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의 시절은 단단히 기억하지,
밀려온 진눈깨비조차참 따뜻한 나라라고-김명인의 시 「여수」 - P9

여수, 그 앞바다의 녹슨 철선들은 지금도 상처 입은 목소리로 울부짖어대고 있을 것이다. 여수만(灣)의 서늘한 해류는 멍든 속살 같은 푸릇푸릇한 섬들과 몸 섞으며 굽이돌고 있을 것이다. 저무는 선착장마다 주황빛 알전구들이 밝혀질 것이다.
부두 가건물 사이로 검붉은 노을이 불타오를 것이다. 찝찔한바닷바람은 격렬하게 우산을 까뒤집고 여자들의 치마를, 머리카락을 허공으로 솟구치게 할 것이다. - P9

・그만해요.
자흔은 내 등을 두드리며 속삭였다. - P13

자혼을 만나던 그 휴일 오후까지 나는 거의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내 결벽증은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만큼 소문이퍼져 있었다. 자취방을 거쳐 간 사람들이 저마다 나에 대한 말을 퍼뜨리고 다니리라는 생각이 내 초조한 신경을 들쑤셔놓았다. 나로서는 조금의 악의도 품고 있지 않은데 단호히 떠나버린 그네들, 다시 찾아오는 것은 고사하고 안부 전화조차도하지 않는 그네들에게 나는 은밀하게 상처받고 있었다. - P17

어째서 여수에 가야 한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치밀었으므로 나는 말을 끊어버렸다. 그곳에서 누구를, 무엇을 찾을 수있다는 말인가. - P23

이렇게 고요해질 통증인 것을, 지난밤에는, 또 수없이 반복되었던 그 밤들에는 이런 순간을 믿지 못했었다. 마치 밤이 깊을 때마다 새벽을 믿지 못하듯이, 겨울이 올 때마다 봄을 의심하듯이 나는 어리석은 절망감에 사로잡히곤 했던 것이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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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껏 분노해도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 P130

투병 후에는 세상의 감사 강요가 더 집요해졌다. - P131

아이러니하게도 충분히 분노해야 분노에서 벗어난다. 마지막 가루까지 불태우고 소진해야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다. 잿더미가 돼야 가벼워지고, 다시 어디론가 날아갈 수 있다. - P132

일을 통해 사람을 알아가면 좋겠다. 사람을 얻는 능력은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능력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극악의난이도를 자랑한다. - P139

커리어에 있어서 가장 큰 성장과 도약의 순간은 내가 촘촘하게 계획한 플랜 A에 있지 않고 계획이 틀어져서 경로를 수정한 플랜 B에 있기 때문이다. - P143

플랜 B는 단순한 정신승리가 아니다. 커리어와 삶을 빚어가는 태도이자 나침판이다. 그런 의미에서 플랜 ‘Be‘다 - P151

나는 매우 느린 사람이었고 내 암은 남들의 것보다 훨씬 지독했다. 평가와 비교는 병의 세계에서도 엄연히존재했다. - P156

어떠한 성취로도 만족하지 못했던 내가밥을 먹었다는 이유로, 5분이라도 집 밖을 나섰다는 이유로스스로를 칭찬해주기 시작했다. 내면의 꾸준함이 강해질수록 ‘남‘이라는 존재에 대한 기억은 흐릿해져갔다. - P159

성장은 정답을 잘 맞히게 되는 것이라기보다 어제보다 조금 덜 틀리게 되는 것이다. 오답보다 더 최악인 것은 오답이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뿐히 정답을 버렸다. - P164

안타깝게도 죽음은 내가 일을 하는 동안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시간은 계속해서 간다. 일을 하는 시간도 삶이고퇴근한 이후의 시간도 삶이다. 똑같은 삶이다. 일을 삶의 중요한 한 축으로 존중하고, 일을 하는 시간만큼은 그 시간을후회 없이 보낸다. 삶을 완성하는 축들은 무 자르듯 뚝뚝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일, 취미, 가족, 친구들, 커뮤니티 등 삶의 다양한 축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이지 제로섬 관계가 아니다. - P168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바뀐다. 결과를 듣기 전까지 나는 삶과 죽음의 ‘중첩 상태‘에 있다. - P171

그렇기 때문에 검진을 앞둔 전날, 내가 숨 쉬는 공기는 조금더 매서워지지만 나라는 사람은 조금 더 따뜻해진다. - P172

그러나 더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있었다. 생존율 50퍼센트를 위해 3기 치료를 받던 시절보다 생존율 15퍼센트를 향해발버둥치며 4기 치료를 받던 시절이 더 즐거웠다는 것이다. - P181

