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나를 만들 때 빠뜨린 게 있다면 그건 분명 인내심일 것이다. 엄마가 종종 하는 이야기가있다. 이제는 롯데백화점이 된 상계동 미도파백화점에서 나를 잃어버렸던 이야기다. 지금 내 나이쯤되었던 젊은 엄마가 세 살짜리 나를 데리고 백화점에 갔다. 엄마 손을 꼭 잡고 한참을 돌아다니던 내가 목이 마르다고 하자 엄마는 바로 앞에 보이는빈 의자에 나를 앉혀놓고 물을 받으러 갔다. - P12

차갑게 신선해진 나는 다시 뜨거운 것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떠난다. 뜨겁게 일하고, 뜨겁게 화내고, 뜨겁게 아프고, 뜨겁게 즐겁다가 그 모든 것들이 너무 뜨거워서 견딜 수 없어지면 돌아와 와작와작 깨물어 먹을 것이다. 죠스바를, 캔디바를, 수바바를 비비빅을.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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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많은 부분을 활자에 의지합니다. 요즘 세대는궁금한 게 생기면 곧바로 유튜브에 검색을 한다는데, 저는 서점으로 달려갔습니다. 서점에 가면 모든 지식이 다있었습니다. 활자는 지식이자 도구이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동아줄이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부분을 활자에 의지합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은 날이 있을까요? 아마없을 겁니다. 집과 작업실에는 수천 권의 책이 나를 둘러싸고 있고, 저는 그 안에서 살아갑니다. - P40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펼치고, 시간이 날 때마다 글을씁니다. 메모 형태의 글을 쓸 때도 있고 소설을 쓸 때도있습니다. 글쓰기에도 하나의 원칙이 있습니다. ‘쓰고 싶을 때 자리에 앉는다‘입니다. 쓰고 싶지 않은데도 마감때문에 억지로 자리에 앉으면, 결과가 좋지 못했습니다.
그럴 때는 산책을 하거나 책 속으로 여행을 떠나거나 잠깐 눈을 붙입니다. 그러다 보면 최소한 하루에 몇 번은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그때를 놓치지 않고 앉아서 작업을 시작합니다. - P40

충분히 평범해. 너처럼 평범한 순간을 모아 두는 창고가 있어. 거기에 들어가면 너 역시 아주 평범한 순간 중하나가 될 거야. - P44

종이에다 쓸데없는 그림을 그리고, 종이를 낭비하고,
쓸데없는 생각을 해서 종이에 쓰고, 종이를 낭비했어요.
핵폭탄 대신에 팝콘 폭탄을 만들면 어떨까요? 가난한 지역에 미사일을 쏜 다음에 상공에서 팝콘이 튀겨지면 어떨까요? 에스컬레이터에서 결혼식을 하면 어떨까요?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결혼식, 에스컬레이터 상행에서 주례사가 끝나고 하행에서 퇴장하고, 지하철 타고 곧장 신혼여행. 식사는 없어, 배고파도, 음료는 없어, 목말라도. 그냥 축의금만 계좌로 부쳐 주고 집으로 돌아가세요.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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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에서 판매하는 도시락, 삼각김밥, 샌드위치, 햄버거, 우유 같은 상품은 유통기한이 지나면 어떻게 하나요?
어떡하긴. 모두 버린다. 편의점 점주들은 그것을 ‘폐기 났다’고 말한다. - P138

한때는 "먹는 것 버리면 벌 받는다." 하면서 요구르트 하나라도 빠뜨릴라 바리바리 가방에 담아챙겨 가더니, 어느 순간부터 포장을 거칠게 뜯어음식물 쓰레기통에 휙 던져버리더라. 바로 그 순간이 ‘편의점 인간‘이 되어가는 시작점이자 열정적 사랑의 유효기간이 끝나는 종착역이다. 상품에 감정이 없어지고 폐기에 무감각해진다. - P140

누군들 눈물 젖은 밥이 없을까. 오늘도 누구는삼각김밥 한 귀퉁이를 서둘러 베어 물고, 누구는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을 버리지 못해 챙겨 가고,
누구는 폐기 처리된 삼각김밥을 먹으며 시급 만원이 채 되지 않는 편의점 알바로 하루를 버티고, 누구는 삼각김밥으로 만든 어설픈 참치죽을 먹고 일터로 향한다. 오늘도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 P146

이제 편의점 10년 차 점주가 되었지만 여전히봉달호 씨의 하루 세끼 주식은 폐기 식품이다. - P156

● 2021년 7월부터 GS25가 새로운 서비스를이작했습니다. 안 팔려서 남은 삼각김밥과 도시락등을 중고거래 플랫폼 ‘당근마켓‘에 내놓을 수 있도록 업무 협약을 맺은 것입니다. 신박하군요. CU와세븐일레븐도 비슷한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지구인다워지네요 - P170

