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빌라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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덮어주고 싶은 마음들 위로 내려 앉는 최선의 선의. 그러니까 맨몸으로 나설 수 밖에는 없지 않겠어 그렇게 끄덕이고 용기를 내고 고개를 젓고 다시 손에 흙을 물을 묻히고야 마는 일을 우리는기적이라고 부르고 작가는 지금이라고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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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연인들
정영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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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를 다 써버리는 때가 있다 나도 모르게 에너지가 소진 되는 것처럼 아직 할 일이 해야 할 것들이 남아 있는데 시간이 되어야 차는 달 처럼 멍하니 기다리기엔 여기는 그렇지 못한 곳
정영수 소설 속 연인들 혹은 연인이었던 이들은 데이터를 다 쓴 사람들이 약간 황망한 표정으로 도시를 걷고 시간을 해멘다 그들에게 합의와 함의는 같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는데 그건 관계라는 물성 자체가 애초부터 그런 거여서 겠다 생각했다 고르게 자리한 크고 작은 비극들의 세상에서 구조되는 일이 이를테면 평안한 쪽으로만 삶을 도려내는 일은 능숙함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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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거 입으면 안돼?

아무거나 걸칠거면 태어나지도 않았어.

지랄한다. 오늘도 늦어?

하고 싶을 때 쯤 들어올게.

내가 니 붙박이 장이냐, 아무 때나 열고 들어오라고 방 안에 쳐박혀 있는 사람 아니다 나.

그러니까 직업을 좀 갖던가. 먹여 살리는 거 슬슬 지쳐가.

많이 안 먹는 거 알면서 꼭 그래.

출근길에 말 길게 하는 거 싫으니까 와서 뽀뽀나 해줘.

 

승호는 가볍게 엉덩이를 들고 걸어온다. 나는 녀석의 저런 차림새가 좋다. 헐렁하게 늘어지고 헤진 캘빈 클라인 잠옷 바지는 마치 빈티지 숍에서 건져온 것처럼 낙낙하고, 잘 발달된 가슴 근육이 드러나는 카키색 싱글렛은 싱그럽기 그지없다. 샤워를 마치고 선풍기 앞에서 강아지처럼 머리를 말리는 놈을 굳이 현관 앞으로 걸어오게 만드는 건 햇살이 가득한 창을 등지고 걸어오는 아름다운 피조물이 현재는 내 소유임을 확인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잘 다녀와.

잘 다녀 와서 예뻐해줄게. 밥 좀 챙겨 먹고 밥 먹기 전에 설거지 좀 하고.

근데 나 다시 일 나가면 안 돼? 나도 좀 벌래 돈.

몸이 근질근질하구나. 일 나가면 집도 나가는 거야. 뭔 말인지 몰라?

그냥 아무 감정없이. 정말 기계처럼.

그게 되니?

안될건 뭐야.

뭔 말인지 모르겠고. 그대로 반복이야. 일 나가면 집도 나가. 그리고 내 삶에서도 나가.

알았어. 꼭 그렇게 정색하고 무섭게 말을 해.

차라리 공부를 좀 하던가. 난 너처럼 그렇게 시간 많으면 박사 따고 교수 따고 다 따먹었겠다.

늦겠다. 가

간다.

가.

갈게.

늦지 마.

 

현관을 열면 또 다른 세상이다. 나는 더 이상 교태 부리지 않고, 미심쩍어 하지 않으며 나의 단점과 남의 장점을 잘 아는 현명한 성인이 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없다. 그저 누가봐도 산뜻한 옷차림의 경쾌한 미소를 지닌 직장인일 뿐이다.

 

벤티 아메리카노 주세요. 얼음 몇 개만 띄워주시구요.

오빠는 그러니까 정말 소개팅 안할 거에요?

손님한테 맨날 오빠라 그러면 점장한테 이를거에요.

그럼 오빠지 언닌가? 그 때 일하던 제시 있잖아요 진짜 괜찮은 앤데, 가슴도 왕 커요.

