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해 겨울, K대학 도서관 정문에는 ‘장기 연체자‘ 명단이 붙는다. 맨 밑에는 굵은 글씨로 "상기의 사람들은 책을 반납하지 않으면 졸업할 수 없음"이라고 적혀 있다. 구지경은 둘째 칸에 있고 연체 일수는 2558일. - P45

하지만 앞으로 나올 말은 분명히 들었다. 누군가 지경을 두고말했다. "걔는 문진이 없어서 안 돼." 사실 누가 말했는지도 또렷이기억나지만 여기는 그를 위한 자리가 아니며 그의 말 정도만 남겨도 충분하다. - P47

여름이 끝나갈 무렵, 오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니들쌀 다 떨어졌지?"
오지는 쌀 떨어질 때를 귀신같이 알았다.
"김형은 아직도 잡곡밥 못 먹고 흰쌀밥만 먹지?" - P49

"언니, 미안요."
"너 여기 놀러 나와?",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여기가 네 놀이터야?"
"언니 아니야?"
"됐고, 이것만 말해. 너 텍스트 읽어 왔어. 안 읽어 왔어?" - P53

규의 이른 귀가가 애들 때문인 걸 모두가 알았다. "잘난 척해봤자지두 엄마지, 뭐" 했던 건 누구였나. 규는 창피했고, 창피함을감추기 위해 작별인사가 길어졌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나도 아쉽지. 근데 어째. 일이 남았는데. 오늘도 밤샘 당첨이야. 핫식스나 사서 들어가야지. 정말이지 왜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니." 사람들은 규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 P61

규가 웃으며 말했다.
"나와요, 나와 나도 나오고, 지경씨도 나오고."
나도 나오고, 너도 나오고. - P6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개를 받자 둘은 고개를 약간 숙이며 인사했다. 아까부터 짓던 미소가 가시지 않은 건지 여전히 웃음기 띤 얼굴이었다.
"그럼 두분도 영화 만들려고 한국 온 거예요?" - P89

그 말에 내가 저는 맨날 혼자 영화관 가는데요,라고 농담하자 선배는 그러더라도 아마 순간순간 누군가를 떠올리며 영화를 보고 있을걸, 하고 말했다. - P91

"아니면 그냥 음식 사진을 휴대폰으로 찍는 동작으로도 충분할 것 같아. 그렇게 해서 사진으로 간직하는 거 엄청 좋다는 뜻이잖아." - P93

"아니지, 다르지. 한가을은 가을이 한창일 땐데 그게 어떻게 같아? 그냥 가을 정도를 원했으면 부모님이 가을이라고 했겠지, 그런데 한가을이잖아, 가장 가을인 거잖아." - P95

"응, 나는 안가."
선배는 두 손을 맞잡고 자기 손에 입김을 불어넣으며말했다.
"나 여기 살아." - P97

"그거야 선배가 내게 중요한,"
"수치심 때문이겠지."
안미진이 내 말을 잘랐다.
"내가 이 일을 하면서 배운 게 하나 있어. 사람들이 여기 오는 데도 나름의 힘이 필요하다? 용기가 없으면 병원에 올 수가 없어. 수치심을 이기고 여기로 오는 거야. 다르게 살고 싶어서." - P101

"쉬 야오 방망마?"
그때 어느 동에서 나왔는지 학생 하나가 지나다가 말을걸었다. 도와줄지 묻는 말이었다. 기숙사동에는 누구든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는 시간대인데 누굴까 싶어 고개를 들었더니 하얀 점퍼를 목까지 꼭 채워 입은 여자애가 서 있었다. 옥주는 괜찮다고 말하기 위해 입술을 뗐다.
"하……이 하…………오." - P109

"여기서 기도를 하자고요?"
"간단해요. 학업진전, 신체건강 하면서 잠깐 손을 착." - P115

옥주가 그렇게 말하자 레이철은 "여행이 끝나고 나면 결과도 나와 있겠죠" 하고 웃었다. 원래 여행과 사랑은 함께라며 레이철은 농담했지만옥주는 잔잔한 불안을 느꼈다. 그런 관계들에 승자는 없고 언제나 패자들만 있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 P1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집에 온 그녀는 저녁을 차리고 아들의 퇴근을 기다렸다. 얼마 뒤 재택근무를 마치고 방에서 나온 아들은 트레이닝 반바지에 반팔 와이셔츠 차림이라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그럼에도, 어차피 상체만 보이니까 별문제 없다며 웃는 아들의 넉살이 듬직해 보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강 사장. 영숙 언니 아들. 아니면 민식이.

