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우가 김지완을 알게 된 건 졸업 즈음이었다. 강의계획서만 보고 신청한 교양 수업이었다. - P9

나은우는 김지완이 자신을 따갑지 않은 상태, 더할 나위 없이 딱 알맞은 부드러운 상태로 데려다줄 것임을 알았다. 김지완은 속이 꽉 찬 작은 열매 같았다. - P10

김지완이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더니 가방에서 플라스틱 병에 든 보리차를 꺼내 나은우 쪽으로 밀어 주었다. 드실래요? 딸꾹. 감사합니다. 예. 딸꾹. 보리차는 미지근했고 달았다. - P10

다. 나온우는 김지완의 말에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질문을 더 해서 대화를 이어가야 할지 잘 몰랐다. 나은우는 그런 것에 서둘렀다. 내가 관심 없는 것에 관심있는 상대에게 관심을 표하는 방법 같은 것에 대해 - P11

근데 난 사실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런 말을 할 때, - P16

그럼 넌 기대도 실망도 하지 않고 뭘 하니?
생각을 모아둬. 시간이 지나도 살아남는 생각들이 있는지, 그 순간에만 반짝거렸던 생각은 뭐였는지 생각하면서. - P17

반짝거리는 생각은 꽂힌 생각이나 다름없어. 순식간에꽂히고 순식간에 뽑혀. - P18

시간과 김지완과 손을 잡고 함께 나아가는 것 같았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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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때때로, 결별은 파괴적이다. 붕괴가위협적으로 닥쳐오는 것이다. 마치 J.-B.
퐁탈리스가 자신의 한 환자에 대해 한 말처럼. "그는,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당신을 떠나버리면 당신도빨려들어갈, 그런 모종의 붕괴 상태에 있다."" - P49

명백히 드러나는 바는 우리의 내밀한 사막,
우리의 근본적 불안이다. 우리가 감추고자 했던 저깊은 공허함과 연결되어 있다. 만일 누군가가 우릴떠난다면, 어쩌면 그건 우리가 어떤 사람이어서가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이 아니어서일지도 모른다. - P47

이 여행은 해방, 재충전, 내 몸과 머리를 완전히씻는 여행이 되어야 했다. - P41

버림받은 사람이 겪은 경험에서 사랑에 대한몇 가지 진실이 드러난다. 만일 결별을 당했다면,
우선 거기에는 심리적 차원이 있다. - P44

눈앞에서 완결되는 재앙을 바라본다는 것,
별들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본다는 것. 우리 이야기의결말을 지켜본다는 것, 우리 없이 이미 쓰인 다른이야기의 시작을 본다는 것.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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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끈기 있고하룻밤에 무너지진 않을 것이니."!
-니체, 『반시대적 고찰』 제2편

단절rupture이 깔끔한 절단coupure이면 좋을 것이다. - P9

사랑의 쓰라린 단절, 우울로 인한 희끄무레함,
무기력한 처짐, 주체의 소멸, 아니 그 삭제. 수증기가되는 듯한 기화. 밀도를 잃어버리거나, 그 반대로유예가 없는 고통, 그 생생한 감각과 섬광들. - P13

우리는 모두 삶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며,
우리를 고문하는 경험들을 거쳐 간다. 하지만 모두가같은 방식으로 반응하는 것은 아니다. 내적으로약한 사람도 있고, 강한 사람도 있다. 어원이일깨우듯 고문torture 이란 곧 쥐어틀기 torsion다. - P15

만일 어떤 사건이 단절을 초래했다면, 그게 그저방아쇠 또는 구실에 불과했을까? 내밀한 균열은 이미오래전 존재했고, 나라는 자아의 통일성이 서서히와해되다 급기야 터진 것 아닐까? - P19