세상에 저는 가슴 왕 큰 언니 왕 싫어해요.

아 진짜. 사람을 만나봐야 알지! 오늘은 꼭 확답 받아주기로 했는데.

셋이 같이 보자. 밥을 먹던가 아님 술을 마시던가. 담 주 쯤에 오케이?

제시는 저스트 투 오브 어스. 했는데 오빠가 해피 투게더 하쟀다고 할께요. 이 정도면

나 노력한거지 뭐. 그죠?

그럼. 나 늦어요. 얼른 커피 줘.

근데 오빠 아침부터 벤티 먹음 화징실 안 급해요?

 

커피를 내리는 제시카의 손놀림이 분주하다. 곱게 갈리면서 중독적인 향기를 뿜어내는 원두 때문인지 아니면 커피 보다 더 중독적인 저 아이의 미소 때문인지 벌써 2년 넘게 나누는 아침 인사다. 이젠 내가 휴가라거나 그녀가 휴가여도 아쉬울 정도다. 스물 넷. 대학원에서 그림을 그리는 제시카는 소녀시대의 제시카처럼 시크한 미소를 갖고 싶은 소망을 지닌 푸근한 숙녀다. 그녀의 넉넉한 몸매와 날렵한 발목, 그리고 제시카 보다는 써니를 닮은 귀염성 있는 얼굴은 여러 남자들의 지갑을 열게 했음이 분명하다. 저 쪽 테이블에 앉아 신문을 보며 우리를 예의 주시하는 30대 중반의 남자는 내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기 전부터 제시카 쪽만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아 그리고 이거. 어제 유통기한 지나서 냉장고에 넣어 놓은 건데. 오빠 먹어요. 안 상했어

머핀은 안 상해.

머핀은 안 상한다는 건 과학적이거나 의학적인거야?

내가 좀 전에 똑같은 거 먹었어요. 임상실험 거친거니까 완전 안전함.

여튼 잘 먹을게. 탈 나면 밥 니가 사는거야.

하여간 쪼잔한 매력이 넘쳐나요. 얼른 가요. 늦겠다.

그래, 수고!

 

예술을 하는 아이라 손놀림이 어여쁘다. 샛노란 봉투 끝을 삼각형으로 여민 머핀 봉지 위에 ‘굿 럭’이라고 쓰인 포스트 잇이 붙어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통유리 문을 밀고 뒤를 돌아보니 제시카 앞에 아까 그 남자가 서있다. 이런 미소는 당신만을 위해 준비한 거야 라는 공들인 미소를 지으며. 앉았을 때는 몰랐는데 일어서니 180은 족히 넘어보이는 큰 키다. 탄력있게 올라 붙은 엉덩이에 시선이 간다. 관리를 잘했나보다 라고 생각하며 택시를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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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 제1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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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한다. 그 소녀의 이름을. 복잡한 버스 안에서 혹은 수많은 인파 속에서 동네 슈퍼의 진열장에서 곁을 내주었을지 모를 그 소녀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세상이 더러워서 그녀가 더럽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모자라다. 세상이 각박해서 그녀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는 핑계는 처연하다. 그리고 세상이 이리도 힘든데 그 아이 얼굴을 들여다 볼 틈 조차 없었다고 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누군가는 그 소녀에게 욕정을 풀었고 누군가는 그 소녀의 작은 손에 쥐어진 지폐 몇 장을 희번득거리는 눈으로 탐했으리라. 그리고 그리하지 않은 우리들 대부분은 자신의 곁은 내주는 일에도 망설이거나 무관심했으리라. 

보지에 자지를 넣으면 아기가 생긴다고 말하는 열 살 소녀의 위악은 감당하기 어려울정도로 불편했다. 만약 그녀가 양부모에 입양되어 성장했으면 <제리>의 그녀가 되었을까. 무시무시한 소설들이 출몰하는 여름이다. 

