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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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라는 사람을 알고 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무례할까 걱정이 들기도 하지만, 비야 누나는 분명 이렇게 말 할 것이다. ' 어머, 나한테 그런 모습이 있었다니!'하면서 박속같이 환한 치아를 드러내며 붉은 꽃 같이 해사한 웃음을 지으면서 기꺼이 귀를 열고 눈을 맞춰 누군가가 보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 매우 흥미롭고 진지하게 반응할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멘토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철 없던 유년기를 지나, 뜨겁게 달궈진 청년기를 거쳐 서른이라는 조금은 무거워진 나이가 되고나니 너무나도 잘, 알게 된다. 매일같이 통화하는 단짝 친구는 아니지만, 사랑의 밀어를 주고 받는 곰살맞은 애인은 아니지만, 인생의 스승들은 뿌연 구름이 걷히면 드러나는 신록의 산처럼 올려다 볼 때마다 마음의 뼘을 넓혀주곤 하는 심정적으로 누구보다 가깝고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내가 한비야라는 사람을 알게 된 것은,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러할, 나의 멘토로 모시게 된 것은 벌써 10여년 전의 일이다. 꿈만 많고 표현은 넘치며, 정리는 서툴고 욕심은 성급했던 소년은 마치 노래하듯 이야기하고 통화하듯 다감하게 글을 쓰는 특별한 사람에게 매혹되었다. '바람의 딸'이라는 사람, 소년의 일상 곁에는 존재하지 않을 법한 특이한 경력을 걸어가는 사람은 그 치기 어린 소년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욕심이 아닌 열정, 소유가 아닌 경험, 그리고 진심과 진실을 향한 걸음. 걸어도 걸어도 멀게만 보일 미래라는 불안함을 나의 멘토는 고민하는 사이 헤쳐나가라고, 걱정하느니 부딪혀 실패하라고 꼬박 10년의 행적을 통해, 본인의 온 몸과 맘을 담은 시간들을 통해 보여 주었고 깨우쳐 주었다.   

그녀는 자꾸 본인의 평범한 외모라고 하지만 그녀의 웃는 모습은 이효리에 비할 바 못하게 청량하고, 본인 스스로 너무 크다고 말하는 호쾌한 목소리는 어느 정치가보다도 흡인력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글들은 참으로 잘 쓴 글들이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열정과 신념을 담아내는 문단들과 적절한 사고의 시간을 제공하는 행간들은 듬직하고 미덥다. 이번 책을 내면서 그녀는 <무릎팍 도사>에 출연한다고 한다. 인터넷 포탈의 기사들은 발빠르게 그 소식을 전했고, 상상치 못한 악플들이 기사 밑에 달린 것을 보았다. '한비야는 깊이가 없다. 그녀의 책이 왜 인기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안타까울 뿐이다. 평생가도 모를테니. 깊이라는 것을 강요받지 아니한 자의 넓이를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을테니. 짧은 비문으로 호전적이기만 한 악의를 표현한 그들에게 나는 굳이 한비야라는 사람을 소개하고 싶지 않다. 분명 그들은 한비야라는 사람보다는 세상을 먼저 만나야 할테니 말이다. 키보드에서 전쟁을 치르는 이들에게, 세상 저 편의 '할례'로 고통받는 이들이 어디 가깝게 느껴지겠으며 굶어죽는 아프리카 아이들의 눈망울이 보이기나 할까 해서 그저 안쓰러울 뿐이다. 

이번 책은 진심으로 한비야라는 사람의 일기장과도 같이 느껴진다. 그녀의 모든 책이 그랬지만 이번 책 역시도 마찬가지다.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밥공기에 눌러담듯 꾹꾹 눌러 담았고 부지런한 호흡들로 기록한 순간의 감정들을 고명 얹듯 빼놓지 않고 얹어 내었다. 정성스럽게 지켜온 시간들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자세는 강요된 깊이와는 다른 감동을 여전히 선사한다. 이 책을 읽으며 두 번 울었다. 첫 번째는 전화 통화로 멀리서 전해들었던 그녀의 병원기에서였다. 아무렇지 않게 쾌활하게 까지 느껴지는 활자들을 읽으면서 맘이 아프고, 목이 메여서 그리고 다행스럽고 감사해서 눈물이 났다. 두 번째는 아프리카 여성들의 '할례'이야기를 읽으며 몸서리치는 공포와 나의 무지와 그리고 눈에 보이듯 생생하게 그려진 그 시공간의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에 뚝뚝 눈물을 흘려가며 울었다. 

