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의 여행자 하이델베르크 김영하 여행자 1
김영하 지음 / 아트북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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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공간을 기억하는 방법은 여러가지다.

공간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들. 어색한 웃음과 자연스럽지 못한 동작,모든 사진마다 등장하는 브이자 손짓.

혹은

그 순간 들었던 음악일 수도 있다. 낯선 기차 안에 앉아서 들었던 살랑이는 바람같던 멜로디,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또렷하게 기억하는 노랫말, 그리고 낯선 거리를 고요히 울리던 목소리.

그리고 어떤 사람일 수도 있다. 어깨를 맞대고 언어보다는 눈으로 더 많은 대화를 나눴던 그 사람, 우연히 담뱃불을 빌리고 악수를 나눴던 사람, 한 순간 모든 감정을 송두리째 빼앗아 갈 정도로, 아무런 확신도 없지만 그저 그 뒤를 쫓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던 그 사람.

작가 김영하는 감각으로 공간을 기억해낸다. 손에 들려진 그립감 좋은 작은 카메라 한 대와, 불분명하게 시야를 넓히고 감각을 제어하는 눈동자, 그리고 이야기에 대한 근원적 욕망을 가지고 그가 만났던 사람, 만나고 싶었던 사람, 그 곳에 존재했던 사람, 혹은 그의 상상 속에서 탄생시킨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김영하를 좋아하는 많은 이들은 그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다. 단편에서 드러나는 예리한 생의 단면들을 포착하는 날카롭고 유머러스한 시선은 물론 <퀴즈쇼>나 <검은 꽃>등의 장편에서 느낄 수 있는 서사를 지탱하는 단단한 이야기의 매력은 단연 작가로서 김영하의 미덕이자 재능이다.

꽤 오래전 부터 그는 영화라는 매체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왔다. 영화와 관련된 에세이 집을 두어권 발간했음은 물론이고 최근에는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서 역할하면서 영화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표현했다.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지방의 여행기이자, 사진작가로서의 사진집, 실재와 허구를 뒤섞은 짧은 단편소설 그리고 카메라에 관한 에세이가 꼬리물듯 이어지는 이 책은 마치 한 편의 영화와도 같다.

삶과 죽음의 향기를 지닌 여행지에서 작가가 그려낸 단편은 수록된 사진들과 함께 기묘한 서정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이미지의 한계를 고정하면서도 배반하는 작업이다. 평범한 컷들은 사연을 담고 자극적이거나 낭만적인 이야기는 겹겹이 쌓인 슬픔을 슬라이드 처럼 펼쳐보인다.  단편 소설의 꼬리를 무는 사진들은 길고 사연이 많은 엔딩크레딧 처럼 감상 후의 질감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흑백과 컬러로 펼쳐지는 공간들은 강렬한 연상의 힘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반전같이 느껴지는 카메라에 관한 에세이는 디브이디의 코멘터리를 보는 듯 가장 사적이지만 동시에 가장 객관적이다. 이 책은 가볍게 읽기 시작하면 힘이 들어가고 책장을 덮는 순간 열게 되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마치 짧고 강렬한 단편 영화를 보았을 경우의 감상과도 같다. 기억의 순간들을 빠르고 강렬하게 재탐색하려는 욕망처럼 김영하의 여행자는 그가 감각으로 기억하는 순간을 다시 확인하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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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 달라고 한다
이지민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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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민의 단편집 <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달라고 한다>는 마치 엄선한 베스트극장의 단막극 모음 DVD같다.

일단 제목들부터 흥미롭다.

짧지 않은 문장이지만 호기심을 유발하는 동시에 이야기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한 줄의 잘 쓰인 카피 같은 <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달라고 한다>를 비롯 <대천사>,<키티 부인>,<오늘의 커피>,<불륜 세일즈>등의 제목은 목차에서부터 흥미를 자극하지만 읽고나면 낚였다는 기분보다는 ' 이 작가 제목을 참 잘 뽑는구나' 하는 감탄이 들게 하는 적확한 제목들이다.