최진영의 소설 <당신 곁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이하 <당신>)은 은희경의 <새의 선물>과 천명관의 <고래>를 떠올리게 만드는 소녀 성장기다. 두들겨 맞고 자랐기에 진짜와 가짜를 탐하는 욕망이 커졌고 배고픔을 알았기에 쥐들이 싫었던 소녀. 풋내라고는 한 번도 나지 않았던 이 소녀는 이 년에서 언나로 저년에서 간나로 꼬마에서 유미로 불리며 떠돈다. 목적은 하나 진짜 엄마를 찾는 것이다. 다방과 식당과 폐가를 지나 각설이 패를 거쳐 불량 소녀의 온상에서 기거하는 소녀의 로드 무비는 참혹하리만큼 지독한 생존의 역사다.  

작가는 단 한 순간도 그녀에게 안온한 쉼터를 제공하지 못한다. 못한다라고 쓰는 것은 않는다 와는 다른 뉘앙스이기 때문이다. 소녀는 선택과 집중에 능하기 때문에 어떤 머무름에서도 찰나의 반짝임을, 머물러야 할 순간들을 발견해낸다. 그것이 생존을 목적으로, 살아남기만을 목표로 하는 이의 혜안이라면  소녀가 특출난 재능을 지니고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다방에서는 아름다움을, 식당에서는 너그러움을, 폐가에서는 외로움을 각설이 패에서는 어우러짐을 발견한 이 작은 여자 아이는 그러나 그 모든 공간에서 버림 받는다. 처음부터 버려졌기 때문에 버려지는 것은 무섭지 않다지만 마음을 내 준 이들의 곁을 버릴 때 마다 소녀는 아프게 성장한다. 작품 전체를 둘러 쌓고 있는 서늘한 기운, 바스락 타버릴 듯 바싹 마른 상황들은 챕터의 이별 장면에서는 뭉클하니 가슴을 저미게 한다. 

그리고 그런 이별들을 통해서, 그리워 할 것들을 챙겨가며,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은 길 위의 인연들을 잊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는 소녀는 어른이 되어간다.  하지만 <당신>은 명백히 해피 엔딩을 거부하는 작품이다. <새의 선물>이 공간을 지나가는 시간들을 유머러스한 느낌표로 기억하였고 <고래>가 명백히 신화를 연상시키는 모성의 진화를 전설처럼 기록한 것에 비해 <당신>은 중성적인 것을 지나 무성적인 느낌의 독백으로 일관하는 일기에 가깝다. 소년이어도 무방한 소녀의 이야기에는 자조적인 유머도 모성의 신화도 거세되어 있다. 

지독하게 못된 소녀의 성장기를 지탱하는 것은 끈질기게 그녀의 뒤를 따라밟는 작가의 집중력이다. 팩 하니 돌아서 골목길로 사라져버릴 것 같은 소녀의 발자욱을 조심스레 되밟는 작가는 단단한 언어와 감상을 배제한 관찰력으로 이야기를 완성해나간다. 아무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은 그녀의 지독한 여정을 지켜볼 수 있는 것은 그 덕이다. 불편한 진실을 감추지 않고 불쾌한 진심을 숨기지 않는 까닭에 소녀는 눈물 흘리지 않지만 나는 몇 번 눈시울을 붉혔다. 

왜 모를까,라고 생각해 보았으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소녀의 이름을 알고 싶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무시 당하지 않기 위해 말갛게 세수한 얼굴로 세상을 걸었으나 그녀는 스쳐갔으나 나는 지나쳤기 때문이다. 세상의 못된 기집애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천 원짜리 한 장을 떨어뜨리는 정도인 범인들에게 이 작품은 되묻는다. 쵸코파이 하나 쥐어주기 까지에도 온정이 필요하다고. 길 잃은 강아지도 쓰다듬어 온기가 통하기 전까지는 다가오지 않는 법이라고. 

