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페러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 : 페러그린 01 페러그린 시리즈 1
랜섬 릭스 지음, 이진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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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 Peregrine`s Home for Peculiar Children
Ransom Riggs (2011) / 이진 역 / 폴라북스 (2011)
E-book

2016-10-12

영화에 반한 나머지 원작소설을 찾아봤다.
한 권 짜리라면 읽지 않았겠지만 (읽을 필요가 없었겠지만?) 3권 연작이었다. 즉 이어지는 이야기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망설이다가 전자책을 다운로드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영화보다 매우 어린이스러운 이야기였다. 15세 사춘기 소년의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진행되는 또 하나의 영어덜트 판타지 정도? 소설을 먼저 봤다면, 그리고 팀 버튼이 아니었다면 영화를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설과는 다른 몇 가지 설정이, 그리고 굳이 열다섯 소년의 목소리에 묶여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리고 팀 버튼(누구보다도 상상력의 이미지가 환상적이고 풍부할 이)의 비전이 원작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영화를 만들어낸 거겠다. 특히 영화의 바다 속 난파선의 모습. 이건 소설에서는 나오지도 나올 수도 없는 장면이다. 엔딩도 굳이 속편이 궁금하지 않은, 흐뭇하게 `Happily Ever After`를 품고 나설 수 있는 영화 쪽이 맘에 든다.

소설의 이야기는 어디로 가는 건지 후속권들이 좀 궁금하긴 하지만 읽던 책 다 덮어 놓고 직행할 정도로 궁금하지는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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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파울로 코엘료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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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Espiã
Paulo Coelho (2016) / 오진영 역 / 문학동네 (2016)

2016-10-6

읽는 내내 신경질이 났다. 아 정말 파울로 코엘료에게 뭘 바래. 이 작가에게 뭘 바래선 안 된다고 경험이 말해주고 있었지만 `마타 하리`에 대한 이야기라지 않는가. 소재가 흥미진진하니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말이 맞다. 중요한 것은 작가이다.

마르하레타 젤러, 예명 마타 하리였던 여자가 스파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형(총살)당한 것이 문제가 많은 판결과 집행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녀는 자신의 미모를 무기로 휘둘러 많은 권력자들(남자들)을 굴복시키고 돈과 사치와 유명세를 누렸지만, 스파이 혐의에 대해서는 아무런 증거가 없는, 기껏해야 `잠재적 피의자`일 뿐이었다. 그냥 망신만 주고 끝냈어도 충분할 사건을, 재판과 처형까지 짧은 시간 안에 해치워버렸다는 건 전시 상황에 대중의 분노를 받아낼 쓰레기통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최대한 지저분하고 선정적으로 그녀의 사생활을 과장해서 대중에게 알리고, 이런 여자니까 이런 일을 충분히-당연히 할 만하다, 라고 일종의 마녀 사냥을 벌인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여자`였기에 가능한 방식이었을 수도 있다. `방탕한 여자`였다는 것이 유죄의 증거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점이 마타 하리 사건에서 되돌아봐야 할 점이고 교훈이라면 교훈이다.

하지만 `인간` 마타 하리에 대한 이야기라면 다르다. 나는 코엘료가 그녀의 일생에서 뭔가 `인간적인 보석`을 건졌기에 글을 쓴 줄 알았다. 소설의 대부분은 마타 하리가 총살 당하기 전, 사면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한 상태에서 변호사에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는 편지 형식인데, 아무리 잘 봐도 허영과 과대망상과 그에 필수인 자기합리화 뿐이다. 작가가 실재 마타 하리를 그런 인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그린 건 아닌가 싶을 만큼. `죄라고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는 것밖에 없다`거나 `남성 중심의 관습에 저항했기 때문에 유죄`라거나, 심지어는 오스카 와일드와 마타 하리를 동류로 묶겠다고(드레퓌스 사건과는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헐. 코엘료의 마타 하리는 전혀 설득력이 없다.
소설 속에서 마타 하리는 말한다. 희생자가 아니라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간 사람, 치러야 할 대가를 당당히 치른 사람으로 기억되길 원한다고. 무슨 자뻑. 그녀는 희생자이다. 그것도 (그런게 있었다면) 치러야 할 것보다 너무나 큰 대가를 치른. 그러나그녀가 뭘 위해 어디로 나갔단 말인가? 남성 중심 권력에 엿 먹이기 위해 자신의 몸을 기꺼이 무기로 휘둘렀던가? 그렇게 해서 그녀는 순교자인가?

