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에 발표되는 단편소설은 대개 200자 원고지 80 매 안팎의 분량이다. 이 분량은 문예지 중심으로 전개된 한국문학의 특별한 역사 안에서 형성된 것인데 그 과정에서 서구문학의 노벨레(novelle)나 쇼트스토리(short story)와는 조금 다른 미학적 형식을 이루게 된 것 같다. - P145

말을 바꾸면 한국에서 단편소설은 그렇게 녹록하고 편한 읽기의 대상이 아니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훈련된 독자라고 할 수 있는 문학평론가 후배가 하루에 읽을 수 있는 단편소설의 최대치를 서너편이라고말한 것을 기억한다. 실제로도 한편의 단편소설을 제대로 음미하려면최소한 두번의 읽기는 불가피한 것 같다. 서사 정보의 압축과 지연을통한 독자와의 머리싸움이 문체의 층위에서 세심하게 의미를 쌓는 직업과 동시에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파에 누워 편히 읽기에는 맞춤한 양식이 아닌 셈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수고가 문화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기가 곧 한국문학의 황금기였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문예지의 단편소설이 일간지의 월평란에서 다루어지며 화제를 생산하곤 하지 않았나. - P146

서점 가는 일이 피하고 싶은 숙제처럼 된 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20년 넘게 책 만드는 일 언저리에 있었으니 서점은 어느 모로 보나 내일상의 가장 친근한 공간이어야 맞지 싶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교보문고에 한시간쯤 있다보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고 가슴이답답해진다. 눈에 띄는 책이 있으면 판권란이나 디자이너 이름에 눈이먼저 가고, 그 와중에도 내가 만든 책의 행방을 좇느라 마음 한구석으로는 금세 피곤이 쌓인다.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새로 나온 책을 만나고 읽고 싶은 책 앞에서 가슴 설레던 그 시간이. - P151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게 내 탓인가. 내가 내쫓았나. 그녀는 이불을 발로 차며 돌아누웠다. 노인은 방을 유지할 능력이 없었을 뿐이고 내게는 있었을 뿐. 그냥 그것뿐. 만사가 그뿐 - P161

우리 세대의 성장기에 ‘자아‘라는 말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1919)과 함께 도착했을 수도 있다. - P136

정말 그렇지 않은가. 짜장면 배달부는 누가 부르기 전에는 갈 수 없다. 주문전화가 와야 한다. 혹은 장난전화나 잘못 걸려온 전화도 있을 수 있다. 어쨌든 누가 불러야 간다. (그런데 그 착한 사촌은 누가 불렀기에 그렇게 서둘러 갔나?) 그리고 누가 부른 다음에는 서둘러야 한다. 곧 가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서둘러 가도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한다. 짜장면 배달부는 늘 늦는다. 우리는 전화를 하고, 중국집의 대답은 똑같다. 지금 가는 중이라고, 그러니 누구든 퉁퉁 분 짜장면을 받아든다. - P191

조용히, 그녀는 숨을 들이마신다.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아니, 무언가에 항의하듯 그녀의 눈길은 어둡고 끈질기다. - P227

그러니까 삶은 살아내는 것이 아니다. 그때 삶은 한없이 축소되고거짓 고통과 거짓 약속, 거짓 환상으로 물든다. 인생으로부터 잘려져나와야 한다. 아니, 인생을 ‘나‘로부터 잘라내야 한다. 자발적인 격리말이다. 무언가가 있다면 ‘인생과 나 사이‘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그래야 하는 것일까. ‘보기‘ 위해서다.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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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를 쓰겠어!
라고 결심하니 써지긴 써진다.
매일 다짐해야겠다.
쓰레기를 쓰겠어! - P31

어느 나라건 ‘헌정 역사상 최고의 여풍‘이라는 수식어를 달고서, 정원의 1/3 정도를 최대의 여성 머릿수로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건 로스쿨 제도 도입 전, 판사신규 임용을 사법연수원 성적순으로 했을 때는 신규 판사임용에서 여성 비율이 87.5%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커리어출발 시점의 똑똑한 젊은 여성들은 어디론가 쉽게 사라지고고위 임명직은 30%가 최선인 현실 속에서 ‘9명 중 9명‘은 여전히 먼 미래, 그래서 기회가 닿을 때마다 더욱 입 밖으로 내뱉어야 할 이상이다. - P64

검은색 카드키를 인식기에 대면 파란 불빛이 초록색으로 바뀌고 묵직한 출입문이 열린다. 층고가 높고 통유리로 되어개방감이 드는 널찍한 공간 안에서 노트북을 앞에 둔 사람들이 드문드문 자리를 차지한 채 모니터를 들여다보거나 조용히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좌석들 사이에 설치된 벽은 자기 자리를 엄격하게 구획하는 묵직한 파티션 대신 투명 아크릴 가림막이다. 여느 사무실의 라운지와 가장 다른 점은내내 음악이 흐른다는 것. - P75