난소의 죽음은 품위 있는 죽음이어야 했다. 내가 여자로서 안고 살았던 기대, 불안, 가능성, 그리고 그 역사가 나무테처럼 난소에 있기 때문이다. - P199

하지만 신기하게도 인터넷이 확실하게 약속했던 불행은 몰려오지 않았다.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아직 오지 않고있다. - P201

네트워킹이라니, 무슨 미친 소리인가. 친하게 지내자고얘기하고 싶었는데 속세의 단어가 튀어나와버렸다. - P204

한편으로는 예순 살짜리영감이 몸에 들어 있는 것 같았고, 어떤 한편으로는 문학을좋아하는 소년 같아 보였다. 속눈썹은 나보다 길었고, 눈빛은 사슴처럼 깊고 그윽했고, 웃음은 너무 귀여웠고, 나는 갑자기 사랑에 빠졌고…………… - P214

험담을 하고 나니 좀 시원하다. 그의 모든 단점들을 오래오래 파헤치고 싶다. 언젠가 괴팍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서로에게 구시렁대고 싶다.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함께 남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시간 동안 나는 남편에대한 험담을 멈출 생각이 없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남편에게 다가간다. - P218

삶의 무게가 복리로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 나이 드는 과정이다. - P222

너무 많은 것들을 바라기 전에, 나이에 관한 글을 마친다.
와, 정말 마흔이 될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책이 출간된 2024년 12월에 진짜로 마흔이 되었습니다.) -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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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을 아침, 나는 1kg 더 희미해졌다. - P12

계절의 변화가 전혀 없는 곳에서는 시간도 조금 다르게간다. 우리의 기억은 계절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 P13

30대에는 일시적인 평화가 있다. 20대의 끝없는 불안감과 40대의 무한한 책임감 사이, 결혼식 행렬과 장례식 행렬의 딱 중간 어딘가,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는 평온한 일상이 잠시나마 존재한다. - P15

(나쁜 소식을 전하게 돼서 미안합니다. 당신 인생은 앞으로 큰변화를 맞이할 것입니다.) - P22

마리 퀴리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는지, 힘든 주제는얼굴을 보며 이야기하는 그의 방식 때문이었는지, 미술 작품들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곳에서 치료받고 싶었다. - P30

소리를 내어 말하는 순간, 그 지옥이 드디어 실존하게 될것만 같았다. 그래서 입을 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메모장에 적었다가, 지웠다가, 잠시 울었다가, 진정했다가, 다시 써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 P34

그렇게 온종일 리스트에 있는 사람들에게전화를 걸었고, 눈물을 게워냈고, 비워진 감정의 무게만큼다음 전화는 조금 더 가벼워져갔다. - P37

남의 엄마는 그토록 안쓰러워 보이면서 내 엄마는 왜 안 보였는지 모르겠다. 그녀가 떠나간 자리에 앉아보았다. 그곳에 앉으면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곳에 앉으면 저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의자를 내 체온으로 데우는것뿐이었다. - P49

이유 없는 불행이 힘든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신체적으로 힘들어서도 아니고 정신적으로 힘들어서도 아니다. 이유없는 불행이 힘든 이유는 내가 여태까지 살면서 진실로 믿고 있던 세상의 이치가 산산조각 나버리기 때문이다. - P54

삶은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또 배신했다. 이번에는 정말궁극의 배신이었다. 나는 너를 용서할 수 있을까. - P57

이런 일이 나한테 왜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돌이킬 방법은없었다. 대신 이 일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전적으로 내가 결정할 수 있었다. 두려움에 절인 피클처럼 물컹하게 누워 있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고, 바닷가로 걸어나와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조금이라도 더 느껴보려 하는 것을 선택할 수도있다. 정해진 결말이 있다고 해서 선택할 수 없는 건 아니다.
결말이 어떻든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인생을 완주하겠다는 결정도 선택이다. 이 선택이 열심히 살아온 내 인생에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책임이다. - P64

그렇게 나는 다시 삶을 선택했다. - P67

여기에는 내재된 가정이 있다. 건강은 개인의 책임이기에 본인이 최선을 다해서 관리해야 하고, 전적으로 관리가능하다는 가정이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관리를 못한 사람이고 사회에 기여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건강을 잃은사람은 자극적인 스토리텔링을 위한 최고의 오브제다. 생활습관이 안 좋았을까, 스트레스에 취약했을까. 운동을 안 했을까. 실험대 위에 묶어놓고 핀셋으로 여기저기 들춰본다. - P123

우리는 그저 운이 나빴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덕담보다는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고 연민보다는 응원을 해줬으면 좋겠다. - P124