내 생각은 이렇다. 정당하게 판결을 받았다면 대중적 망신(자신을 실재보다 더 대단한 사람으로 과신했던 것이 대한) 속에서 조용히 저물었을 인생을, 권력이 과잉으로 반응해서 오히려 역사에 가엾은 희생자에다가 순교자 이미지까지 덧씌워 남겼으니, 역시 권력은 근시안적이고 멍청하다.
여기에 파울로 코엘료 특유의 `사랑이 모든 것` 드립. 마타 하리가 사랑을 비웃고 정복하려고 했기에 결국 망했다는 건가 뭔가 아무튼 억지로 몇 군데 끼워 넣긴 했는데 그저 뜬끔없다는 생각 밖엔.

신경질내면서도 끝까지 읽느라 시간 버려 열받는다고 이렇게 긴 글을 찍는다고 시간 버려.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작가의 무려 `친필사인`이 박힌 책이 왔던데. 쓰레길라고 생각하는 책을 양심상 누구에게 줄 수도 없고, 그만큼 팔 수도 없고. 도서정가제 시절 반값으로 산 책이라면 그냥 재활용 쓰레기에다가 같이 묶어 버리면 되겠지만 또 버리려고 하면 돈 생각이 나고. 아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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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6-10-07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울로 코엘료는 <연금술사>를 포함한 초기 몇 권 외엔... 절래절래. 아예 관심을 끊은 지 오래인지라. ㅠ

meesum 2016-10-08 10:57   좋아요 0 | URL
저도 딱 악마와 미스프랭까지만. 사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는 좋아하는 책이기도 하고요. 제목에 홀랑 넘어가서 또 제발등을 찍었네요 ㅋ

2016-10-10 1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3 1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자책] 5년 만에 신혼여행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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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2016) / 한겨레출판사 E-book

2016-9-30 ~ 2016-9-30

E-book이 나왔다는 알림을 받자마자 다운로드해서 또 순식간에 후루룩 읽었다.
<한국이 싫어서>만큼 재밌었다. 딱 그 소설을 쓴 작가의 글이구나 싶었고. 에세이임에도 그 소설의 스핀오프나 후속편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

1. 이 작가의 문체는 정말 매력적이다. 수식어가 거의 없는 단문들. 깔끔하고 시니컬하다.
나도 생각은 단문으로 한다. 생각하는 대로 받아서 찍어주는 기계가 있다면 내 글을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글을 쓰려고 하면 언제나 문장이 질질 늘어진다. 아마 영어로 쓰면 관계대명사 절 속에 또 관계대명사 절이 나오고 그 문장 전체를 또 관계대명사가 받아서…… 식으로 쓰일 것이다. 독해를 하자면 어디서 끊어지는지 머리를 싸매고 봐야겠지. 물론 수식어도 많다. 쓰는 단어가 다양하지도 않은 주제에. 왜 그렇게 될까? 변명을 하자면, 읽는 사람이 가능한 한 내 의도대로만 읽을 수 있도록,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문장에 덧붙이다 보면 그렇게 된다. `네가 쓴 걸 읽을 사람은 많지 않아.` 안다. 하지만 나중에 내가 다시 읽을 때를, 그러니까 미래의 나라는 독자를 위해, 지금 이 순간의 생각을 가능한 한 그대로 전부 옮겨 놓고 싶은 것이다. 다시 하지만, 말의 오해는 길어질 때 생기는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자꾸만 그렇게 쓰게 된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은 없고 사족蛇足 뿐인 걸 알면서도.

