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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 1
김별아 지음 / 문이당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진심통은 심장 부위에 발작적으로 생기는 심한 통증을 뜻한다고 한다. 그녀는 그 통증을 참고 참아내었다. 달다고 삼키지 않고 쓰다고 뱉지 않아 무뎌진 가슴팍에 모질게 찾아온 사랑이 불면 날아갈까 통증으로 얹힐때까지. 가슴에 돌덩이만큼 쌓아올린 애틋한 사랑으로, 그저 사랑이 아닌 '의'로 선명히 자욱진 생의 다른 이름으로 깍지를 풀지 않았던. 그녀의 진심통이 다 나았으리라 쉬이 짐작하지 못하겠다. 삶이 끝난다고 고통도 사랑도 끝난다고 믿기란 얼마나 쉬운일인가.
<미실>의 현란함과 요사스러운 쾌감을 들어낸 자리에 인간사의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한 달음에 읽히던 영상물같이 박진감넘치던 쾌가 사라진 자리에는 조분조분 걸어온 발자욱의 안간힘이 아로 새겨져 있었다. 그것을 고라고 한다면 <논개>가 술술 읽기 어려운 작품임에 이유가 되겠다.
김별아는 이름만 유명한 한 여인의 삶을 아주 차분히 그려내었다. 호들갑도 조바심도 내지 않고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일대기를 꽉 짜여진 서사와 조이고 풀어내는 단락들의 호흡조절을 통해 조선시대 여인에 대한 풍성한 텍스트이자 존경할만한 누군가의 상을 제대로 그려내지 않았나 하는 감상이다. 김별아 특유의 수사가 화려한 문장들은 여전하지만 수사를 위한 수사에 그친다는 생각에 들지 않는다. 한결 차분해진 어조다. <미실>에서 정신없이 심사의 굴곡, 모진 늪과 화려한 애정행각을 잰발걸음으로 따라붙었다면 <논개>에서는 눈발에 덮혀질까 모래에 아스러질까 희미하고 강단있는 발자욱을 화석처럼 새기겠다는 심사다. 천천히 긴 호흡으로 생을 쫓는 덕에 조금 지루해지긴 했다. <영영 이별 영 이별>로 골랐던 숨을 더 길게 들이 쉬고 내쉰다. 2권에 걸친 논개의 행적을 쫓는 일은 호기심만으로는 감당이 안된다. 더러운 세상에서의 고결한 사랑이라는 아주 로맨틱한 주제를 쫓기 위해서는 존경의 눈빛이 필요하다.
그렇다. 이것은 털어도 먼지 나지 않는 사랑이야기다. 분진이 가득한 전쟁터에서, 화염불의 지옥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고매한 사랑의 이야기다. 우리가 몰랐던 역사 속 여인네는 무던한 심성을 강하게 옥죄기 위해 신화같이 바튼 길을 걸었다. 적장의 장수를 안고 강으로 몸을 던진 기생의 이름이었던 논개는 '주논개'라는 성씨를 찾고 결코 담담하지 않은 인생의 사연들을 들려준다. 비탈길에서도 오롯이 빛나던 성정,운명의 모진 동앗줄을 거칠고 투박한 손으로 옥죄었던 사연들이 펼쳐지면 울컥한 심정이 아니들 수 없다. 모진 시련을 겪는 신화 속의 아이를 보듯 짚신에 끼워넣은 여인네의 운명이 다만 신파로 그치지 않은 건 작가의 미덕이다. 모진 시련을 겪은 여주인공이라기에는 너무 또렷한 눈동자를 가졌던걸까. 장수의 성장을 모듯, 학자의 집념을 보듯 논개의 삶은 뒤돌아 보지 않는다. 뒤돌아 보지 않는자는 귀신도 해하지 않는다는 어린 시절의 귀동냥을 또박히 새긴 걸음의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다.
불현듯 지펴진 사랑의 불씨도 그러하다. 젖어드는 마음이야 어찌할 수 없겠지만 그녀는 부나방처럼 서둘지 않고 은근한 불씨에 언 마음을 녹인다. 녹이고 고인 물이 말갛게 들여다 보여 설마나 하는 감정에 놀라지만 차분하다. 운명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조아림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는 논개다운 발현이다. 마치 사제 지간처럼 시작된 최경회와의 사랑이 그녀 인생의 줄기가 된다. 단단하고 두터워진 그루터기에서 아이처럼 천진하게 자라고 바라고 의지하는 그녀는 돌아보지 않고 사랑하리라는 마음을 단단히 품는다. 모든 비극은 타협하지 않는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더러운 세상사를,지난한 비탈길을 헤치고 나가는 힘을 사랑이라는 큰 믿음에서 얻는 그녀의 삶은 전장이라고 달라지지 않는다. 정해진 비극을 향해 달리는 이야기를 작가도,논개 그녀 자신도 그리고 독자도 감당해야 한다.이야기의 후반부로 갈수록 머리가 지끈 아프고 침이 바싹 마르는 것도 그 끔찍한 고통앞에서 몸부림칠 사랑의 고통을 보아야하기 때문일게다.
서슬이 퍼런 전쟁의 지옥도를 묘사하는 장면들은 호러영화에 버금간다. 잠시도 쉬지 않고 장면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전하는 문장들이 버거워서 넘기기가 힘들 정도이다. 특히 이야기의 말미에 펼쳐지는 눈물나도록 고통스러운 진주성 전투는 어떤 전쟁영화의 충격과 감탄,비탄과 감동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이다. 김별아의 숨고르기와 내뱉기가 성 안의 군민들과 같아서 눈앞에 떨어지는 불화살과 손톱끝에 피고름으로 걸린 흙더미를 보고 있는 기분이다.
오히려 마지막 시퀀스의 호흡이 조금 짧지 않나 싶었을 정도로 논개는 결코 격분하지 않는다. 바람이 불어 떨어지는 꽃잎의 아름다움이 아니다. 몸을 던지는 치마의 교태스러운 날림이 아니다. 강 위로 손을 뻗어 지탱하는 어떤 힘의 울림과 비등한 자기 앞의 생을 눈부시게 발현하는 찰나의 빛과 같은 경건함으로 고된 생을 등지고 사랑을 끌어 안는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가슴이 먹먹해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