단편집에 수록된 대부분의 단편들은 경쾌한 블랙 코메디를 연상시킨다. 다소 숨이 가쁠 정도로 리드미컬한 문장들은 행간의 여운보다는 흐름의 속도감을 즐기는 편이 적합하게 구성되어 있다. 특히 첫 번째로 수록된 단편 <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달라고 한다>는 단편영화나 드라마를 만드는 기획자라면 페이지 몇 장을 넘기자마자 탐낼만한 재미가 분명한 작품이다. 본인이 봐도 잘난 남자와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 남자를 바래다주는 일을 위해 만나는 한 여자의 몇 달여간의 생활은 서울이라는 도시의 풍경들을 재치있게 소묘한다. 작가는 광화문 스타벅스와 부암동 근처로 짐작되는 주택가까지 이어지는 도시의 얼굴들을 세밀하게 스케치하는데 그 솜씨가 빼어나다.마치 그녀의 펜은 그녀가 걸어왔던 모든 길을 기억하는 것처럼. 

이 작품을 비롯 대부분의 단편들은 굳이 신상명세를 읊지 않아도 선명하게 그려지는 캐릭터들을 가지고 있다. 어떤 남자 혹은 어떤 여자의 생활들은 대부분 그들의 취향에서 기인한다는 점은 동시대적인 공감대를 어렵지 않게 형성하며 이 소설집의 재미라는 큰 장점을 지탱한다. 키티, 타파, 오늘의 커피, 프렌치 비스트로등은 칙릿에 노골적으로 등장할 법한 소재들이지만 이지민의 소설집에서는 재미있게도 욕망의 매개체로 그려진다. 칙릿들이 브랜드에 품는 맹목적 지지와는 다르게 작가는 사물들 혹은 사물들을 대하는 연정을 서글프고 우울하게 그려낸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불륜 세일즈>와 <영혼 세일즈>로 이어지는 마치 연작같은 두 작품이다. 콘돔을 끼고 대리 기사에게 업혀서 집으로 돌아오는 남편과 매일 아침 모텔에서 정부와의 섹스를 치루는 그의 아내는 파편같이 이 도시에 박혀 있는 반짝이는 구성원들이다. 흔하디 흔한 아침 드라마에 나올법한 설정들을 상쇄시키는 이지민만의 매력과 필력을 욕망의 지점들을 살피는 관찰력이다. 작가는 매우 꼼꼼하게 도시의 관계들을 탐구한다. 이 점은 정이현과는 또 다르다. 도시 여성의 삶을 꼼꼼하게 살피고 감정의 지점들을 연결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보이는 정이현의 소설들이 쌀쌀맞지만 예의바른 여성적 매력을 지니고 있다면 이지민은 좀 더 쾌활하고 분방하다. 그녀가 그리는 여자들은 대체로 감정의 극단을 드라마틱하게 오간다.

여덟번의 성형 수술을 거치는 <대천사>의 주인공, 키티 캐릭터에 집착하는 <키티 부인>의 주인공, 마치 아파트의 티파티 같은 모닝 섹스에 집착하는 <불륜 세일즈>의 주인공, 그저 영양가 없는 사심만으로 카페를 차리는 <오늘의 커피>의 주인공.

이지민 소설 속의 그녀들은 정이현의 깜찍하게 영리해서 현실적인 도시 여성들과는 달리 주변의 누구와도 쉽사리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다. 그녀들은 불같이 단순한 감정에 사로 잡혀 자신의 일상을 한 순간에 바꾸어버리거나 빠른 속도로 다른 일상에 발을 들인다. 그 모든 동력은 욕망을 그대로 따르는 몸의 움직임이다. 코에 손을 대고 눈을 고치고, 팔뚝에 주사를 꽂는 미녀는 어느 순간 욕망이 일그러진 자화상을 마주치게 되고,새로 구입하기만 하면 소중한 것을 결코 잃을 일이 없어서 키티 인형만 74개를 가지고 있는 부인의 취향을 그저 소녀적이라고 하기엔 섬짓하다. 카페의 어느 공간보다 주인인 자신이 앉을 자리를 공들여 꾸미고 잡지책 속의 화보같은 일상을 꿈꾸는 그녀는 얼마전 까지 생활인이었다는 사실을 결코 알아낼 수 없이 무모해보인다.