지금까지 나를 먹이고 감싸고 보호하던것이, 이제 나를 잡아먹고 나를 소모한다. - P31

주체가 자신보다 훨씬 강한 무언가열정이나고통의 부름을 받거나, 그것에 사로잡히거나매료될 때, 자신보다 더 우월한 힘-사랑, 고통,
슬픔에 자신을 빼앗기고 다시 정의될 때, 그는 더이상 지금까지의 자신에 단순히 만족할 수 없게 된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다른 누군가가 되어야 한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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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약속의 이행 여부보다 중요한 건 그러한약속이 이루어지게 된 배경과 맥락, 그리고 믿음의 수행으로써 약속의 면면이다. 이를 살피는 작업은 백온유가 약속이란이름 아래 매듭지어둔 소설적 관심의 근원을 파악하는 과정과다르지 않을 것이다. - P329

『약속의 세대의 수록작들은 대체로 ‘가족‘을 그리고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은 태어나 처음 만나는 일차집단인 가족으로부터 비롯된 문제 상황에 놓여 있다. 성인이 된 지는 한참이지만유년의 경험이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환기되어 인물들의 현재에 영향을 끼치는 셈인데, 이는 동화와 청소년소설로작가활동을 시작했으나 이제는 장르적 경계 구분이 필요치 않은 활발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백온유의 작품세계 안에서도자연스러운 흐름이다. - P329

그 누구도 아쉬워하지 않고 애틋해하지 않는 삶"(152쪽)을 살다 간 한 사람에 대한 어렴풋한 연민이다. 누구도 바라지않았으나 조금 더 생을 이어나가기를 원했던, 그러나 끝까지그 욕망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던 할머니의 갈망의 흔적을 연수만이 이제야 조금 이해한다. - P331

이는 고통과 슬픔을 회피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절대 정답이 될 수 없으며, 슬픔을 오롯한 슬픔으로 감내하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한 일임을 알고 있는 이들의 선택이다. 소설의 말미에서 두 사람이 오래전 화재 참사 현장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큰 울림을 주는 건 그러한 이유에서다. -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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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벽장 안에 들어가 잠들기를 좋아하는 하나의 습관이 떠올랐다. - P298

행자스스로 행복한 사람.
감히 내가 행복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려도 되는 것일까. - P300

어쩌면 나는 여전히, 오래전 불길 속에 던져버렸다고 믿었던 지푸라기 왕관의 잔해를 머리 위에 얹어놓은 채 살아가는것일지도 모르겠다. 다 타버려 모양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지만, 그 흔적만은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나를 놓아주지 않고있는 것일지도. - P301

그 모든 죄와 사랑의 한중간에 함께했던 그 이름을, 지금도 어딘가에서 숨 쉬고 있을 당신의 이름을 조용히,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불러본다. - P302

언제나 윤동주의 옆에 서 있던 남자, 비가 오면 우산을 들어주고 날이 맑으면 양산을 들어주던 남자, 변희숙의 차에 호작질하던 남자, 남편이 실종된 날, 요코하마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던 그 남자. - P319

요코하마를 드나들다 타국에서 세상을 떠난 신주. 요코하마를 찾아갔다 행방불명이 된 필주, 그 둘의 부재로 가장 큰이득을 본 사람은・・・・・・ 윤동주였다. - P323

광자는 흥신소에서 전달한 사진 속 중년 여자의 눈을 오래도록 노려보았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고난이덕지덕지 껴 있고 불길하기 짝이 없는 그 눈빛만은 여전했다. - P325

사는게 원래 이상한 일로 가득 찬 것 아니겠는가. 때로는 그예상할 수 없음이 빛나는 환희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고. - P329

하나가 들고 온 사치코의 일기를 읽고 난 후, 동주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제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는사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속죄해야할 때가 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 P334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을 만큼 간절하고 애달픈, 더 잘살고싶은 사람들의 마음이 모이고 엮여서 만들어진 왕관이라고.
아주 가볍고 초라해 보일 수도 있지만 실은 매우 질기고 단단한, 그런 왕관." - P345

그때의 나는 내가 좀 지겨웠다. 변하고 싶었고, 좁디좁은나를 벗어나 세상의 그림자를 담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먼 곳으로 가, 완전히 낯선 곳에 깃발을꽂고 싶었다. -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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