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는 이혼숙려기간 동안 형부와 같이 살았다. - P177
-거미를 먹으면 살이 빠진대. -진짜? - P183
엄마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언니도 담배를 꺼냈고, 나에게 한 개비를 주었다. 우리는 감나무를 향해 함께 연기를 내뿜었다. - P187
-자, 운행 시작합니다. 나는 아빠의 차 옆구리를 받았다. 아빠가 어이쿠, 하면서 웃었다. 그다음으론 엄마를 쫓아가 사정없이 밀어댔다. 그러고는 언니였다. 온 가족을 밀치면서 나는 장내를 몇 바퀴나 돌았다. 시간이다 되자 차가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엄마가 안전띠를 풀면서-이거 완전히 폭군이네, 폭군이야. 라고 말했다. - P200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나는 대답했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날, 엘리엇 스미스의 사망일, 그리고 두분의 이혼일이요. -하나 더 있는데 못 들었어? - 생일 축하해요. 그가 다시 한번 웃었다. 그는 생일에 이혼한 사람이 되었다. 그들의 결혼사진이 거실에서 떼어졌다. 가족이라는 것도 시작과 끝이 있다니. 인부들이 바쁘게 오갔고 나는 오늘 같은 날도 짜장면을 먹어야 하는 건가, 생각했다. - P203
‘캘리포니아는 여전히 건조하다. 생일 축하한다. 캘리포니아와의 시차를 고려하면 메시지는 생일날보다 삼 일이나 먼저 보내진 셈이었다. - P208
j는 생일 전날인 오늘까지 네 번의 길고 짧은 연애를 쉬지 않고했으며 다섯 명의 남자와 잤다. 기억할 만한 연애도 있었고 아무런 추억도 남지 않은 연애도 있었다. 그중 나이트클럽과 관련이있는 연애는 단 한 번이었다. - P210
의 첫번째 연애는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종류의 것이었다. j는 자신 안에 그렇게 많은 분노와 불안이존재한다는 걸 연애를 하며 처음 알게 되었다. j의 연인은 아주 다정하지는 않았지만)가 터뜨리는 감정을 잘 참아내는 편이었다. 두사람은 서로가 첫 연인이었고, 결혼을 제외하고 보통의 연인들이하는 거의 모든 것을 다 했다. 헤어지고 나서가 느낀 감정은 슬픔보다는 안도감이었다. 자신의 분노와 불안을 더이상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 P215
-시내에 있는 그 나이트클럽 지붕이 열린대. 오늘 눈 온댔는데, 지붕 열리면 멋있지 않겠어? - P218
야, 너도 와서 먹어라. 꿈속의 엄마가 말했고, 그것 때문에 엄마와 할아버지가 싸웠다. 둘은 생전에도 쓸데없는 일로 자주 싸우곤 했다. 가-엄마, 그거 비아그란 거 다 알아. 하자 엄마는, -네 나이에는 안 먹어도 되나? - P221
이모가 보낸 메시지에는 사진 하나가 첨부되어 있었다. 그것을누르는 찰나, j는 이십구 년의 시간이 지나간 느낌을 받았다. j는앞으로의 모든 삶이 이렇게 지나가리라 예감했다. 그런 예감은 언제나 틀렸지만. - P230
아빠가 방을 쓰기 전에 동생은 자신의 물건들을 따로 보관해달라고 했다. 나는 박스 하나를 사서 동생의 책과 노트 등을 담다가동생이 학창시절에 쓴 일기장을 발견했다. 일기장엔 엄마 욕이 페이지마다 적혀 있었다. 동생이 소설가라면 엄마를 열 번도 넘게죽였을 것이다. 나는 일기장을 박스 맨 아래에 숨겨놓았다. - P235
- 애가 웃긴다. 내가 김치를 드니까 입을 아, 벌리고 가만히 있더라. 집에서 그렇게 키우나? 그로부터 이십 년도 더 지났다. 금여인숙을 운영하는 사람이여전히 그 할머니가 맞을지 궁금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알아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 P240
‘거긴 왜 갔니? 오늘 집에 안 들어오니?‘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아빠, 나 오늘은 모텔에서 자고 가요, 이런 대답을 할 수도 없고 해서, ‘둘 중에 오복분식 자리가 어디야?‘ - P244
어둠 속에서 동생이 물었다. -아빠 죽일 거야? 깜짝 놀랐고, 이내 소설 이야기라는 걸 깨달았다. -언젠간. -안 쓴다더니. - P250
누군가 나를 죽이는 소설을 쓰는 날이 올까. 너무 오래 살다보면 그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아마 높은 확률로그것을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나뿐일 것이다. - P259
일반적으로 소설은 보상의 형식을 띤다. 보상의 내용은 시대마다 다르지만 대개는 생산적인 교훈이나 변화의 여지 같은 것이기마련이다. 경제적 생존과 번영, 그리고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인식 개선이 요구되는 지금이라면 여성의 계몽이 우리 시대 소설적 보상의 범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송지현의 이번 소설집 『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은 그 본보기를 따르지 않는다. 여성의 각성과성취를 말하는 의기양양한 성공담과 야망심을 북돋아주는 짱짱한임파워링 구호에서 소외된 이들의 흥망성쇠 일상사가 이 책을 채우고 있다. - P263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용기나 희망은 자주 상처를 모욕한다. 그것들은 아픔이 경감되고, 치유되고, 이윽고 훈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독려하며 사람을 침식시키는 상처를 폄하한다. 고난은 대개 그것이 언젠가는 해결되리라는 발전의 마스터플롯을 따라 작동하는데, 부정적 감정은 미래의 시간을 포함하는 희망의 서사 속에 안착되어야만 다뤄볼 수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 P264
소설집을 관통하는 다른 한 축에는 노동의 문제가 있다. 송지현의 소설이 저성장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 세대를 주인공으로 삼으면서도 강도 높은 노동 행위를 표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매우 독특한 점이다. 또한 거의 모든 작품에서 여행이 그려지고 있는 것도 동일한 의미에서 주목을 요한다. - P273
실제의 삶은 그렇지가 않다. 고통과 해방, 우울과 기쁨은 순차적으로도 인과적으로도 전개되지 않는다. 고생 끝에도 낙이 오지 않고 비온 뒤에도 땅이 굳지 않을 수 있으며 그러고도 삶은 지속된다. 수치심과 억울함, 적개심과 황망함과 같은소수자의 르상티망은 영영 해소될 수 없는 감정으로 인간을 오래번뇌케 할 것이다. -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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