2. 결혼과 부부의 의미에 대해. 이 작가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정말 흔치 않은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 남자 쪽의 부모님이 결혼을 극렬 반대하는 데다가 두 사람이 평소 한국의 `결혼식 문화` 전반에 대한 혐오를 가지고 있어서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혼인신고는 `지키기 어려운 약속을 지키겠다는 선언`(p131/174)의 의미로 했다.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결정하고 남자는 곧 정관수술을 받는다(의사에게는 아이가 둘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남자의 어머니와 여자가 서로에 대해 거의 적개심에 가까운 감정을 갖고 있다는 걸 알기에 명절에는 남자 혼자서 본가에 간다(처가에는 함께 간다. 여자의 부모님은 남자를 그렇게 싫어하지 않으시니까). `나의 주관은 이러하니까 그 주관대로 산다!`는 식으로 목에 힘을 주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냥 그렇게 하면서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다. 그건 마치 친구들이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모임을 갖는다기에 나갔는데 나는 아이스크림을 싫어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냥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식으로 간단한 일이다.

나도 정말 늦은 나이에 결혼이란 걸 했다. 늦은 나이에 나보다 나이가 세 살 많은(그러니까 더 늦은)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둘 다 집안의 맏이이다. 결혼에 대해 거의 독촉이 없으셨던 부모님이었지만 막상 내가 이런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데려간 후, 더 만나보고(만난 지 6주 만에 소개함) 천천히 생각해보는 것이 좋지 않겠냐(부모님에게 그때까지 생각할 여유가 있었다는 것이 신기했음. 그렇다고 내가 꽝을 황금으로 볼 사람도 아니고. 물론 콩깍지는 두껍게 쓰고 있었지만...), 귀가 시간이 너무 늦다(이 나이에 통금 시간이 아니라, 함께 사는 가족을 걱정시키지 않는 예의라셨다), 그 일보다는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이 좋지 않겠냐, 등등 거의 석 달을 들들 볶였다. 진짜 사춘기 소녀가 되어 부모님과 반목하는 분위기였다.
여하튼 그런 갈등이 정리되고(자식 이기는 부모 없는 상황이 아니라 그저 시간이 해결했다고 생각함. 어렸을 때보다 더 빨리 가는 시간) 결혼식을 하기로 했는데, 또래보다 거의 이십 년까지 늦은 결혼이었으니 그동안 쌓인 생각(일종의 로망)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부모님과 가까운 친척들과 아주 친한 친구 몇몇만 불러서 둥그렇게 앉혀 놓고 신랑 신부가 하객들에게 감사인사하고, 부모님과 하객들이 돌아가면서 덕담 한 마디씩 주시고, 신랑과 신부가 서로에 대해 몰랐던 엉뚱한 옛날이야기들이 간간이 폭로되어 다들 웃고, 신랑 신부가 마주 보면서 서로에 대한 다짐 같은 걸 들려준 뒤 반지를 끼워 주고 뽀뽀하면 하객들이 폭죽을 터뜨리고, 즐겁게 다 같이 한 상에 앉아서 밥 먹는 그런 결혼식이 내가 가끔 생각하던 결혼식이었다.
실제 결혼식은 남들과 거의 똑같이 했다. 예단은 생략했고, 부모님이 강력히 원하셔서 두 분이 다니시는(나도 어렸을 때는 다녔던) 교회에서 평범한 예식을 치렀다. 목사님의 주례사가 짧았던 게 큰 위안이었다(짧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도 기억에 남은 것이 없다...). 폐백도 했다. 그렇게 했던, 아니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부모님이 그때까지 남들에게 뿌리셨던 것도 있고 보여줘야 할 사람도 많아서였다. 석 달 간 들볶인 게 너무 힘들어서 그냥 그러시라고, 좋은 게 좋도록 넘어가자 생각했다. 결혼식을 물론 후회하지는 않는다. 교회에서 섭외한 성가대 중창단이 축가를 부르는데 화음이 맞지 않아 웃음을 참던 것이나, 여고 동창생들이 동창들 중 거의 막차를 탄 나를 위해 대거 몰려와 아낌없이 웃겨주고 손뼉 쳐 주었고, 치렁치렁한 웨딩드레스 입고 걸었던 것도, 폐백식 때 어른들이 던져주시던 대추와 밤을 받은 것도, 다 즐거운 기억이다. 작게 한답시고 내 로망대로 밀어붙이기보다 그 정도로 부모님과 타협한 것이 내가 목에서 힘을 빼는 방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혼수나 예물이나 예단 때문에 실랑이가 있었다면(시어머니께서 일절 받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그에 비해 과한 예물을 주셔서 좀 난감하긴 했지만), 스드메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면(이건 정말 왜 그렇게 과하게 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는데, 남자와 나 딱 두 사람만 동의하면 되는 일이라서 간단히 넘겼다), 그래서 내가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 비용이 들었다면 결혼식을 이렇게 재밌는 일로 기억할 수는 없었겠지.

