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시콘
맥스 배리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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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이 넘게 책장에서 이리저리 자리만 옮겨가며 꽂혀 있던 책이 어느날 눈을 자꾸만 잡아끌었다. <렉시콘>이란 단어를 말할 때 어감이 맘에 들었다. 영단어 lexicon을 내가 발음하면 아마 영어가 모어인 사람들은 대부분 한 번에 알아듣지는 못할 것이다. 한국어는 영어의 L과 R을 거의 같은 ㄹ로 발음하니까 Rexicon이라고 말했는지 Lexicon이라고 말했는지 헷갈려하겠지. 아니 Rexicon이라는 단어는 없으니가 Rexicon이라고 들었어도 Lexicon이라고 이해해줄까? -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사람을 설득하는 것은 말이고, 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어이다. 정말로 적절한 단어는 설득을 넘어 거부할 수 없이 몸이 움직이게 하는 명령이 될 수 있다. 단어를 가장 잘 다루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고, 그래서 이 소설에는 ‘시인’(진짜 시를 쓰는 건 아니고 상징적으로 부르는 말이지만)들이 사람들을 죽이며 돌아다닌다(직접 몸에 손을 대기보다는 자살이나 살인을 하도록 만든다)!
사람을 설득하려면 먼저 그 사람을 이해해야 한다. 시인들은 짧은 시간에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몇 가지 구조화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조합해서 그 사람이 (아마도 이미 정립된) 몇백 개의 범주 중 어떤 범주에 속하는지를 알아낸다. 그리고 그 범주의 사람의 머리뚜껑(내 표현)을 열게 하는 단어를 그 사람에게 시킬 행동과 붙여서 던지면, 뙇! 상대방은 정확히 시인이 원하는 행동을 한다. 누우라면 눕고 달라면 주고 잊으라면 잊고 죽이라면 죽이고 죽으라면 죽고.

참 쉽좋잉? 싶지만 물론 지난한 훈련이 필요하고 (일단, 미묘한 차이만 있을 뿐인 몇백 개의 범주와 그 범주 각각에 대응하는 단어의 목록을 외운다는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그게 정말 가능하다는 학문적 배경-심리언어학, 기타 등등-부터 배워야한다) 무엇보다 시인 자신은 이런 단어의 조작에 쉽게 설득당하지-’구부러지지’- 않아야 한다. 대략 넓게는 광고 좁게는 한 사람을 타겟으로 하는 가스라이팅에 대한 느슨한 은유이다.

설득-말이 뇌에서 일으키는 화학작용 같은 것, 신경언어학과 같은 개념을 설명하고 있으니 SF라고 분류할 수 있으나. 세계관의 내적 논리가 아주 잘 맞아들어가지는 않는다. 발화되는 단어를 ’듣는‘ 청각이 일련의 뇌활동의 시작이 되는 것처럼 죽 나가다가(예를 들면 상대의 모어가 아닌 언어로 상대를 구부리기는 쉽지 않다), 모든 단어의 끝판왕, 모든 범주의 사람을 한꺼번에 구부릴 수 있는 ’날단어’에 이르면 갑자기 보기만 해도 구부러지는 것으로 설정이 바뀐다? 마치 단어 자체가 실재하는 물리적인 힘을 가진 것처럼(뇌파를 바꾸는 광선이 마구 뿜어져 나오는 건가…?). 그래서 별점을 높게 주지 않음.

번역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판타지/SF에서 특히 열린책들이 출간한 책에서 자주 보는 번역가이고 늘 괜찮았는데 이 소설은 영 꽝이다. 지나친 직역이네 싶게 대화들이 매우매우 어색하고 대명사들이 무엇을 지시하는지 몇 번을 읽어도 애매한 부분들이 많다. 초벌 번역 받아서 그대로 둔 게 아닌가 싶을 정도.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정말 내 생각인 건지. 여러가지 말들에 영향을 받은 것 이상으로 내가 구부러진 것이라면 나는 나를 구부러뜨린 말과 그 말을 처음 발화한 사람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 건가. 스스로 생각한다는 건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그러라고 나를 구부러뜨리는?- 책이다.

또 하나. 시인들이 상대를 이해/파악하기 위해 던지는 중요한 질문이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왜 그것을 했습니까?‘이다. 대답하려고 열심히 생각해봤는데… 진심 모르겠다… 고로 시인들은 나를 파악할 수 없고… 나는 구부러지지 않는다… 가 아니라 나는 도대체가 나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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