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괴로움을 온전히 대면할 시간이 필요하다." * 임현

"문장에 소리가 있으면 좋겠다.
소리를 닮은 문장이 아닌, 소리가 들리는 듯한 문장이 아닌,
실제로 소리가 깃든 문장이 있으면 좋겠다." 정용준

아무 때나 잠들고 아무 때나 일어나는 내가, 누가 보는 데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지 못하는 내가 노동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 행위들을 통해 적은 임금이라도 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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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울 낙樂에 수컷 웅雄.
즐거운 수컷, 그게 내 이름이다. 이름을 지을 때 어른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셨던 걸까? 우스운 일은 성격이 정말 이름 뜻 그대로라고 주변의 평가를 받곤 한다는 것이다.

헤어지는 순간에도 여자친구가 하는 말은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했다. 서로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사랑에 선행되어야 한다면, 헤어지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체념이 들었고 더는 잡지 못했다.

"솔직하게 말해줄까? 여름방학이면, 주변동네 초등학생들한테 티켓이 꽤 팔리거든.
방학 숙제로 ‘미술관 가기‘가 꼭 있잖아. 미라보다 더 잘 팔릴 게 뭐 있겠어?"

"그럴 것 없어. 한껏 사랑받았던 여자야.
남편이 자기 저고리도 덮어주고 편지도 써서관에 넣어줬던걸, 그 당시 양반가 사람이면얼마나 팔자 좋은 거야? 낙웅 씨랑 나보다훨 낫지. 양반도 장티푸스는 못 피했지만 말야."

휴, 나란 남자, 어떻게 귀신까지 실망시킨걸까.

"그 파경이 맞긴 한데, 요즘은 부정적인느낌의 말이 되어버렸지만 옛날엔 꽤 낭만적인 풍습이었어. 연인들이 헤어질 때 거울을쪼개어 한 쪽씩 증표로 나눠 가졌던 거지."
"네? 저 두꺼운 금속을 쪼갠 거예요?"
".………아니, 저건 원래 저렇게 주물한 거지.
설마."
"아."
"사랑이 없었다면 함께 묻히지 않았을 물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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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자 물이 샜다. 처음에는 똑, 똑, 떨어지던 것이 나중에는 거실 천장에 구멍이라도 뚫을 기세로 엄청나게 급하게 냄비를 받쳐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종일 물을 퍼내고 바닥을 훔쳐 내다가, 저녁이 되어 비가 그치자 구와 나는 거실 바닥에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누운 채로 텔레비전을 켜 보니 세상이 망해가고 있었다. - P35

얼마나 더 나빠져야 세상이 망할까? 자려고 누웠을 때 내가 물었다. 나도 궁금해. 어둠 속에서 구가 대답했다. 이곳에 온 뒤로 우리는 단 한 번도 음악에 대한 얘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구는 기타를 팔아 버렸고 나는노래는커녕 흥얼거리지조차 않았다. 매일같이 하던 일을 한순간에 멈춰버리다니, 이상하지. - P39

내가 처음으로 파견된 집은 삼대가 사는 아파트였다. ‘이경순, 82세, 병환으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 바다로 가고 싶음. 고객 정보란에는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 P43

저희가 어머님을 막지 않는 것이 냉정해 보일지 몰라도요, 하고 그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던 사위가 입을 열었다. 이게 우리의 최선이었어요. 이해합니다. 내가 대답했다. 매뉴얼에 나와 있는 대답이었지만, 실제로도 나는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언가를 사랑하다가 그만두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 P47

둘째 날 나는 해파리로 변해 가는 김지선 씨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김지선 씨는 언제부터 김지선 씨가아니게 되는 것일까. 인간에서 해파리로 넘어가는 정확한 시점은 언제일까. 얼굴이 지워지는 순간? 심장이 사라지는 순간? 아니면 뇌? 해파리로 변한 인간에게서 인간의 흔적을 찾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일까?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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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끔 그때의 네가 창을 흔든다
그때 살던 사람은 이제 흉부에 살고
그래서 가끔 양치를 하다 가슴을 쥔다
그럴 때 나는 사람을 넘어 존재가 된다

대문은 집의 입술, 벨을 누를 때
세계는 온다 날갯짓을 대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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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로운 오후, 나는 빵집 카운터에 엎드려 있었다.
한낮인데 이렇게 어두운 것을 보니 곧 비가 쏟아지려나, 생각하면서 창밖을 보던 중 짧게 숨을 들이켰다. 무언가가 몸 밖으로 쑤욱 빠져나가는 듯한 기묘한 느낌이들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내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 P9

나는 문을 열고 달려 나가 길거리에서 유령을 붙잡았다 - P12

유령? 언니 왜 혼잣말을 하고 그래? - P14

유령을 통해 정수와 대화할 수만 있다면, 나는 묻고싶은 것들이 많았다. 돌아오지도 않는 대답을 기다리는사이 계절이 여덟 번 바뀌었다. 나는 이제 혼잣말이 어색하지 않았고, 정수 앞에서 울지도 않았다. - P18

잠시 뒤에 내가 말했다. 싫어. 유령이 말했다. 오래전부터 나는 하기 싫은 일이 있을 때마다 몸이두 개이길 바랐지만, 정작 생겨난 두 번째 몸은 아무 도우도 되지 않았다 - P20

나는 유령의 우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에게 도달하지 못한 감정들이 전부 그 안에 머무르고 있었다. 나는손을 뻗어 유령의 두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손에 닿지는 않았지만 분명 따뜻했고, 너무나 따뜻해서, 나는 울 수 있었다. 대체 어떤 유령이 눈물까지 흘리는 거야. 내가 말했다. 나는 유령이 아니니까.
유령은 우는 와중에도 그렇게 말했다. 잠시 뒤에 유령이 나를 끌어안았는데, 그것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받아 보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전한 이해였다. 여기까지인 것 같아. 안긴 채로 내가 말했을 때 유령은 그래,
라고 대답해 주었다. - P28

특별할 것 없던 오후, 유령은 내 어깨에 기대어 있다.
가 스르르 사라졌다. 사라지기 전, 유령은 내 귀에 대고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의 형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꿈처럼 아름답고 깃털처럼 부드러운, 물고기처럼 유연하고 흐르는 물처럼 반짝이는 유령의 마음이었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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