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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더링 하이츠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38
에밀리 브론테 지음, 유명숙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11월
평점 :
<폭풍의 언덕>은 아마 여고 시절에 한 번 읽었을 것이다.
19 세기 말 황무지나 다름없는 곳의 외딴 사제관에서 짧은 30 년 평생을 벗어나 본 적이 거의 없는 젊은 여자가 쓴 소설이라고는, 그 당시에도 지금도 잘 믿기지 않는다. 히스클리프의 ‘심장을 찢어발겨 피를 마시는‘ 식의 사랑이 무서웠고, 이렇게 무서워서 숭고한가, 싶었던 것, 그만큼 캐서린 언쇼-린턴이 싫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며칠 전 TV 에서 줄리엣 비노슈와 레이프 파인즈가 각각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로 분한 영화 <폭풍의 언덕>을 잠깐 봤다. 히스클리프가 집을 나가고 캐서린이 결혼을 하고 히스클리프가 다시 돌아오는 부분이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캐서린이 더 싫었다. 줄리엣 비노슈는 뭘 해도 미운데 양극성 장애인 양 활력과 우울을 동시에 지닌 캐서린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레이프 파인즈는 히스클리프라기엔 너무 미끈해서 계속 보고 있기가 불편할 정도. 그래서 꺼 버림.
문득 다시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번역본의 첫 문단을 에밀리의 영어 문장과 비교한 끝에 <워더링 하이츠> 선택. 역자는 제목을 <폭풍의 언덕>이 아니라 <워더링 하이츠>라고 쓰는 것이 왜 중요한지 열심히 설명하는데, 뭐 나로서는 <폭풍의 언덕>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어쨌든 그 집에서 두 대에 걸친 ‘폭풍‘이 휘몰아치기는 하니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폭풍의 언덕>이라는 제목이 이 소설의 의미를 ‘불 같은 연애‘의 소설로 좁히는 느낌이 없지 않다.
다시 읽으면서, 히스클리프가 내 기억처럼 목숨을 건 음울하고도 낭만적인 사랑의 화신이라기보다 무지막지한 악당이라는데 놀랐다. 히스클리프가 언쇼 가에 들어와서 성격이 비뚤어지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로 학대를 당한 건 맞다. 게다가 그 학대를 견디고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인 캐서린이 떠났으니, 사랑하는 사람의 관심이 자기에게서 떠나면 ‘(자기) 심장을 찢어발겨 피를 마셨을‘ 거라는 외곬수의 속에 악만 남는 것도 당연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가 언쇼 가와 린턴 가의 사람들(캐서린 빼고)에게 가하는 육체적이고 정서적인 폭력, 그냥 날 것의 폭력은 이것이 정말 사람 새끼의 짓인가 싶게 끔찍하다. 똑같이 어렸을 때 자기 친부와 히스클리프에게 심한 학대를 받은 힌들리 언쇼의 아들 헤어턴 언쇼와 비교해 보면, 히스클리프는 그냥 어린 시절 환경의 산물로 가엾게 여길 인물이 아니다. 그는 그냥 괴물로 태어난 거다. 좀더 나은 보살핌을 받았더라면 덜 끔찍해졌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괴물인. 복수라는 명목으로 남의 인생을 폭력적으로 흔들고 쥐어짜는 짓까지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저 퉁명스러운 성격의 시골 신사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을 거다. 아주 소수이겠지만 그런 악함을 타고 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캐서린 언쇼-린턴은 뭐라고 해야 할까? 여전히 양 손에 떡을 쥐고 어느 쪽도 놓지 않으려다 양쪽 다 망쳐 버린 나쁜 X 이 맞다. 그런데 역자 해설을 보면서 19 세기 후반의 여성으로서 캐서린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자기 생각을 말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저지르는데 주저함이 없는 건강한 소녀가 그 당시 여자의 미래를 결정하는 유일한 선택지인 결혼 앞에서 내린 결정, 그리고 그 결정과 자신의 히스클리프에 대한 사랑이 양립할 수 있다는 주장은 신분과 성의 한계 내에서 최대한으로 주체적으로 산 여자를 그려보게 한다... 아무튼 그렇다고 호감 쪽으로 돌아선 건 아니지만.
캐서린이 히스클리프를 선택했다면 해피엔딩이었을까? 둘의 똑같이 격한 성격 때문에 좋을 때는 그럴 수 없이 좋겠지만 부딪힐 땐 어느 한쪽이 부서질 때까지 심하게 부딪힐 거고 그런 상처가 하나 둘 쌓이다 보면 관계는 흉터투성이가
되어 빛이 바랬을 거다. 특히 히스클리프는 캐서린만 있으면 뭐가 어떻든 상관하지 않겠지만 캐서린이 히스클리프만으로 만족해 하는 걸 상상하긴 어렵다.
이만큼 나이 들어 이 소설을 읽자니 로맨스 자체보다 그 주변에서 또는 그 이후에 일어났거나 일어났었을 후폭풍에 더 신경이 쓰인다. 히스클리프 같은 외골수가 아닌 한, ‘사랑’이란 게 살아가는데 필요조건일 뿐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일까?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하자면, 노쇠해졌기 때문일까? 그래도, 히스클리프가 아무리 흉악한 악당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사랑에 경외감 비슷한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사랑’이 인생의 많은 필요조건 중 가장 중요한 조건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 아직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정말 훌륭한 이야기를 읽으면 작가가 궁금해지는데 이걸 정말 평생 외진 목사관 밖으로 몇 번 나가본 적도 없는 미혼의 젊은 여자가 썼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그녀가 아무리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해도 그 시절에 이 비슷한 이야기는 없었을 텐데. 훌륭한 소설을 쓰려면 많은 것을 경험해 봐야 한다고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이것은 무언가를 쓰고 싶은 나에게는 좋은 소식인가? 경험(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도 없는데 이런 소설을 쓴 건 그녀가 천재였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그건 아무 것도 써내지 못하는 나에게는 위로가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