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마음 대산세계문학총서 129
하비에르 마리아스 지음, 김상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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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말하기와 듣기.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해지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과 비밀과 듣기, 엿듣기에 관한 이야기가 세밀하고 치밀하게 반복, 변주된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이야기와 플롯에 빠지게 되고 툭 떨어지는 결말 앞에 잠시 망연자실하게 된다.

어떤 사건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그 사건을 일어났던 것으로 확정하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그 사건에 연루된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나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비밀이 바로 그런 류의 이야기이다.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은 비밀을 주고 받는 것을 마치 사랑의 상징이나 완성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전에는 내가 비밀을 품고 있다는 것이 상대를 속이는 것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편치 않았었다. 그래서 내 모든 것을 보여준답시고 상대에게 다 털어놓고 용서(?)를 강요(!)하곤 했다. 또 상대에게도 아무런 비밀을 갖지 말 것을, 말하기를 강요했었다. 돌이켜 보면 상대가 듣고서 괴로워한 나의 비밀이나 내가 듣고서 괴로웠던 비밀은 없었던 것 같다. 아니, 상대에 대해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겉으로는 괜찮아 보였다‘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관계가 끝나게 된 건 상대가 결국 감당해내지 못한 나의 비밀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상대의 비밀 때문에 오랫동안 또는 깊이 고민했던 적은 없다. 나는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일 뿐 되풀이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거의 모든 것을 말하지만,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듣기를 원하지만, 거의 모든 것을 듣는다는 것을 알고 만족한다.
말하지 않는 것이 나의 비밀일 수 있다. 그러나 언제든 상대가 듣기를 원한다면 말해줄 수 있기에 비밀이라고 할 수 없기도 하다.
듣지 않은 것이 상대의 비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든 그가 말한다면 나는 기꺼이 듣고 공범이 되어줄 것이다.
굳이 시험할 필요는 없다.

하비에르 마리아스의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를 아마 20여 년 전에 읽었을 것이다. 제목에 혹해서 읽었던 것 같고.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작가 이름과 책 제목 밖에는. 그런데 이 책이 의외로 마음을 진동시키는 것이 있어서 그 책도 다시 읽어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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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벨리스크의 문 부서진 대지 3부작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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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두 달이나 걸려서 읽다니... 하도 띄엄띄엄 읽어서 줄거리나 다 따라잡았나 모르겠지만? 1부를 읽고 시간이 너무 지나서 2부 번역본이 나온 것부터 문제다. 1부를 읽을 때는 그저 독특하다고만 느꼈는데 2인칭 시점이란 게
좀 피곤하다. 더한 집중력을 요구해서.
그리고 3부는 또 언제 나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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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더링 하이츠 을유세계문학전집 38
에밀리 브론테 지음, 유명숙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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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은 아마 여고 시절에 한 번 읽었을 것이다.
19 세기 말 황무지나 다름없는 곳의 외딴 사제관에서 짧은 30 년 평생을 벗어나 본 적이 거의 없는 젊은 여자가 쓴 소설이라고는, 그 당시에도 지금도 잘 믿기지 않는다. 히스클리프의 ‘심장을 찢어발겨 피를 마시는‘ 식의 사랑이 무서웠고, 이렇게 무서워서 숭고한가, 싶었던 것, 그만큼 캐서린 언쇼-린턴이 싫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며칠 전 TV 에서 줄리엣 비노슈와 레이프 파인즈가 각각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로 분한 영화 <폭풍의 언덕>을 잠깐 봤다. 히스클리프가 집을 나가고 캐서린이 결혼을 하고 히스클리프가 다시 돌아오는 부분이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캐서린이 더 싫었다. 줄리엣 비노슈는 뭘 해도 미운데 양극성 장애인 양 활력과 우울을 동시에 지닌 캐서린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레이프 파인즈는 히스클리프라기엔 너무 미끈해서 계속 보고 있기가 불편할 정도. 그래서 꺼 버림.

문득 다시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번역본의 첫 문단을 에밀리의 영어 문장과 비교한 끝에 <워더링 하이츠> 선택. 역자는 제목을 <폭풍의 언덕>이 아니라 <워더링 하이츠>라고 쓰는 것이 왜 중요한지 열심히 설명하는데, 뭐 나로서는 <폭풍의 언덕>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어쨌든 그 집에서 두 대에 걸친 ‘폭풍‘이 휘몰아치기는 하니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폭풍의 언덕>이라는 제목이 이 소설의 의미를 ‘불 같은 연애‘의 소설로 좁히는 느낌이 없지 않다.