기회가 닿은 김에 말하자면, ‘이런 것은 좀 삼가 주셨으면‘ 하는 편의점 에티켓이 있다. 상품을집어던지듯 계산대 위에 올려놓는 분들이 있다. 그냥 자연스럽게 놓으면 될 텐데 유독 그러는 손님이있다. 탁탁 집어던진다. 삼각김밥인 나는 그런 일을 당할 때마다 온몸이 쑤시고 아프다. 비록 1,200원짜리 삼각김밥이지만 나에게도 자존심이 있다.
편의점 근무자 입장에서도 ‘이 양반이 왜 이러나?‘
싶은 심정일 게다. 신용카드나 동전도 그런 식으로툭툭 던진다. 유독 말이 짧아 "어이, 계산!" 하거나
"담배 하나 줘!" 하는 손님도 있다. 편의점 계산대에 이런 문구를 붙여놓은 점포도 많다.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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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야 살겠더라고요."
그들은 그렇게 재난을 묻었다. - P96

오래전 나는 실제 리프트 추락사고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사고를 당한 이는 내가 야학에서 한글을 가르치던 학생이었다. 장애인 이동권을 요구하는 집회를 마치고 서울역에서 리프트를 타던 그를 동료가 우연히 촬영하던 중에사고가 일어났다. 그는 100킬로그램이 넘는 전동휠체어에 짓눌리며 시멘트 계단에 머리를 부딪쳐 두개골에 금이가는 중상을 입었다. 무엇보다 섬뜩했던 건 그날 그 리프트를 탄 것이 그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것은장애인들만의 폭탄 돌리기 같았다. 그가 사고를 당한 것도, 그가 살아남은 것도 그저 우연처럼 보였다. - P147

"만날 변호사 끼고 살면서 그런 것 하나 해결 못해줍니까?" - P153

"저는 이렇게 가더라도 어머니께는 임대아파트를 드려서 저와 같이 되지 않게 해주세요."
그는 이 유서를 사람들이 잘 발견할 수 있도록 망원유수지의 정자에 놓아두었다. - P163

죽음이 문간에서 아귀를 벌린 채 기다리던 시대에 애도는 금지되었다. 아버지는 당신이 배운 대로 딸을 보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학습할 기회가 없었던 나는 그날 아침 아무런 준비도 없이 28년을 함께 살았던 언니와무참히 이별하고 말았다. - P173

"어려울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어요."
야학 교사가 말했다. ‘방법이 없다‘는 걸 받아들이는 데석 달이 걸렸다. 그 말은 새삼스럽게 뼈아팠다. 방법이 있었다면 어떤 부모가 자식을 시설에 보냈을까. 방법이 단하나라도 있었다면 어떤 부모가 자식을 살해하고 자신도죽기를 기도했을까. - P199

나는 빠르게 인간의 마음을 이해했다. - P203

"누구나 한번씩 그런 때가 오잖아요. 스스로 다짐할 때.
자기 변화가 올 때."
그는 곧바로 학원에 찾아가 운전연습을 했고 마침내 차를 끌고 도로로 나왔다.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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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자마를 입고 내내 책만 들여다보는 동거인이지만 밖에 나가면 제법 번듯한 진행자이고 작가 선생님이다. 번듯함의 뒤편에는 준비물을 잘 빠뜨리고 약속 시간을 헛갈리고허둥지둥하는 모습이 있다. 그 간극은 매끄럽게 사회생활을 하는 듯 보이는 누구에게나 실상 존재하는 이격이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만 들키는 작은 틈일 것이다. - P231

다가올 50대에 나는어떤 차를 원하고 또 선택하게 될까? 더 크고 더 비싼 차라면 도로 위에서 나를 ‘김 여사‘로 깎아 내릴 준비가 된 무례한 운전자들로부터 갑옷처럼 지켜줄까? 생산과 주행 과정에서 환경에 영향을 덜 미치는지가 중요한 고려 조건이 될것 같다. 분명한 건 자동차가 현대인에게 움직이는 ‘자기만의 방‘이라는 점이다. 좋은 차는 여자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준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의 힘으로, - P241

‘정상가족‘이라는 단어가 그때처럼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없었다. 나는 그가 자기 삶을 비교할 대상이 나 같은 싱글이 아닌, 자신의 남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 셋을 낳아 키운다고 직장을 그만두는 남성이 있던가? 애가 셋이라고 9개월 동안 혼자의 시간을 갖지 못하는 아빠가 있던가?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남성들이 개인 커리어에서 바꾸고 희생하는 부분이 뭐지? 가정의 ‘정상성‘이란 왜 늘 여성의 일방적인 희생과 헌신으로 만들어질까? -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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