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한 인생의 천재‘ 김지연은 ‘퀴어‘ 작가다. 반려빚」과 「긴끝에 레즈비언 커플이 나와서가 아니라, 김지연의 내러티브가 이른바 ‘정상‘이라고 공인된 존재들, 기존의 범주·규범 · 평가들에 잘 맞아떨어지는 존재들 - P302

위태롭게 느껴지는 이 흥분 상태가 인물들의 삶에 어떤 유익한 장면들로 이어질 수 있을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인물들과 독자인 우리를 무기력하거나 무감각한 상태가 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흥분 상태속에서는 침해당했다거나 상처 입었다는 느낌과 해방감이 잘구분되지 않고 싫은 것과 좋은 것, 고통과 쾌락이 뒤얽히게 된다는 점에서 ‘나‘와 반장의 우정 (그것을 우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만)이 내게는 거의 성애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alal 305 - P305

두번째 소설집이다. 이번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을 쓰면서,
또 한 권의 책으로 묶으면서 주위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도움이 없었다면 소설을 쓸 생각도, 소설집을 묶을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이런 모양이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두번째는 좀쉬울 줄 알았는데 더욱 곤혹스럽기만 했다. 아직도 더 고치고싶은 부분들이 있다. 하지만 그러면 이 책은 영원히 출간될 수없을 것이기에 이쯤에서 내려놓자고 마음먹었다. -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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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삶이라는 선물을 준 어머니에게,
그것을 위해서 싸우는 법을 가르쳐주는 언니들에게,
그 속에서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남편에게,
그것을 사랑하는 법을 보여주는 아들에게

우리가 심는 잡초가 언젠가 야생의 약초원이 될 줄 몰랐던 것처럼, 내가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이것이 책이될 줄 몰랐습니다. 망가진 애도의 땅에서, 나는 그저 무엇이 자랄 수 있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니, 씨앗을 심어요. 당신의 희망이라는 선물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작은 것을 찾아보아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것이 자라리라는 것을 믿어요. 비록 그것이 꽃피우는 것을 당신이 볼 수는 없을지라도

책을 옮기면서 내내 생각했다.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상실과 실망이내게 닥쳤을 때, 나도 저자처럼 한계와 불확실함 속에서도 무언가를 끈기 있게 길러내는 행위로 스스로를 구할 수 있을까? 나는 아이도 정원도 없지만, 그래도 나 또한 세상에 확실히 자라나는 무언가를 보탤 수있을까? 혹시 내가 번역하는 책이 그런 것이 되어줄 수 있을까? 척박한곳에서도 작은 열매를 맺는 무엇, 남몰래 씨앗을 날리는 무엇, 그리하여또 다른 곳에서 뿌리내리는 무엇, 죽은 것 같다가도 땅이 녹으면 살아날수 있는 무엇, 들풀일 뿐이지만 누구에게는 약초로 쓰일지도 모르는 무엇, 살아 있는 무엇, 그것을 길러내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 때 상실을 견디고 희망을 믿을 수 있는 무엇. 저자가 들풀에서 ‘그것‘을 찾아냈듯이, 나도 독자 여러분도 각자의 그것을 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 우리의 그것들이 각자를 살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저자의 정원처럼 주변까지 아름답게 한다면 더욱 좋겠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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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아주 짙었다. 티셔츠 위에 후드 티를 입고 점퍼까지걸쳤는데 그 속으로 안개가 집요하게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 P263

"유자가 지긋지긋했을까?"
"그랬을지도 모르지." - P264

"이거 따가시면 카페 메뉴에 유자차도 생기는 거예요?"
"유자차는 집집마다 너무 흔해서 여기서 팔긴 좀 그렇고,
유자스콘이라도 만들어볼까 싶어요." - P269

"실컷 밟아둬. 이제 영영 밟을 일 없는 흙이니까."
그러고 보니 이 자리에 리조트가 들어서면 흙은 시멘트에덮여 다시는 해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 P272

"일이 초 찍은 걸 얻다 쓰냐."
"쓸 데가 없나? 이거 매일 일 초씩 찍어서 한 달 치 만들면꽤 근사하다? 삼촌도 <애프터 양>이라는 영화 한번 봐봐. 내인생 영환데." - P277

"너 우리 문재 좋아했구나. 어떡하지, 미안해서.
나에게는 하나도 웃을 일이 아니었고 세상이 다 무너지는일이었기 때문에 숙모의 웃음소리가 아주 사악하고 가혹하고원망스럽게만 들렸다. - P279

"내가 어렸을 때 말이야, 옆집에 살던 아줌마를 정말 싫어했어. 매번 귀찮게 말을 걸고 이상한 농담을 하고 주책맞고 하여튼 마음에 안 들었거든. 그런데 크고 보니까 내가 그 사람을좀 닮았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이젠 그 사람을 안 싫어해. 못 싫어해. 나 같은 사람을 어떻게 싫어해? 너도 날 계속싫어하려면 조심해. 나처럼 되지 않도록." - P281

"사는 게...... 너무 달아......‘ - P283

"아까 낮에 가르쳐준 거……… 라이브 포토. 내가 그동안 사진을 다 라이브 포토로 찍었더라. 그걸 이제야 알았네. 동영상을 하나도 안 찍어놓은 게 너무 후회됐었는데." - P285

사장은 삼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삼촌도 그런 사장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 가졌다가 한 번에 모든 걸 잃은 사람과 처음부터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 중에 누가 더 괴로울까. 나는 막 잠에서 깬 척 몸을 일으켰다. - P291