차가운 세상, 그 세상의 온도를 질책하는 소설 하나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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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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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라는 사람을 알고 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무례할까 걱정이 들기도 하지만, 비야 누나는 분명 이렇게 말 할 것이다. ' 어머, 나한테 그런 모습이 있었다니!'하면서 박속같이 환한 치아를 드러내며 붉은 꽃 같이 해사한 웃음을 지으면서 기꺼이 귀를 열고 눈을 맞춰 누군가가 보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 매우 흥미롭고 진지하게 반응할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멘토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철 없던 유년기를 지나, 뜨겁게 달궈진 청년기를 거쳐 서른이라는 조금은 무거워진 나이가 되고나니 너무나도 잘, 알게 된다. 매일같이 통화하는 단짝 친구는 아니지만, 사랑의 밀어를 주고 받는 곰살맞은 애인은 아니지만, 인생의 스승들은 뿌연 구름이 걷히면 드러나는 신록의 산처럼 올려다 볼 때마다 마음의 뼘을 넓혀주곤 하는 심정적으로 누구보다 가깝고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내가 한비야라는 사람을 알게 된 것은,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러할, 나의 멘토로 모시게 된 것은 벌써 10여년 전의 일이다. 꿈만 많고 표현은 넘치며, 정리는 서툴고 욕심은 성급했던 소년은 마치 노래하듯 이야기하고 통화하듯 다감하게 글을 쓰는 특별한 사람에게 매혹되었다. '바람의 딸'이라는 사람, 소년의 일상 곁에는 존재하지 않을 법한 특이한 경력을 걸어가는 사람은 그 치기 어린 소년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욕심이 아닌 열정, 소유가 아닌 경험, 그리고 진심과 진실을 향한 걸음. 걸어도 걸어도 멀게만 보일 미래라는 불안함을 나의 멘토는 고민하는 사이 헤쳐나가라고, 걱정하느니 부딪혀 실패하라고 꼬박 10년의 행적을 통해, 본인의 온 몸과 맘을 담은 시간들을 통해 보여 주었고 깨우쳐 주었다.   

그녀는 자꾸 본인의 평범한 외모라고 하지만 그녀의 웃는 모습은 이효리에 비할 바 못하게 청량하고, 본인 스스로 너무 크다고 말하는 호쾌한 목소리는 어느 정치가보다도 흡인력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글들은 참으로 잘 쓴 글들이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열정과 신념을 담아내는 문단들과 적절한 사고의 시간을 제공하는 행간들은 듬직하고 미덥다. 이번 책을 내면서 그녀는 <무릎팍 도사>에 출연한다고 한다. 인터넷 포탈의 기사들은 발빠르게 그 소식을 전했고, 상상치 못한 악플들이 기사 밑에 달린 것을 보았다. '한비야는 깊이가 없다. 그녀의 책이 왜 인기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안타까울 뿐이다. 평생가도 모를테니. 깊이라는 것을 강요받지 아니한 자의 넓이를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을테니. 짧은 비문으로 호전적이기만 한 악의를 표현한 그들에게 나는 굳이 한비야라는 사람을 소개하고 싶지 않다. 분명 그들은 한비야라는 사람보다는 세상을 먼저 만나야 할테니 말이다. 키보드에서 전쟁을 치르는 이들에게, 세상 저 편의 '할례'로 고통받는 이들이 어디 가깝게 느껴지겠으며 굶어죽는 아프리카 아이들의 눈망울이 보이기나 할까 해서 그저 안쓰러울 뿐이다. 

이번 책은 진심으로 한비야라는 사람의 일기장과도 같이 느껴진다. 그녀의 모든 책이 그랬지만 이번 책 역시도 마찬가지다.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밥공기에 눌러담듯 꾹꾹 눌러 담았고 부지런한 호흡들로 기록한 순간의 감정들을 고명 얹듯 빼놓지 않고 얹어 내었다. 정성스럽게 지켜온 시간들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자세는 강요된 깊이와는 다른 감동을 여전히 선사한다. 이 책을 읽으며 두 번 울었다. 첫 번째는 전화 통화로 멀리서 전해들었던 그녀의 병원기에서였다. 아무렇지 않게 쾌활하게 까지 느껴지는 활자들을 읽으면서 맘이 아프고, 목이 메여서 그리고 다행스럽고 감사해서 눈물이 났다. 두 번째는 아프리카 여성들의 '할례'이야기를 읽으며 몸서리치는 공포와 나의 무지와 그리고 눈에 보이듯 생생하게 그려진 그 시공간의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에 뚝뚝 눈물을 흘려가며 울었다. 