다시 읽으면서, 히스클리프가 내 기억처럼 목숨을 건 음울하고도 낭만적인 사랑의 화신이라기보다 무지막지한 악당이라는데 놀랐다. 히스클리프가 언쇼 가에 들어와서 성격이 비뚤어지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로 학대를 당한 건 맞다. 게다가 그 학대를 견디고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인 캐서린이 떠났으니, 사랑하는 사람의 관심이 자기에게서 떠나면 ‘(자기) 심장을 찢어발겨 피를 마셨을‘ 거라는 외곬수의 속에 악만 남는 것도 당연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가 언쇼 가와 린턴 가의 사람들(캐서린 빼고)에게 가하는 육체적이고 정서적인 폭력, 그냥 날 것의 폭력은 이것이 정말 사람 새끼의 짓인가 싶게 끔찍하다. 똑같이 어렸을 때 자기 친부와 히스클리프에게 심한 학대를 받은 힌들리 언쇼의 아들 헤어턴 언쇼와 비교해 보면, 히스클리프는 그냥 어린 시절 환경의 산물로 가엾게 여길 인물이 아니다. 그는 그냥 괴물로 태어난 거다. 좀더 나은 보살핌을 받았더라면 덜 끔찍해졌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괴물인. 복수라는 명목으로 남의 인생을 폭력적으로 흔들고 쥐어짜는 짓까지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저 퉁명스러운 성격의 시골 신사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을 거다. 아주 소수이겠지만 그런 악함을 타고 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캐서린 언쇼-린턴은 뭐라고 해야 할까? 여전히 양 손에 떡을 쥐고 어느 쪽도 놓지 않으려다 양쪽 다 망쳐 버린 나쁜 X 이 맞다. 그런데 역자 해설을 보면서 19 세기 후반의 여성으로서 캐서린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자기 생각을 말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저지르는데 주저함이 없는 건강한 소녀가 그 당시 여자의 미래를 결정하는 유일한 선택지인 결혼 앞에서 내린 결정, 그리고 그 결정과 자신의 히스클리프에 대한 사랑이 양립할 수 있다는 주장은 신분과 성의 한계 내에서 최대한으로 주체적으로 산 여자를 그려보게 한다... 아무튼 그렇다고 호감 쪽으로 돌아선 건 아니지만.

캐서린이 히스클리프를 선택했다면 해피엔딩이었을까? 둘의 똑같이 격한 성격 때문에 좋을 때는 그럴 수 없이 좋겠지만 부딪힐 땐 어느 한쪽이 부서질 때까지 심하게 부딪힐 거고 그런 상처가 하나 둘 쌓이다 보면 관계는 흉터투성이가
되어 빛이 바랬을 거다. 특히 히스클리프는 캐서린만 있으면 뭐가 어떻든 상관하지 않겠지만 캐서린이 히스클리프만으로 만족해 하는 걸 상상하긴 어렵다.

이만큼 나이 들어 이 소설을 읽자니 로맨스 자체보다 그 주변에서 또는 그 이후에 일어났거나 일어났었을 후폭풍에 더 신경이 쓰인다. 히스클리프 같은 외골수가 아닌 한, ‘사랑’이란 게 살아가는데 필요조건일 뿐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일까?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하자면, 노쇠해졌기 때문일까? 그래도, 히스클리프가 아무리 흉악한 악당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사랑에 경외감 비슷한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사랑’이 인생의 많은 필요조건 중 가장 중요한 조건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 아직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정말 훌륭한 이야기를 읽으면 작가가 궁금해지는데 이걸 정말 평생 외진 목사관 밖으로 몇 번 나가본 적도 없는 미혼의 젊은 여자가 썼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그녀가 아무리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해도 그 시절에 이 비슷한 이야기는 없었을 텐데. 훌륭한 소설을 쓰려면 많은 것을 경험해 봐야 한다고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이것은 무언가를 쓰고 싶은 나에게는 좋은 소식인가? 경험(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도 없는데 이런 소설을 쓴 건 그녀가 천재였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그건 아무 것도 써내지 못하는 나에게는 위로가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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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 : 2부 암흑의 숲
류츠신 지음, 허유영 옮김 / 단숨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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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명의 필요조건은 생존이며 우주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 우주에 존재하는 (또는 존재할) 수많은 문명은 시공간의 제약으로 간단히 소통할 수는 없으므로 결국 우주는 암흑의 숲이 된다. 암흑의 숲에서 마주치는 것들은 어떤 것도 그 의도를 알 수 없고 한정된 자원까지 고려하면 생존을 위해서 일단 먼저 공격하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우리(지구라는 행성의 인간이라는 종)에게 호감을 가진 외계인이 존재할 거란 상상은 순진하다.

2. 인간이 서로에게 그리고 자연에게 저지르고 있는 끔찍한 일들에 질려버린 일군의 사람들은 인간보다 뛰어난 과학기술을 가진 외계인(삼체인)을 심판자로서 지구로 부른다. 인류를 (거의) 멸종시키고 지구를 구하기(?) 위해. <킹스맨>의 악당이 사람들이 미쳐서 서로 죽이게 만드는 전파를 쏘고 다빈치코드 시리즈 중 <천사와 악마>의 악당이 인류의 절반을 쓸어버릴 바이러스를 퍼뜨리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소설이나 영화 속 이런 악당들은 무수하다. 그리고 언제나 격파 당해서 최종적으로 ‘악당’이 된다. 나는 항상 이런 악당들의 부지런함이 신기했다. 아니, 가만 둬도 알아서 망할 텐데 뭐하러 저리 애를 쓴담? 어쩌면 더 늦으면 지구라는 행성도 못 건질 것 같아서?

3. 사실 작가 자신도 이들 악당들의 의견에 왠만큼은 동조하고 있는 것 같다. 제삿날을 받아든 인간들이 패닉 상태가 되어 엉망진창 파국을 겪은 끝에 83억의 인구가 30억까지 줄어들고 난 후에 ‘문명의 자정작용’으로 스스로를 추스르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게 하는 걸 보면 말이다. 또 있다. 모든 면벽자들의 전략은 결국은 나 죽고 너 죽자였다. 뤄지까지도.

4. 뤄지가 어떻게 지구의 운명을 구하는지 소설의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뤄지가 지구를 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쓰고 읽을 사람도 남아있을 수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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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
류츠신 지음, 이현아 옮김, 고호관 감수 / 단숨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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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독특한 소설이다. 그리고 대단하다. 다 읽고 나서 멍해졌고... 2탄을 이어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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