나는 행복할 거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건강을 잃으면 다잃는다는 사회에 저항한다. 이게 내 투쟁의 방식이다. 비장한마음으로 토마토를 썰러 간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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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의 한숨처럼 쓸쓸한 바람이불었던 하루였어요"라고 원고를 쓰면 그 원고가 DJ나 MC의 말이 되어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게 감동적이었다. - P119

일은 일일 뿐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나도 그말의 의미를 안다. 그렇게 생각했던 일도 내게 있었고. 하지만 일로만 한정 지어 생각할 수 없는 일도있다. 나에겐 그게 그 11시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다. - P122

방송에, 라디오에,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드는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커서 하마터면 여전히 라디・오에서 일하고 싶어 하고, 라디오를 좋아하는 나를사랑하지 않을 뻔했다. - P124

지금도 변함없이 작가는 과실이나 정당한 사유 없이도 의사결정권이 있는 PD나 방송사에게 통고를 받아 해고된다. 달라진 건 표준근로계약서 내용에 의거하여 최소 한 달 전에는 ‘다음 달까지만일하십시오‘ 하고 해고 예고를 받게 된 점, 그리고드디어 방송국에서 일한 지 20여 년 만에 방송작가도 실업급여를 받게 된 점 정도다. 물론 표준계약서를 작성한 작가에 한해서. 아직도 ‘방송작가 집필표준계약서‘ 체결 비율은 26.8퍼센트에 불과하고,
표준계약서와 다른 자체 용역 계약서 작성 비율을합한다고 해도 53.1퍼센트만이 계약을 하고 일한다는 한 신문 기사는 여전히 형편없는 현실을 말하고있지만. * - P126

‘여기는 연희교차로 구둣방, 구둣방. 통신지사화재로 이 근방 통신은 거의 다 두절됐고, 우리는전화와 인터넷 아무것도 쓸 수 없다. 이곳은 아직따스하고 라디오가 있어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전달받을 수 있다. 진실을 알기를 원하는 생존자는 구둣방으로 오기 바란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 P135

그래서 아포칼립스 이후의 라디오는 음악을방송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지고 서로 별별 헛소리를 이어가다가, 좀비는 소리에 민감하기 때문에좀비와 함께 아포칼립스를 맞은 거라면 라디오는좀비가 출몰하지 않는 낮에만 틀 수 있다 뭐 이런얘기로 넘어가기도 했고.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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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그렇습니다. - P118

그때 씨앗을 버려서 그 자리에 무언가 자랐습니다.
그때 꿈을 베어내서 지금 소설을 씁니다.
그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서사랑이 아니란 걸 깨달았습니다. - P119

소설 (명사) 나를 살리는 일. 마법과 자유.
쓰다 (동사) 감정과 생각을 글자로 표현하다. 짐작과는다른 것이 나타나다. 나에게 가장 필요하다.
산책하다 (동사) 가는 길에 나를 버리고 돌아오며 다시채우다. - P121

사랑하다 (동사) 당신의 슬픔과 고통을 나에게 주세요.
홈 스위트 홈. 언제나 가장 잘하고 싶은 것. - P122

어떤 우울은 고독과 고립에서 상상을 찾는다. 어떤허무는 낙관으로 비약한다. 나를 열렬히 싫어하는 에너지는무언가를 뜨겁게 사랑하는 힘으로 치환되기도 한다. 나는 여전히 그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 - P125

소설을 쓰려면 커피와 랩톱과 혼자만의 시간과 소설을 쓰겠다는마음이 필요했다. 정말 그뿐이었다. 비싼 도구나 특정한 공간,
경력자의 교습이 필요했다면 아마 시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 P125

나는 나를 잘 알아서 단번에 나를 쓰러트릴 말이 무엇인지안다. 나를 일으키는 단 한 단어도 그것은 다시 나를 쓰러트릴 것이다. - P129

나는 나와 싸우려고 매일 밤 글을 썼다. 결국 화해하려고.
나는 나를 뿌리치려고 오랫동안 글을 썼다. 혼자 울고 싶어서.
나는 나를 부정하려고 계속 썼다. 부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을부정하다보면 찾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돌과 같은 긍정을. 그것을 찾아서 삼켜버리고 싶었다. - P129

나는 나를 모른다. 나는 때로 예측할 수 없는 일을 벌였다.
그런 나에게 절망한 적도 있다. 절망은 희망을 끊어버린다는뜻이다. 진짜 절망했다면 계속 쓰지 못했을 것이다. 한때 나는살고 싶어서 글을 썼다. 이제는 더 나아지기 위해서 쓴다. 소설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나에게는 소설이 필요하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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