그녀들은 욕망한다. 삶의 다른 순간들을 욕망하고, 시대가 원하는 아름다움을 욕망하고, 자신만의 공간을 욕망한다. 

욕망의 지점들만 경쾌하게 나열해 놓았다면 이 소설집 역시 최근의 칙릿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새를 갖추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작가는 소설속의 주인공들이 어쩔 수 없이 치루어야만 하는 욕망과의 이별, 그 지점들을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잔혹한 결말을 통한 반전보다는 정말 우리의 일상이 그러하듯이 어떤 절정 이후의 먹먹함들을 모른채하지 않고 살피고 있는 것이다. 꼼꼼한 관찰력을 통해 얻어진 명민한 시각은 이러한 지점들에서 빛을 발한다. 세상의 모든 이별이 아리게 아프듯이 우리가 욕망과 이별하는 순간 역시 동일한 에너지를 요구한다. 사랑이 잊혀지듯 욕망이 빛을 바랄때 어쩌면 스스로에게 가장 말간 얼굴을 보일 수 있는 것이 이 도시를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 아닐까.하는 질문을 던지듯 작가는 공들인 세부 묘사를 멈추지 않는다. 마치 마지막 장면이 최고인 미니시리즈처럼 단단한 맺음새를 자랑하는 이지민의 또 다른 소설집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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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들의 도서관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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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대부분은 가족보다는 친구와 함께 진행된다.

계획도 없고, 미래도 없는 하루 하루의 북닥거림과 속닥거림은

어쩌면 그것이 생의 평온이고 안락인듯 느껴져서 서로를 안심케 한다. 왜 가끔 지하철에서 알 수 없는 놀이에 흰자위를 희번득 거리면 즐거워 하는 남정네들이 있지 않은가. 호프집에서 죽였던 음담패설의 시간들, 길거리를 수놓았던 필터까지 빨아댄 담배꽁초들, 만화와 당구와 오락과 허접한 쇼핑으로 채워졌던 일상들이 남의 일 같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소설집은 책장에 꽂아두었던 일기장과도 같다.

 

자동피아노, 매뉴얼 제너레이션, 엇박자 D,악기들의 도서관....

각 단편들의 타이틀은 마치 음반의 수록곡들과 같은 느낌을 들게 한다. 사실 이 소설집 자체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곡들의 흐름을 통해 앨범 전체의 느낌을 알게 하는 잘 다듬어진 한 장의 음반처럼 이 소설집 역시 각 단편들의 면면도 흥미롭지만 전체의 흐름이 하나가 되었을 때 더욱 매력적으로 '들린다'.

특히 읆조리듯 묘사되는 일상의 비루함을 흥미로운 문체로 묘사한 킬링 트랙인 <유리 방패>는 영에이지 리얼리스트 김애란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20대 남성의 일면을 들춰낸다. 있는 돈을 모두 꺼내어 호프집 탁자위에 두고 그만큼의 맥주를 들이키는 루저버디들의 흔한 저녁 시간을 그려낸 이야기는 현실에 밀착한 소설의 재미와 쓸쓸한 감상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이 소설집 속에는 이러한 '루저버디'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들의 직업은 비정규직도 아닌 소일거리에 그치거나 혹은 면접에 탈락하는 것이 현재의 직업이기로 하며 때로는 평범한 이들의 취미를 직업으로 삼아 밥벌이를 한다. 밥벌이의 지겨움을 설파하지는 않지만 무심한 행간의 표정 뒤에 숨은 절절함이 마음에 와닿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밤새워 레코드를 뒤지는 루버 버디들, 서른도 훌쩍 넘어 지하실에서 기타를 가르치고 배우는 루저 버디들, 그리고 지하철에서 플라스틱 칼과 방패로 땀흘리는 싸움놀이를 하는 정말, 루저 버디들.

