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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 2008년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백영옥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백영옥이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트렌드세터라는 직함 자체가 뻔뻔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그녀의 숨은 안티였음을 자백한다. 조선일보의 위클리 문화면을 가득 채우던 트렌드에 관한 글들은 나쁘지 않았지만 좋지도 않았다. 게다가 <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라니. 이런. '지미추 신고 조깅하기', ' 몰스킨으로 아트북 만들기' ... 머릿 속을 삽식간에 채우는 아류 카피들이 쏟아져나왔다. 테이크 아웃 스타벅스 라떼를 들고 우아하게도 클로에 백을 들고 다니는 여성들에 대한 감정은 불신보다는 지겨움에 가까웠다고나 할까. 불편하기 위한 스타일은 썩 내키지 않았다. 모든 단어가 스타일이나 룩 따위로 귀결되는 걸 보고 있는 일은 심드렁해지다가도 불쾌해졌으니 말이다.
그녀는 내내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다. 뿌리 깊은 불신은 그녀의 진심을 믿어주지 않았던 것 같다. 김별아와 박현욱에 이어서 백영옥이라는 세계 문학상 수상자 리스트가 못내 의아해서 전광석화처럼 그녀의 첫 장편 <스타일>을 집어 들었다. 맙소사, 일단 그녀는 숨은 안티를 처단하는 데 성공했다. 소설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가 잘 읽힌가는 것이라면, 이 소설 <스타일>은 왠만한 패션지 보다 빠르고 재미있게 읽힌다. 산문집에서 산만하게 떠돌던 문장들은 그녀가 가장 잘 아는 세계를 일러 바치고 쓰다듬는 이 소설에 이르러서는 단단하게 발을 현실에 붙인다. 스타일리시한 커버 디자인과 <스타일>이라는 타이틀의 강박을 벗어 던지는 내부자의 은밀하고도 당당한 밀고가 빠르고 경쾌하게 이어진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사랑했던 이유는 그 작법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세계에서 나온 허무맹랑한 서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직장인들이 쏟아져 나오고 우그려 들어가는 현실에서는 프라다 백을 사는 일이 주구장창 드라마를 점령하는 재벌들과의 서글픈 로맨스보다 천만배는 쉽기 때문이다. 엄마가 뿔 날 정도로 우연한 만남은 세상에 쉽사리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리 월급을 몇 달간 모아서 눈물나게 질러버리고 몇 달간 뿌듯한 명품 쇼핑이 이 도시에서는 더 빈번한 일인 것이다.
패션지의 피져 에디터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 소설은 그 낯설지 않은 기시감에서 많은 부분 환상을 벗겨 낸다. 그것은 그녀가 그 세계에 속해 있었던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취재보다 더 무서운 일이 전화받기이며 아홉시간 꺼놓았던 핸드폰에 쏟아진 부재 중 전화와 문자 메세지로 생존을 가늠하는 일은 처연하지만 생동감이 넘친다. 꿈을 잃지 않거나 놓지 않거나 둘 중에 하나를 택하는 일마저 버거운 현대인들의 심리를 묘하게 꿰뚫고 있는 전개는 글솜씨보다는 애써 미화하거나 돌려 말하지 않겠다는 진정성의 손을 들어주고 있어서 공감이 더하다.
물론 로맨스에의 집착은 난데없다. 완벽한 남자를 어쩌다 만나서 사랑에 이르는 법을 헐겁게 그리는 이야기는 곧 이 소설이 드라마와 영화의 변종을 양산해낼 것임을 공표한다. 아쉬운 부분이지만 작가는 부담스럽지 않은 미스테리를 포개어 넣었다. 아마 많은 여성들의 입맛에는 약간의 들척지근함이 나쁘지 않을것이다. 설탕의 몇 분의 일 칼로리라는 또 다른 과당을 집어 넣어서 적당히 말랑하니 말이다.
나는 그녀를 의심했지만 백영옥은 충분히 쓰기에 능한 작가다. 그녀가 만들어낸 수많은 카피와 태그라인이 선명한 이미지에 붙어서 어떤 비쥬얼을 만들어내는 일을 기대하는 일은 즐거울 듯 하다. 다만 자신의 세계가 아닌 이면을 그리기에는 아직 그녀가 가지고 있는 기시감들이 버거워보이는 점이 우려가된다. 누군가가 루이비통 백과 샤넬의 스카프를 훔쳐간다면 어쩌면 맨 몸이 된 것 같은 불안감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내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부디 나의 쓰잘데기없는 안티성 기우를 작가 백영옥이 통쾌하게 배신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