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거짓말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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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나의 도시>가 전혀 달콤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확답과 같은 작품집이랄까. 오해로 지어 올려진 성채를 향한 망치질이랄까. 정이현은 분명하게 나는,스위트한 여자가 아니에요, 나도 닳고 닳은 여자에요! 라고 말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전작에서 배수아나 은희경의 흔적이 엿보이던 그녀의 이번 작품집을 읽고는 묘하게 그리고 강하게 천운영의 기운을 담고 있다고 느꼈다. 이런 식의 분류는 위험하긴 하지만 천운영의 강북감성이 무척 자극적이었다면 정이현의 어찌할 수 없는 강남스러움은 불편하고 불안하지만 천운영의 그것만큼이나 날 것의 생생함이 가득하다. 우아하게 포장된 어떤 형식들의 아우라를 넘어선 특유의 단정하고 세속적인 매력은 단편에서는 제대로 날이 선 칼같다.

30대 서울 여성의 감수성과 생활상을 가장 대중적으로 펼쳐보이는 작가라는 타이틀은 무수한 함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일단 쉽게 읽힌다는 장점은 깊이가 없다는 진부한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한정된 궤적을 맴도는 거리감은 단조롭다는 평가를 받기 쉽다. <달콤한 나의 도시>라는 타이틀이 역설적 의도의 한계를 벗어나자 못했던 것은 정이현이라는 작가가 그려낸 도시의 맛이 단순히달콤함이나 씁쓸함으로만으로 나뉘어져있지 않기 때문일게다. 읽는 재미나 묘사의 적확함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 없이 훌륭한 대중작가라고 생각했지만 왠지 야트막한 산만 오르려는 것같은 저자세에 대한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비교하자면 이번 작품은 정이현이라는 작가가 사실은 야트막한 산을 천천히 제대로 타고 넘는 야심가라는 것을 입증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녀가 타고 넘은 열 편이 단편들은 작고 야무지고 단단한 봉우리들이다. 섣부른 단언이지만 그녀의 봉우리들은 그녀가 쉬지 않고 백두대간으로 향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자전적 소설인 <삼풍 백화점>은 강렬하다. 계급적 사회에 대한 묘사도, 관계에 대한 성찰도 섣부르지 않는 담담함은 비극의 참담함을 오히려 도드라지게 한다. 서랍 깊은 곳에 넣어든 다른 세상으로 향하는 열쇠를 다시는 손에 쥐지 않는 단호함은 상처의 치유가 불가능한 시대를 사는 공통적인 트라우마가 아닐까 가슴이 아프다. 이 작품에서 정이현의 두 여성의 관계를 조밀하게 묘사하면서 서사 이외의 어떤 성취를 이끌어낸다. 직장 여성과 백수 여성의 저녁 풍경에 대한 묘사는 정이현 튿유의 프랜차이즈한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대목들이다.<삼풍 백화점>을 비롯 <위험한 독신녀>와 <오늘의 거짓말>들 대부분의 단편들이 부조리한 사회현상을 미시적으로 관찰하고 있다는 점 역시 주목할만하다. 여성의 성과 결혼, 연애와 사회라는 제도와 관계의 틈새를 파고들었던 <달콤한 나의 도시>가 세부묘사를 통해 얻어내었던 가장 눈에 띄는 성취를 이 작품집속의 단편들 역시 어렵지 안헤 이루어 내고 있다. 박진감이나 리듬감과는 거리가 있지만 매끄럽게 속을 향해 달려가는 사회의 다양한 지도들을 겹쳐내는 솜씨는 발군이다. 특히 < 그 남자의 리허설>은 주상복합 아파트에 같혀 살던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에 관한 궁금증을 가능한 모든 동선에서 바라본 정밀화다. 왜 지금 대한민국이 계급사회이며 신분사회인지를 섬뜩한 유머를 통해 역설하는 양채린의 이야기 < 위험한 독신녀> 역시 최소화한 연민으로 그려낸 시대와 세대의 자화상이다. 희비극이 뒤엉키는 은희경의 초기작들에서 보이던 냉소와 거침없는 위악의 쾌감은 없지만 분명 정이현은 부반장 같은 매력이 있는 작가다. 그녀의 소설들이 담고 있는 걱정과 위안은 마치 <비밀 과외>처럼 따뜻하다. 13만 7천 8백원의 잔고를 인출하는 소녀의 심장처럼 두근두근 헐떡이는 조바심과 잔소리들이 충분한 온기위에 보태어져 있어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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