남편과 나의 취향은 상당히 다르다. 남편은 대체로 집에 가만히 있는 게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고 나는 방콕에 데굴데굴하다가 잠자는 걸 좋아한다. 남편은 술을 좋아하고 즐기고 잘 마시지만 나는 술을 많이 마시지도 못할뿐더러 어마어마한 숙취 때문에 아예 무서워한다. 남편은 소설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는데 내 인생의 로망은 소설가이다. 심지어는 남편은 자기가 관심이 있는 주제들에 대한 블로그는 매일 밤늦게까지 정독하면서도 내가 이따금 SNS나 블로그에 이런 걸 올린다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둘 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것을 선호하지만 출근 압박이 있는 나는 한 시를 넘기지 않으려고 하는 반면 남편은 보통 세 시나 되어서야 잠자리에 든다. 이렇게 쓰다 보니 리스트의 끝은 없을 것만 같다.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은 싫어하는 것,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비슷하다. 먹는 것과 입는 것에 큰 관심이 없고, 아껴서 노후 준비 같은 것에도 크게 관심이 없고(...) 남들 눈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도 크게 없고, 무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인생에 있어서의 우선순위와 세상을 보는 눈, 가치관이 닮아 있다. 그래서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함께 있다 보면 이 사람과 함께 한 시간이 백 년이 된 것 같기도 하고 바로 어제 만난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내 입장에서 보면 단점-나를 불편하게 하는 점-도 많은 남편이고, 나 역시 그에게 많은 단점을 보이고 사는 거겠지만, 그런 것들이 용납할 수 없는 정도는 아니거나 이 사람에 한해서는 왠지 너그러워지는 그런 마음으로 함께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두 사람도 뭐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허기가 지면 곧 신경이 사나워지는 여자와 먹으면 바로 졸음에 허덕이는 남자가 함께 여행을 떠나 첫 부부싸움도 하고 여행 중 서로에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도 달랐지만, 그런 건 취향의 문제이고 삶의 우선순위와 가치관이 비슷하니 취향의 어긋남쯤은 흥미로운 관찰 대상이 되면서 오히려 함께 하는 생활의 표정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나와 나의 남편처럼.
우리를 결혼으로 이끌었던 `사랑`이, 지금까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지만, 그 모습 그대로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이 내게는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하듯, 그리고 살아있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변하듯, `사랑`도 변할 것이다. 지금 바라는 것은 그 변화가 나와 남편의 변화와 잘 어울리며 함께 가길, 저 혼자서 무슨 괴물 같은 것으로 완전 변신하지는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어도 오해하지 않고 좋은 것은 좋은 대로 나쁜 것은 연민으로 보아줄 한 사람이 지금 내 곁에 있다는 것. `지금`,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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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에 지다 - 하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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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生義士傳
Asada Jiro 浅田次郎 (2000) / 양윤옥 역 / 북하우스 (2004)

상권 2016-7-28 ~ 2016-8-1
하권 2016-8-2 ~ 2016-8-3

읽은 지 꽤 된 책이다.
<낙하산 타고 온 그들 때문에 엄마는 셋째를 낳을 수 없다>라는 특이한(!) 제목의 칼럼에 이 소설의 일화가 인용되어 있어 알게 되었는데 (˝“아버지, 어머니를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그리고 어머니, 셋째를 꼭 낳아주세요. 저는 전혀 배고프지 않습니다. 저는 먹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울다 지쳐 잠든 동생을 업은 채 아홉 살의 장남은 그렇게 외쳤다. 수년간의 기근을 견디다 못해 먹는 입 하나 줄일 요량으로 뱃속의 아기와 연못에 뛰어들었다 겨우 살아난 어미였다. 세찬 북풍이 부는 연못가에서 아비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아홉 살 짜리에게 저런 대사를 주는 작가는 누구냐 궁금해서 검색했다가 집안이 몰락한 후 야쿠자 생활을 하다가(지금 뉴스 검색해 보니 본인은 부인) 40세에 데뷔했다는 이력에 동하여 읽게 되었다.