범인들이 시도하지 못할 갈 지자의 행보를 척척 해내가는 그녀가 책을 쓰는 이유는, 끊임없이 강연을 하는 이유는 고작 인기나, 명성 때문만이 아님을 이 책 속에 있는 에피소드들은 정직하게 역설한다. 조심스럽게 세상의 구석들을 보듬고, 뜨거운 어조로 세상의 그늘들을 함께 보자는 그녀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것만 같은 경험. 너무 술술 읽혔던 이 전 책들과는 다르게 나는 몇 번은 망설이며, 어떤 에피소드들은 재차 읽으며   이 책을 읽어 내었다. 힘들었던 이유는 분명했다. 나는 이제 스승의 가르침들을 실천해야한다는 당연한 의무감때문에서였다. 그녀가 나를 조금은 강하고 조금 더 씩씩한 어른으로 키웠듯 이제 그녀의 이야기들이 단순히 멋진 누군가의 경험으로 읽혀지는 것 이 아니어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얼까 고민하게 되었고 당장이라도 내가 해야할 일들이 어떤 것일까 반성하게 되었다. 책은 그래서 무거웠다. 무릎 위에 얹어 놓으니 책 속에 있던 수많은 아픔과 고통을 겪고 있는 동시대인들의 삶의 조각들이 유리처럼 파고 들었다. 그녀가 겪은 일들이 그저 멋있다고만, 그녀가 해냈던 수많은 선행들이 그저 감탄스럽다고만, 그녀가 지켜온 신념과 용기들이 그저 존경스럽다고만 하기엔 난 너무 많은 것을 그저 받기만 했다. 이 책의 수많은 에피소드들과 수첩에 옮겨 놓았던 문장들은 감히 이 편지에서는 적을 수가 없다. 그녀가 모르게, 세상이 기뻐할 움직음을 행하는 것만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덧글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분주해진 며칠간이었다.  

많이 궁금했다. 그녀는 어떤 보약을 먹을까, 어떤 보약을 먹길래 저리도 늘, 한결같이 보리밭처럼 푸르고 능금처럼 반짝일까 하고. 그녀에게 보약은 주는 만큼 받는다는 '사랑'이라는 이름이었다. 조제되지 않은, 레시피가 없는 그 명약을 몇 수십년 기도하듯 복용했기에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의 냄새를 진하게 풍기는 게 아닐까. 이 책에서는 흙냄새와 땀냄새와 더불어 감히 어떤 로맨스 소설도 풍기기 힘들었던 사랑의 냄새가 난다. 내가 매혹되었던 그 향기가 사랑이었구나. 한비야 힘의 원천이 사랑이었구나 하는 커다란 안도에, 세상의 작고 아픈 이들 모두를 연인으로 택한 그녀의 무한한 욕심에 또 한 번 기립으로 박수를 보내고야 만다.   

소면을 리본으로 묶어, 작은 풋스크럽을 예쁜 상자에 넣어 그녀를 만나는 자리에서 선물하겠다. 어떤 길을 걸어도, 어떤 지도를 그려도 힘이 될 비빔국수의 원재료와 각질 없이 예쁜 두 발을 위해서. 밀봉하지 않고, 대신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 사랑이라는 느낌표를 찍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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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둘리 2009-07-27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통해서도 큰 감동을 받았지만, 이 서평을 읽고나니 그 여운이 더해지는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실천이라는 그 말이 너무나 무거워서, 혹은 두려워서 저도 책을 읽고나서 글을 쓸 때 그 단어가 참 망설여진 듯 싶습니다.

방문자 2009-08-18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참, 잘 쓰셨습니다. 좋은 글 두 개를 만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