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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 달라고 한다
이지민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4월
평점 :
이지민의 단편집 <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달라고 한다>는 마치 엄선한 베스트극장의 단막극 모음 DVD같다.
일단 제목들부터 흥미롭다.
짧지 않은 문장이지만 호기심을 유발하는 동시에 이야기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한 줄의 잘 쓰인 카피 같은 <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달라고 한다>를 비롯 <대천사>,<키티 부인>,<오늘의 커피>,<불륜 세일즈>등의 제목은 목차에서부터 흥미를 자극하지만 읽고나면 낚였다는 기분보다는 ' 이 작가 제목을 참 잘 뽑는구나' 하는 감탄이 들게 하는 적확한 제목들이다.
단편집에 수록된 대부분의 단편들은 경쾌한 블랙 코메디를 연상시킨다. 다소 숨이 가쁠 정도로 리드미컬한 문장들은 행간의 여운보다는 흐름의 속도감을 즐기는 편이 적합하게 구성되어 있다. 특히 첫 번째로 수록된 단편 <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달라고 한다>는 단편영화나 드라마를 만드는 기획자라면 페이지 몇 장을 넘기자마자 탐낼만한 재미가 분명한 작품이다. 본인이 봐도 잘난 남자와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 남자를 바래다주는 일을 위해 만나는 한 여자의 몇 달여간의 생활은 서울이라는 도시의 풍경들을 재치있게 소묘한다. 작가는 광화문 스타벅스와 부암동 근처로 짐작되는 주택가까지 이어지는 도시의 얼굴들을 세밀하게 스케치하는데 그 솜씨가 빼어나다.마치 그녀의 펜은 그녀가 걸어왔던 모든 길을 기억하는 것처럼.
이 작품을 비롯 대부분의 단편들은 굳이 신상명세를 읊지 않아도 선명하게 그려지는 캐릭터들을 가지고 있다. 어떤 남자 혹은 어떤 여자의 생활들은 대부분 그들의 취향에서 기인한다는 점은 동시대적인 공감대를 어렵지 않게 형성하며 이 소설집의 재미라는 큰 장점을 지탱한다. 키티, 타파, 오늘의 커피, 프렌치 비스트로등은 칙릿에 노골적으로 등장할 법한 소재들이지만 이지민의 소설집에서는 재미있게도 욕망의 매개체로 그려진다. 칙릿들이 브랜드에 품는 맹목적 지지와는 다르게 작가는 사물들 혹은 사물들을 대하는 연정을 서글프고 우울하게 그려낸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불륜 세일즈>와 <영혼 세일즈>로 이어지는 마치 연작같은 두 작품이다. 콘돔을 끼고 대리 기사에게 업혀서 집으로 돌아오는 남편과 매일 아침 모텔에서 정부와의 섹스를 치루는 그의 아내는 파편같이 이 도시에 박혀 있는 반짝이는 구성원들이다. 흔하디 흔한 아침 드라마에 나올법한 설정들을 상쇄시키는 이지민만의 매력과 필력을 욕망의 지점들을 살피는 관찰력이다. 작가는 매우 꼼꼼하게 도시의 관계들을 탐구한다. 이 점은 정이현과는 또 다르다. 도시 여성의 삶을 꼼꼼하게 살피고 감정의 지점들을 연결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보이는 정이현의 소설들이 쌀쌀맞지만 예의바른 여성적 매력을 지니고 있다면 이지민은 좀 더 쾌활하고 분방하다. 그녀가 그리는 여자들은 대체로 감정의 극단을 드라마틱하게 오간다.
여덟번의 성형 수술을 거치는 <대천사>의 주인공, 키티 캐릭터에 집착하는 <키티 부인>의 주인공, 마치 아파트의 티파티 같은 모닝 섹스에 집착하는 <불륜 세일즈>의 주인공, 그저 영양가 없는 사심만으로 카페를 차리는 <오늘의 커피>의 주인공.
이지민 소설 속의 그녀들은 정이현의 깜찍하게 영리해서 현실적인 도시 여성들과는 달리 주변의 누구와도 쉽사리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다. 그녀들은 불같이 단순한 감정에 사로 잡혀 자신의 일상을 한 순간에 바꾸어버리거나 빠른 속도로 다른 일상에 발을 들인다. 그 모든 동력은 욕망을 그대로 따르는 몸의 움직임이다. 코에 손을 대고 눈을 고치고, 팔뚝에 주사를 꽂는 미녀는 어느 순간 욕망이 일그러진 자화상을 마주치게 되고,새로 구입하기만 하면 소중한 것을 결코 잃을 일이 없어서 키티 인형만 74개를 가지고 있는 부인의 취향을 그저 소녀적이라고 하기엔 섬짓하다. 카페의 어느 공간보다 주인인 자신이 앉을 자리를 공들여 꾸미고 잡지책 속의 화보같은 일상을 꿈꾸는 그녀는 얼마전 까지 생활인이었다는 사실을 결코 알아낼 수 없이 무모해보인다.
그녀들은 욕망한다. 삶의 다른 순간들을 욕망하고, 시대가 원하는 아름다움을 욕망하고, 자신만의 공간을 욕망한다.
욕망의 지점들만 경쾌하게 나열해 놓았다면 이 소설집 역시 최근의 칙릿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새를 갖추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작가는 소설속의 주인공들이 어쩔 수 없이 치루어야만 하는 욕망과의 이별, 그 지점들을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잔혹한 결말을 통한 반전보다는 정말 우리의 일상이 그러하듯이 어떤 절정 이후의 먹먹함들을 모른채하지 않고 살피고 있는 것이다. 꼼꼼한 관찰력을 통해 얻어진 명민한 시각은 이러한 지점들에서 빛을 발한다. 세상의 모든 이별이 아리게 아프듯이 우리가 욕망과 이별하는 순간 역시 동일한 에너지를 요구한다. 사랑이 잊혀지듯 욕망이 빛을 바랄때 어쩌면 스스로에게 가장 말간 얼굴을 보일 수 있는 것이 이 도시를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 아닐까.하는 질문을 던지듯 작가는 공들인 세부 묘사를 멈추지 않는다. 마치 마지막 장면이 최고인 미니시리즈처럼 단단한 맺음새를 자랑하는 이지민의 또 다른 소설집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