일할 때의 거절은 내 영역을 지키겠다는 선긋기다. ‘철벽을 친다‘라는 표현은 대개 사람을 묘사할 때 부정적으로사용되지만, 반대로 경계선이 아예 없는 사람을 부르는 다른 말은 아마 ‘호구‘일 것이다. 좋은 사람과 쉬운 사람은 다른데, 거절을 못하다 보면 어느새 주변에 쉬운 사람이 되어있기가 쉽다. 그리고 쉬운 사람이 반드시 좋은 사람은 아니다. 일 잘하는 사람일 확률은 더 낮다. - P89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는 평생 세상 속에 머무르지못하고 떠돌던 아티스트가 온라인 공간에서 비로소 자기 자리를 찾게 되는 이야기다. 생전에 누리지 못한 명예와 금전적 혜택은, 그 가상 공간의 아카이브를 만들어준 제3자의 몫이 된다. 다행스럽지만 쓸쓸하고, 찬란하지만 씁쓸하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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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진실들은 머릿속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발바닥으로 디뎌봐야만 알게 된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뭘까? 그나라의 자연과 문화를 접하고 싶어서, 여행지에서 평소와다른 방식으로 반응하고 행동하는 나를 보려고, 혹은 그저복잡한 일상을 잊고 즐기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렇게 잘여행하고 돌아올 때 일상을 잘 사는 역량이 늘어 있기도 한다. 돌아와 계속되는 삶에서 만나게 되는 돌발 상황, 내 머리밖의 진짜 현실을 받아들이는 유연성과 적응력을 키우는 기회가 여행이기도 한 것이다. - P159

점점독립적이 되어가는 대신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법, 도움을 요청하는 법을 잊어갔다. 그 상태는 독립인 동시에 고립이기도했다. 엄마도 어쩌면 아픔 그 자체보다 자신의 아프고 약한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더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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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당신 좋을 대로 해." - P55

"그거 협박이야, 약속이야?"
"둘 다지." - P54

"있잖아, 폴." 그녀가 말한다. "가끔씩은 긴장을 푸는 것도 괜찮아. 그건 죄악이 아니잖아.",
"뭐가 죄악이 아니야?"
"행복한 거." 그녀가 내 손을 잡으며 말한다. "그건 죄악이 아니야." - P57

"그냥 전화 왔었다고 전해주세요." 라몬이 말한다.
PE
"그래." 나는 잠시 말을 멈춘다. "그런데 말이다. 바꿔줄 수도있는데."

"아뇨, 괜찮아요." - P75

"당신은 어때요? 나이 어린 여자를 사랑해본 적 있나요?"
"아." 그는 미소를 지었다. "몇 명은 됐었지 싶은데요." 그는내게 윙크를 했고, 그러더니 와인을 마저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음반을 바꿔 걸었다. - P107

"놀란 게 아니야. 행복할 뿐이지."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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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도쿄에서 책만 사온 게 아니었다. 결혼할 남자도 하나 구했다. - P45

첫사랑이 가슴에 영원히 기록되듯 역시 첫 출판사, 첫번역서여서 기쁨도 슬픔도 고마움도 서운함도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 같다. 잊히지도 않는 첫 번역서의 번역료 84만 원. 그다음 책들은 얼마를 받고 번역했는지, 어떤 편집자를 만났는지, 그때의 기분은 어땠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 P41

아, 그러나 쥐구멍에도 볕 들 날 있다 했던가, 꿈은 이루어진다 했던가. 기회는 정말 예고 없이, 어느 날 갑자기찾아왔다. 친구의 상사의 지인, 이런 식으로 몇 다리 건너알게 된 어느 소설가 선생님이 미천한 내게 번역 일을 할출판사를 소개해준 것이다. - P31

한다는 걸 알고 나면 "꿩 대신 닭 잡았구나" 하고 놀린다.
그들은 모른다. 꿩 대신 닭이 아니라, 꿩대신 봉황이었다는 것을.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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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뭐가 문제죠?"
문제는 그러니까, 우린 언제 다시 보죠?"
로버트가 주머니 속에서 꺼낸 열쇠고리에서 열쇠를 하나 빼낸다음 내게 주며 말했다. "당신이 좋을 때." 그는 미소를 지었다. - P103

"가자." 형이 내게 말하고 있었다. "가보자."
"싫어. 절대 안가."
"가자, 동생. 저 여자가 너를 원하잖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좋아. 좋을 대로 해."형은 모로 눕듯 진흙투성이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 여자들을 향해 헤엄쳐 갔다. - P139

톰이 고개를 저었다.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난 아무 말도 안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군." - P239

여름 내내 더위는 점점 심해졌다. 기록적인 육 주 동안 비가오지 않았다. 산골 지역에서도 농작물들이 말라죽고 있었고, 도시에서도 잔디밭의 잔디들이, 심지어 부자 동네에서도, 누렇게마르고 있었다. 그것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밤이 되어도 습기때문에 후텁지근해진 공기가 젖은수건처럼 피부에 들러붙었다. - P165

드림수화지난주에 린이 근무중인 내게 전화를 걸어와 저녁식사 데이트약속을 상기시켰다. 나는 반 아이들을 위해 창조적인 기억력에관한 수업을 준비하느라 센터의 레크리에이션 룸에 앉아 있었고내 옆자리에 앉은 몇몇 아이들은 의자에서 꼼지락거리며 『모비딕』 신판을 넘겨보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보며 미소를 지은 다음 금방 돌아오겠다고 했다. 중요한 전화란다, 나는 수화를 했다.
아이들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읽고 있던 책들로 눈길을 돌렸다. - P181

"저게 대체 뭐냐?" 벤틀리 박사가 식탁 저편에서 투덜거렸다.
"데이비드 보위예요."
"누구?" 박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SIMBAHASA
"아들은 식탁 좀 치워주지 않을래?" 어머니가 말했다.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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