 

스타일을 논하는, 혹은 연애의 오기와 적립의 쾌락 사이를 또각거리는 향수 냄새 나는 소설들의 사이에서 이 소설집의 가치는 도드라진다.

그것은  이 소설집이 사라져 버린 버스의 뒤꽁무니를 쫓아가는 매캐한 연기처럼 우리의 코를,눈을 그리고 가슴을 알싸하게 만드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 몸에서 나는 살냄새 나는 풍경을 가까이에서 맡게 하는 그런 힘이 충만한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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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4 14: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완득이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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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대부분이 좋다. 꼭 쥔 주먹이 허공을 가르는, 그 경쾌한 기운이 가득해서 좋다. 페이지를 장악하고 뛰쳐나올것같은 생동감으로 가득한 캐릭터들이 좋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잊지 않는 에너지가 좋다.

 '완득이'는 과잉의 소설이다. 젊음의 혈기는 싱싱하다 못해 질퍽거릴 정도로 날 것 그대로이고 드라마와 영화가 애써 감춰왔던 뒷골목의 생생한 살내음이 진동한다. 땀내와 입내가 뒤섞인 이야기는 어떤 지점에서도 자신의 잽을 날리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청소년 문학상 당선작이라 했던가. 원래 십대의 젊음과 삶은 이렇게 진동하는 것이었나 싶을 정도로 떨림과 울림이 크다.

명료한 일러스트로 그려진 표지의 완득이는 송승헌과 닮아있지만 사실 완득이는 베트남 어머니와 난쟁이 아버지를 둔 사회적으로 불우해야만 하는 주인공이다. 이 비극과 같은 설정을 결코 슬픔속에 가둬두지 않는 것은 그것이 의당 그래야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완득이는 가난하지만 불행하지 않고 불쌍하거나 연민에 찬 비련의 주인공이 아니다. 아직 고등학생이지만 삶을 살아가는 법을 알고 있는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의 하루와 일주일, 한 달과 일년을 내리 달리는 젊음이다. 그의 버팀목이 교과공부가 아닌 것은 유쾌한 일이다. 적어도 그는 출세를 위해 출신을 숨기는 박력없는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르게 생긴 부모, 같게 생겼지만 다른 의붓삼촌, 선생이지만 님 자를 붙이기 싫은 멘토, 비슷하게 찌질하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친구, 말죽거리 잔혹사의 한가인 같지만 알고보면 공효진을 연상케 하는 난데 없는 여자친구.... 소설 완득이에는 쉽게 스쳐가지만 깊게 연을 맺기는 어려웠던 매혹적이 캐릭터들이 가득하다.

또한 그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 역시 주목할만하다. 스승의 은혜는 땅바닥에 떨어져서 사이비 교회에서 울려퍼지는 낭창한 저주로 울리고 학교를 떠난 스승은 제자의 인생에 멘토라는 거대한 낙인을 찍는다. 갈 지자로 걸어도 삶의 길과 낙을 아는 손꼽을만큼 멋진 티처, 똥주의 캐릭터다. 영화화가 된다면 누가 좋을지 고민하게 되는 펄떡이는 그대로의 캐릭터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을 읽는 가치는 충분하리라 본다.

사실 따지고 보면 청소년 소설이라는 장르화는 참 쓸모없는 나누기라는 생각이든다. 찰지게 씹던 영양만점의 책을 덮는 순간 읽기의 속도감과 비례하는 그 어른스러운 감동에 흐뭇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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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 2008년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백영옥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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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옥이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트렌드세터라는 직함 자체가 뻔뻔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그녀의 숨은 안티였음을 자백한다. 조선일보의 위클리 문화면을 가득 채우던 트렌드에 관한 글들은 나쁘지 않았지만 좋지도 않았다. 게다가 <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라니. 이런. '지미추 신고 조깅하기', ' 몰스킨으로 아트북 만들기' ... 머릿 속을 삽식간에 채우는 아류 카피들이 쏟아져나왔다. 테이크 아웃 스타벅스 라떼를 들고 우아하게도 클로에 백을 들고 다니는 여성들에 대한 감정은 불신보다는 지겨움에 가까웠다고나 할까. 불편하기 위한 스타일은 썩 내키지 않았다. 모든 단어가 스타일이나 룩 따위로 귀결되는 걸 보고 있는 일은 심드렁해지다가도 불쾌해졌으니 말이다.