범인들이 시도하지 못할 갈 지자의 행보를 척척 해내가는 그녀가 책을 쓰는 이유는, 끊임없이 강연을 하는 이유는 고작 인기나, 명성 때문만이 아님을 이 책 속에 있는 에피소드들은 정직하게 역설한다. 조심스럽게 세상의 구석들을 보듬고, 뜨거운 어조로 세상의 그늘들을 함께 보자는 그녀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것만 같은 경험. 너무 술술 읽혔던 이 전 책들과는 다르게 나는 몇 번은 망설이며, 어떤 에피소드들은 재차 읽으며   이 책을 읽어 내었다. 힘들었던 이유는 분명했다. 나는 이제 스승의 가르침들을 실천해야한다는 당연한 의무감때문에서였다. 그녀가 나를 조금은 강하고 조금 더 씩씩한 어른으로 키웠듯 이제 그녀의 이야기들이 단순히 멋진 누군가의 경험으로 읽혀지는 것 이 아니어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얼까 고민하게 되었고 당장이라도 내가 해야할 일들이 어떤 것일까 반성하게 되었다. 책은 그래서 무거웠다. 무릎 위에 얹어 놓으니 책 속에 있던 수많은 아픔과 고통을 겪고 있는 동시대인들의 삶의 조각들이 유리처럼 파고 들었다. 그녀가 겪은 일들이 그저 멋있다고만, 그녀가 해냈던 수많은 선행들이 그저 감탄스럽다고만, 그녀가 지켜온 신념과 용기들이 그저 존경스럽다고만 하기엔 난 너무 많은 것을 그저 받기만 했다. 이 책의 수많은 에피소드들과 수첩에 옮겨 놓았던 문장들은 감히 이 편지에서는 적을 수가 없다. 그녀가 모르게, 세상이 기뻐할 움직음을 행하는 것만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덧글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분주해진 며칠간이었다.  

많이 궁금했다. 그녀는 어떤 보약을 먹을까, 어떤 보약을 먹길래 저리도 늘, 한결같이 보리밭처럼 푸르고 능금처럼 반짝일까 하고. 그녀에게 보약은 주는 만큼 받는다는 '사랑'이라는 이름이었다. 조제되지 않은, 레시피가 없는 그 명약을 몇 수십년 기도하듯 복용했기에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의 냄새를 진하게 풍기는 게 아닐까. 이 책에서는 흙냄새와 땀냄새와 더불어 감히 어떤 로맨스 소설도 풍기기 힘들었던 사랑의 냄새가 난다. 내가 매혹되었던 그 향기가 사랑이었구나. 한비야 힘의 원천이 사랑이었구나 하는 커다란 안도에, 세상의 작고 아픈 이들 모두를 연인으로 택한 그녀의 무한한 욕심에 또 한 번 기립으로 박수를 보내고야 만다.   

소면을 리본으로 묶어, 작은 풋스크럽을 예쁜 상자에 넣어 그녀를 만나는 자리에서 선물하겠다. 어떤 길을 걸어도, 어떤 지도를 그려도 힘이 될 비빔국수의 원재료와 각질 없이 예쁜 두 발을 위해서. 밀봉하지 않고, 대신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 사랑이라는 느낌표를 찍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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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둘리 2009-07-27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통해서도 큰 감동을 받았지만, 이 서평을 읽고나니 그 여운이 더해지는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실천이라는 그 말이 너무나 무거워서, 혹은 두려워서 저도 책을 읽고나서 글을 쓸 때 그 단어가 참 망설여진 듯 싶습니다.

방문자 2009-08-18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참, 잘 쓰셨습니다. 좋은 글 두 개를 만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