.
우리를 결혼으로 이끌었던 `사랑`이, 지금까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지만, 그 모습 그대로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이 내게는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하듯, 그리고 살아있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변하듯, `사랑`도 변할 것이다. 지금 바라는 것은 그 변화가 나와 남편의 변화와 잘 어울리며 함께 가길, 저 혼자서 무슨 괴물 같은 것으로 완전 변신하지는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어도 오해하지 않고 좋은 것은 좋은 대로 나쁜 것은 연민으로 보아줄 한 사람이 지금 내 곁에 있다는 것. `지금`,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