그녀는 내내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다. 뿌리 깊은 불신은 그녀의 진심을 믿어주지 않았던 것 같다. 김별아와 박현욱에 이어서 백영옥이라는 세계 문학상 수상자 리스트가 못내 의아해서 전광석화처럼 그녀의 첫 장편 <스타일>을 집어 들었다. 맙소사, 일단 그녀는 숨은 안티를 처단하는 데 성공했다. 소설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가 잘 읽힌가는 것이라면, 이 소설 <스타일>은 왠만한 패션지 보다 빠르고 재미있게 읽힌다. 산문집에서 산만하게 떠돌던 문장들은 그녀가 가장 잘 아는 세계를 일러 바치고 쓰다듬는 이 소설에 이르러서는 단단하게 발을 현실에 붙인다. 스타일리시한 커버 디자인과 <스타일>이라는 타이틀의 강박을 벗어 던지는 내부자의 은밀하고도 당당한 밀고가 빠르고 경쾌하게 이어진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사랑했던 이유는 그 작법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세계에서 나온 허무맹랑한 서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직장인들이 쏟아져 나오고 우그려 들어가는 현실에서는 프라다 백을 사는 일이 주구장창 드라마를 점령하는 재벌들과의 서글픈 로맨스보다 천만배는 쉽기 때문이다. 엄마가 뿔 날 정도로 우연한 만남은 세상에 쉽사리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리 월급을 몇 달간 모아서 눈물나게 질러버리고 몇 달간 뿌듯한 명품 쇼핑이 이 도시에서는 더 빈번한 일인 것이다.

패션지의 피져 에디터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 소설은 그 낯설지 않은 기시감에서 많은 부분 환상을 벗겨 낸다. 그것은 그녀가 그 세계에 속해 있었던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취재보다 더 무서운 일이 전화받기이며 아홉시간 꺼놓았던 핸드폰에 쏟아진 부재 중 전화와 문자 메세지로 생존을 가늠하는 일은 처연하지만 생동감이 넘친다. 꿈을 잃지 않거나 놓지 않거나 둘 중에 하나를 택하는 일마저 버거운 현대인들의 심리를 묘하게 꿰뚫고 있는 전개는 글솜씨보다는 애써 미화하거나 돌려 말하지 않겠다는 진정성의 손을 들어주고 있어서 공감이 더하다.

물론 로맨스에의 집착은 난데없다. 완벽한 남자를 어쩌다 만나서 사랑에 이르는 법을 헐겁게 그리는 이야기는 곧 이 소설이 드라마와 영화의 변종을 양산해낼 것임을 공표한다. 아쉬운 부분이지만 작가는 부담스럽지 않은 미스테리를 포개어 넣었다. 아마 많은 여성들의 입맛에는 약간의 들척지근함이 나쁘지 않을것이다. 설탕의 몇 분의 일 칼로리라는 또 다른 과당을 집어 넣어서 적당히 말랑하니 말이다.

나는 그녀를 의심했지만 백영옥은 충분히 쓰기에 능한 작가다. 그녀가 만들어낸 수많은 카피와 태그라인이 선명한 이미지에 붙어서 어떤 비쥬얼을 만들어내는 일을 기대하는 일은 즐거울 듯 하다. 다만 자신의 세계가 아닌 이면을 그리기에는 아직 그녀가 가지고 있는 기시감들이 버거워보이는 점이 우려가된다. 누군가가 루이비통 백과 샤넬의 스카프를 훔쳐간다면 어쩌면 맨 몸이 된 것 같은 불안감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내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부디 나의 쓰잘데기없는 안티성 기우를 작가 백영옥이 통쾌하게 배신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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