"그분은 왜요?"
"저번에 안 계시던데, 어디 아프시거나 그래서 그만둔 건가요?"
"아니, 휴무 낸 건데, 어제는 근무하셨지. 그런데 왜요? 곽 선생이랑 아는 사인가?"
여자 손님이 수줍어서 그러는 건지 수긍을 한다는 건지 고개를 살짝 움직였다. 선숙은 답답해 참을수가 없었지만, 그녀의 조심스러운 태도에 순간 머릿속이 번쩍했다.

"동생은 지방에서 회사를 다니지만 저는 서울에서 어머니랑 같이 살아요,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싫어하시는데, 저는 사실 사회생활 시작하고 나서 아버지 생각이 종종 났어요. 아버지가제 수영 강습비니 대회 참가비니 다 감당하셨고, 심지어 대회가 있는 날 주요 사건 수사를 뒤로하고 물래 경기를 보고 가셨다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됐어요. 늘 무뚝뚝하셨지만 뒤로는 제가 선수가 되는 데 필요한 걸 다 책임져주셨죠. 다만 선수로 성공하지 못한 뒤에 저는 늘 주눅이 들었고, 그걸 못마땅하게 이긴 아버지와도 갈등이 더 생긴 거 같아요."

막무가내. 어찌 보면 자신의 지난 삶에서 선숙이 일을 해결하는 방식이었다. 남편과 아들을 대할 때도 그런 면이 없지 않았다.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있고, 그때는 ‘나‘가 아니라 관찰자의 시점으로 자신의 사안을 바라봐야 한다고 배웠다. 누구에게? 영숙 언니에게 아들과 대화의 물꼬를 튼 시점에서 얼마 안 지나 다시 성질이 끓어오르던 찰나, 그녀의 주의 깊은 조언으로 아들에게 막무가내 따지는 버릇을 잠재울 수 있었다.

"사실 얼마 전에 딸을 만났습니다."
곽 선생의 말이 끝나자마자 선숙은 반사적으로 카운터를 향해 몸을 들이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 몇 달씩 해외에 머물며 책을 쓰는 호사를 누렸다. 이국에 머물며 모국어로 글을 쓴다는 것은 언뜻 그럴듯하게 느껴지지만사실상 자청해서 부적응자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P14

지금 카페 종업원은 주전자에 담긴, 김이 나는거운 물을 대리석 바닥에 뿌리고 그 위를 대걸레로닦고 있다. 내 앞에서 서서 그 일을 반복하고 있다. 네발이 놓인 곳의 바닥을 닦고 싶으니 나가달라는 뜻인것 같다.
카페에 손님은 아직 둘 더 남아 있다. - P26

작업 일지를 쓰면서 생긴 변화도 있다. 그건 동료작가들이나 후배 작가들에게 메시지를 받는 일이 왕왕 있다는 것이다. 친분이 있는 작가일 때도 있지만일면식이 없던 작가에게도 연락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내용은 대체로 거의 동일하다. 하나같이 나의작업 일지를 잘 보고 있다면서 그 글을 보면서 자기도 힘을 얻고 있다며, 자기도 열심히 써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일종의 자기 다짐의 글이자 계속 나를 응원하겠다는 글이다. 내가 한 일이라곤 내 작업 일지를 올린 것밖에 없는데 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받으니 송구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그들이 왜 그런 인사를 건넸는지, 사실 나는 그 이유를 너무 잘 알 것 같다. - P35

문학 전공생 시절에 어딘가에서 들었던 말이다.
"영감을 기다리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일을 하러 간다." 소설을 읽고 쓰며 살았던 지난 삶을 돌아보면 나는 언제나 그 말에 억압받았던 것 같다. 원어의 뉘앙스와 맥락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내내그 말에 가깝게 살아보고자, 그 말을 실천하고자 했다. 소설 쓰기가 내게 정확한 노동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한편으로는 읽고 쓰는 행위가 우리 사회에서 말하는 노동(산업사회의 임노동 개념을 아예 비껴갈 순 없겠지만)에 준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자격지심. - P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