원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은 막부 말기의 혼란기를 배경으로 한 북방(아마도 자연환경조차 살기에 유리하지 않은 지역인 듯) 출신의 의로운 선비(일본이니까 사무라이) 요시무라 간이치로의 일대기이다.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일본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척박한 땅인 난부 번의 말단 무사이다. 노력 끝에 학문과 검술에 모두 달인의 경지에 올랐지만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그런 능력은 생활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해서 결국 위에 소개한 일화와 같은 사건을 겪은 뒤, 탈번(이것은 주군을 저버리는 엄청난 죄이다)을 감행하고 에도로 가서 돈을 많이 준다는 이유로 신센구미(막부 말기 교토의 치안유지를 위해 창설되었지만 결국은 마지막까지 막부를 지키는 결사대가 된, 하지만 떠돌이 무사-낭인浪人-들이 대부분이라 정통 사무라이들에게는 사실 경시되었던)에 입단, 훌륭한 인품과 뛰어난 검술 실력으로 여차여차하여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전쟁에서 활약을 하다가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마지막 순간까지 의義를 지켜냈다.

`이래도 감동받지 않을 거야?, 이래도 울지 않을 거야?`라는 식으로 씌여진 소설이라 책장도 빨리 넘어가고, 어느 대목에서는 -지금은 어느 대목이었는지 까먹었는데- 눈물도 찔끔 흘렸지만, 그보다는 읽는 내내 답답하고 딱하고 시대착오적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시무라는 `개인`이 뭔지 몰랐던 봉건시대의 인물이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로, 어느 신분의 부모에게서 출생하느냐에 따라 신체와 정신의 운명까지 결정되어 버리는 봉건시대. 그 시대의 끝자락에서 난부 번 말단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역시 말단 무사가 된 요시무라가 어떤 판단을 내릴 때 그 준거는 오직 `주군主君의 뜻`이다. 그는 가족들을 모두 굶겨 죽일 지경에 이르게 되어 정말 눈물을 머금고 난부 번을 이탈함으로써 자신의 직접 주군이자 깊은 우정을 나눈 번주 오노 지로에를 배신한 셈이 되었지만, 진정한 주군이라 할 수 있는 천황에 대한 충忠과 성誠은 끝까지 지켜서 결국 의사義사士로서 생을 마감한다. 죽음을 눈앞에 둔 독백에서 요시무라는 자신의 주군은 난부 나리님이나 조상님이 아니라 아내와 자식들이었다고 고백하지만, 정말 요시무라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는 -탈번을 결심할 때와 마찬가지로- (개)죽음의 강요에 굴복하면 안 되었고, 그렇게 죽음의 자리에서 뛰쳐나왔다면 아마도 `의사義士`로 기억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것이 봉건 시대의 한계이고, 그 시대에 충실하였던 요시무라의 한계이다.
이런 봉건적 인물이, 인간이 각자 독립된 인격체로서 그에 상응하는 사회에 대한 책임을 갖고, 리더를 따를지언정 자신의 운명을 쥔 주군을 인정하지 않는, 즉 `시민으로서의 개인`이 발견된 근대 이후 현대의 우리들에게 주는 메시지란 게,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요시무라는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아내와 자식을 끔찍이 사랑했으며, 또한 사랑과 존경을 받는 남편이자 아비였고, 동지들에게 신의를 지킨 진정한 친구였다. 그렇지만 그가 죽음에 이르러 `의義`랍시고 선택한 것을 긍정할 수는 없으며, 그것을 현대에 이르러 무슨 귀감으로 내보인다는 것은, `이래도 감동받지 않을 거야?`라는 식으로 현대의 독자들에게 들이민다는 것은, 그저 `그 시대를 기억하는 노인들의 향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요시무라와 신센구미의 시대는 막부 말기, 일본이 봉건 시대를 벗어나려고 하는 매우 극심한 혼란기였다(이후 일본에서 진짜 봉건 시대를 벗어나 근대적 인간이 확립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따라서 시야를 넓게 가지고 자기 나름의 세상 보는 눈으로 미래의 비전을 찾으려고 한 인물도 당연히 있었다. 아마 (잘은 모르지만) 사카모토 료마와 같은 인물이 그랬을 것이다. 사카모토 료마도 요시무라처럼 어느 번(도사 번)의 말단 무사였다. 탈번도 했다. 그리고 서양 세력의 도전에 맞서, 막부와 번을 넘어 새로운 일본에 대한 비전을 세우고 그를 위해 뛰었다. 탈번했지만 난부 무사로서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끝까지 탈번을 괴로워하며, 두 번의 배신은 하지 않겠다고 죽음을 받아들인 요시무라와는 아주 다른 인물이었다. 현대 사회에도 매력적인, 따라서 불러올 만한 인물은 당연히 의사義士 요시무라 간이치로가 아니라 풍운아風雲兒 사카모토 료마라고 생각한다.