사는 게 너무 달아서 때론 숙모와 문재 오빠에게 미안해졌다.
달고 따뜻한 걸 우리만 계속 먹는 것 같아서. 숙모를 몰래 찍은동영상이 있다는 걸 삼촌에게 말하지 못했다. 어쩐지 선뜻 삼촌에게 그 영상을 보여줄 수가 없었다. 사람은 지극히 행복할 때느닷없이 슬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나도 알지만. - P293

"진짜 달아."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 P294

망한 인생의 천재 소설가 김지연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하는다른 말을 찾기는 어렵다. - P297

개인적인 무능력, 불성실, 불운 때문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개인에게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강도 높은 활동과 참여를 요구하고 그러면서도 안정된 삶의 기반을 갖추기 어렵게 되어있으며 심지어 "원래 자신의 몫인 그 돈"을 애초에 주지 않거나 빼앗아가는 계기가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의 인생이라도 망하는 쪽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그러느라 사랑이니뭐니 하는 것도 이번 생에는 다 망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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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시뻘건 김치제육볶음을 식판에 담지 않고, 누군가는 무국이 짜서 뜨거운 물을 부었다. 우리는밥을 먹으면서도 먹는 얘기를 계속했다. - P135

나는 평소에 사탕, 초콜릿, 아이스크림, 단 빵이나과자, 케이크 등을 잘 먹지 않는다. 가까운 사람들은내가 술꾼이라 단것을 좋아하지 않는 거라고 말한다. - P143

무를 채 썰어 생채로 무쳐놓으면, 고기 구워 먹을 때곁들여도 좋고 아무 때나 아무 반찬 넣고 비빔밥을 만들어 먹어도 좋다. 잘게 깍둑 썰어 담근 깍두기는 콩나물국에 어울리고, 큼직큼직 썰어 담근 깍두기는 고깃국이나 설렁탕에 좋다. 툭툭 칼로 빗금 치듯 삐져 새콤달콤하게 담근 무김치는 충무김밥의 필수 반찬이다. - P144

"아무리 봐도 비닐을 쓴 것 같지는 않은데요?"
"네?"
"암만 봐도 비니루 같지는 않다고요." - P148

나는 밥 한 숟가락에 조린 무한 점을 얹고 그 위에갈치를 얹는다. 햅쌀밥과 가을무와 갈치 속살로 이루어진 자그마한 삼단 조각케이크를 나는 한입에 넣는다. 따로 먹는 것과 같이 먹는 건 전혀 다른 맛이다. - P152

그럼 어떻게 된 것일까? 한국인의 소금 섭취량이 별로 높지 않다는 얘기냐? 그건 그렇지 않단다. 박 셰프의 결론은 한국 사람들이 국물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나트륨 섭취량이 세계 상위에 랭크돼 내려올 줄을모른다는 것이다. - P160

가끔 견딜 수 없이 어떤 국물이 먹고 싶어지는 때가있다. 무언가가 몹시 먹고 싶을 때 ‘목에서 손이 나온다‘는 말을 하는데, 그럴 때 내 목에서는 커다란 국자가 튀어나오는 듯한 느낌이다. 당장 그 국물을, 바로그 국물을, 다른 국물이 아닌 바로 그 국물의 첫맛을커다란 국자로 퍼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을 것 같아지는 것이다. 그렇게 열광적으로 그리워하는 국물 중 하나가 감자탕이다. - P162

밤새 눈이 많이 내린 날 오래 찬찬히 내려 폭신하게쌓인 눈을 밟으며 나는 시장에 꼬막을 사러 간다. - P167

=연인들의 항해는 어느덧 끝이 나고, 작은 점처럼 멀어졌던 현실이 점점 거대한 해안선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거기엔 온갖 비루하고 형이하학적인 문제들이들끓고 있는데, 음식도 그중 하나이다. - P170

나는 사람들을 가장 소박한 기쁨으로결합시키는 요소가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맛있는 음식을 놓고 둘러앉았을 때의 잔잔한 흥분과 쾌감,
서로 먹기를 권하는 몸짓을 할 때의 활기찬 연대감,
음식을 맛보고 서로 눈이 마주쳤을 때의 무한한 희열.
나는 그보다 아름다운 광경과그보다 따뜻한 공감은 상상할 수 없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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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가 허공을 가른다. 낮다. 제비가 낮게 날면 비가 온다. - P237

뭐하냐.
마당에 내어놓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종이비행기를 접고있을 때 종우가 왔다.
비행기 접어. - P240

종우의 물음에 지수는 곰곰 생각했다. 접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부엌 식탁 위에 올려져 있기만 했었다.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종우는 그 고갯짓에 안심이 됐는지다시 종이배를 접기 시작했다. - P241

어젯밤에 비가 막 쏟아지니까, 누가 또 버리고 갔나봐. - P244

바닷가에 살면서 소금기가 섞인 바람을 많이 맞으면 피부가빨리 삭는 거야.
지수는 그 말이 종우가 여태 한 말들 중 가장 해괴하다고 생각했다. - P245

소금기가 가득한 바람은 양철 지붕도 자동차도 빨리 삭게만들어. 우리 할머니가 늙은 것도 다 소금 때문이야. - P246

멍청한게. 왜 넌 열심히 안사냐 - P250

며칠 뒤 바다에서 시신 한 구가 밀려왔다. 마을 사람은 아니었다. 낚시꾼이었다. 양식장이 망가지고 생선들이 모두 쏟아져나오자 그걸 낚으러 왔던 사람이라고 했다. 온몸에 흠씬 두들겨맞은 흔적이 있었다. - P258

계절은 흘러가지 않고 뚝뚝 끊어진 채 지나갔다. -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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