쓰다 보니 길어졌는데, 읽고 나서 두 달 동안 기억 속에 처박아 두었던 것을 새삼 꺼내서 생각하게 된 것은 집권 여당 대표인 이정현 의원의 단식 때문이다. 오늘-날 지났으니까 6일째 단식에 그만 몸져 누워 버린 분을 비웃기는 민망하지만, 정말 딱하기 이를 데가 없다. 이분을 보면 공주마마를 주군으로 모시는 가장 충성스러운 사무라이-내시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가 이럴까 싶다. 주체적 개인으로서의 생각과 비전은 없고, 오직 주군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봉건 시대의 사무라이. 사심私心은 없다. 사람으로 보면 소탈하고(선거 운동 기간 내내 점퍼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고 혼자서 지역구를 돌며 유권자들과 소통하였다니) 정도 깊고 우직해 보인다. 그러면 뭐 하나. 자기 생각과 비전이 없는데. 주군이 훌륭한 사람이면 그에 편승해서 세상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주군이 악당이면 그저 악당 하수인으로 세상에 비참함만 더하는 것을. 공주마마의 진정한 목표는 자기 주변을 이런 얼빠진 가신 사무라이들로 채워서 시대를 돌려 봉건제로 돌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이 다소 잘못되더라도 그 사무라이들이 할복으로 자기는 지켜줄 테지. 우리는 어째서 지난 선거에서 이 봉건 시대의 가치관을 가진 일당들의 주군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나라꼴이 화나고 우습고 이제는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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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6-10-01 0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정현을 보면... 저까지 수준이 떨어지는 느낌. 이건 그냥 바보에 머저리. 세월호 부모들은 40일 넘게 단식하고도 당당했는데 며칠 단식했다고 (진짜 했는지도 의심) 드러누워 쇼하는 거 보면 화가 치미다 못해 슬퍼지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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職業としての小説家
村上春樹Murakami Haruki (2015) / 양윤옥 역 / 현대문학 (2016)

2016-7-30

<해변의 카프카>를 다 읽고 내친 김에.

예상했던 대로, 무라카미의 팬이라고는 할 수 없는 나에게 짠! 하는 느낌을 준 건 없었다. 시간을 정해놓고 하루 대여섯 시간 원고지 20매 분량의 글을 꼬박꼬박 쓰고, 그 채력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한 시간씩 달린다는, 소설가 이전의 성실한 인간 무라카미의 면모는 뭐 익히 알려져있던 것이기도 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왜 나는 이렇게 하지 못할까 하는 생각은 들지 않는. 소설가가 되려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따위의 팁이 들어있는 것도 절대 아니다. 하긴 내가 생각하기에, 백만 명의 소설가가 있다면 백만 가지의 소설가가 되는 길이 있었던 것이다. 백만 한 번째 소설가는 백만 한 번째의 길을 알아서 택할 것이고.

하지만 <달리기에 대해 말할 때 ->와 마찬가지로 화려하지 않은 그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이상하게 약간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다. 아마 나도 모르게 내 삶 속의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마음 속으로 정리해보게 되어서 그런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더 읽게 될 것인가 좀 의문이었는데 이 책을 읽고 보니 가장 최근작인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가 궁금해지긴 했다.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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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6-09-30 2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색채가 없는 다자키...> 괜찮슴다... 하루키 소설 중에서 그나마 맞았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