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은 책이그런 우연한우연히 우리에게 도달하면 좋겠다.
충돌을 일상에 더해가는 것만으로우린 충분할지도.

그러면서 문득 생각했다.
언젠가는 나도 이런 것을 만들고 싶다.
‘이런 것‘이 뭔지 그때는 몰랐다. 적어도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는 생각이 아닌건 확실했다. 소설이어야 한다거나 글이어야 한다는 생각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건 아마 형식조차분명하지 않은, 추상적인 무언가였을 것이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혹은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 출렁이게 하고 확 쏟아버리게 하는 것. 뒤늦게 다시 주워 담아보지만, 더는 이전과 같지 않은 것. - P9

결코 읽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눈길도 주지 않았던책을 우연히 펼쳐드는 순간이 있다. 투덜거리며, 의심을 가득품고, 순수하지 않은 목적으로, 그런 우연한 순간들이 때로는나를 가장 기이하고 반짝이는 세상으로 데려가고는 했다.
그 우연의 순간들을 여기에 조심스레 펼쳐놓는다. - P11

우리는 스스로를 너무 중요한 존재로 여기는 나머지, 별들이 주인공인 것이 분명한 밤하늘을 보면서도 인간을 생각하고, 개성 넘치는 생물로 가득한 심해를 보면서도 인간을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은 ‘공생은 어디에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쉽게 인간적 교훈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 P22

다시 말해, SF는 인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그 사실을 무척 좋아한다. - P27

팬데믹이 덮친 세계에서 마스크, 백신, 치료제, 진단기술, 비대면 플랫폼은 감염을 통제하고 희생을 줄이는 데에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사람들 사이 제대로 된 합의와 제도없이는 기술과 도구도 제 역할을 할 수 없다. 여기서 인간과기술 둘 중 하나가 더 중요하다고 무게를 실어주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불필요한 것 같다. 모든 테크놀로지는 인간과 함께 복잡한 연결망 위에서 작동한다. - P31

분명 전에도 식물원에는 여러 번 가보았는데 완전히 새로운 느낌이었다. 이제껏 알지 못했던 세상의 풍경들이 나에게 갑작스레 문을 열어준 것만 같았다. - P35

그러나 나는 SF가 수행하는 그 불완전한 시도들을 좋아한다. 지구의 밤하늘에만 달이 뜨는 것이 아니라 달의 하늘에지구가 뜰 수도 있음을 알았을 때, 그 장면을 사람들이 사진으로라도 직접 목격했을 때 그들이 지녔던 지구에 대한 인식은 약간은 반드시 변했을 것이다. - P37

지금도 나는 내가 밑천 없는 작가라고 느끼지만 예전만큼그것이 두렵지는 않다. 이제는 글쓰기가 작가 안에 있는 것을소진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바깥의 재료를 가져와 배합하고쌓아 올리는 요리나 건축에 가깝게 느껴진다. 배우고 탐험하는 일, 무언가를 넓게 또는 깊이 알아가는 일, 세계를 확장하는 일.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쓰기의 여정에 포함된다. - P42

누구나 처음에는 아는 것이 없고 형편없는 것만 만들어낸다. 하지만 앞선 연구자들이 오랜 세월 쌓아놓은 벽돌 무더기를 딛고 올라가서 장벽 너머를 보면 무언가가 약간 변한다.
새로운 것, 예전에 없던 것을 만들어내려면 이전에 뭐가 있었는지를 탐구하는 일이 우선이다. 그래야 무엇이 새로운지를알 수 있으니까. - P47

내가 읽은 SF에 대한 수많은 정의를 아주 대충 요약해서나열해보면 이런 식이다. 1) SF는 과학기술과 인간의 관계를다루는 문학이다. 2) SF는 과학적 방법론을 바탕으로 한 장르다. 과학적 소재가 아니어도 다루는 태도가 과학적이면 SF다.
3) SF는 경이감의 장르다. 4) SF는 인지적 소외의 문학이다.
5) SF는 세계의 변화를 다루는 장르다. 6) SF는 다른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장르다. 7) 작가가 SF라고 썼으면 SF다. 8)전부 틀렸다. 하드 SF만 진정한 SF다. 9) 무슨 소리, 고전 SF가 진정한 SF다. 이후는 전부 모조품이다. - P52

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SF를 쓰려는 사람들에게 ‘SF란 무엇인가‘의 미로 속에서 한번 길을 잃어보는 것이 가치 있는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도 그 시간은 가치 있었다. 미로를헤매며 SF 세계의 복잡하고 종잡을 수 없는 특성을 직접 몸으로 체득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앞으로 탐험할 드넓은 세계의약도를 대략적으로나마 그려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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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왜 이렇게 많아?"
"출판사래."
"이 집은 딸이 사장인가봐."
"왜?"
"다 시키잖아." - P13

그들의 집에는 가부장도 없고 가모장도 없다. 바야흐로 가녀장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 P23

그들이 일하는 작은 회사의 이름은 낮잠 출판사다. 아무리 바빠도 낮잠은 꼭 챙기는 아가 운영한다. 출판사 대표인 그가 좋아하는 것은 채 색깔별로 정리된 책꽂이 서재에서 하는 실내흡연, 더이상 교정교열할 것이 없는 원고, 벽돌색 립스틱, 치실전 세츠와 넥타이, 포마드로 머리 넘기기 등이다. - P31

"쫓겨나기 싫으면 가만히 있어."
모부에겐 나가서살돈이 없다. 서울은 집값이 말도 안 되게비싼 도시이며, 요즘 같은 시절에는 새 직장을 구하기도 어렵다.
웅이도 그걸 잘 알기에 조신히 실외 흡연을 한다. - P35

시 생계를 위해서라면 쓰레기 산에도 오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슬아는 모부가 거쳐온 지난한 노동의 역사를 지켜보며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란 노동을 감당하는 이들이었다. 어떤 어른들은 많이 일하는데도 조금 벌었다. 복희와 웅이처럼 말이다. 가세를 일으키고자 하는 열망이 슬아의 가슴속에서 꿈틀거렸다. - P39

"복권을 사는 사람이 당첨돼요. 사지 않으면 당첨될 수가 없어요. - P43

몇 시간 후 오른팔에는 청소기를, 왼팔에는 대걸레를 새긴 웅.
이가 집에 돌아온다.
웅이가 즐거운 얼굴로 양팔을 내밀자 복희가 화들짝 놀란다.
"자기야! 너무......"
복희는 고민하며 할말을 고른다.
"너무… 성실해 보인다!"
가녀장이 서재에서 내려온다. 웅이를 발견하고 한마디한다.
"섹시하네."
복희가 묻는다.
"섹시해?"
슬아가 대답한다. - P47

웅이가 훌훌 떠나보낸 문학을 슬아는 힘껏 붙들고 있다. 슬아를 모시는 게 어쩌면 문학을 간접적으로 사랑하는 방식일지도모르겠다고 웅이는 생각한다. - P53

"피곤하시죠?"
슬아가 첫 모금을 맛있게 뱉으며 대답한다.
"너무 많은 말을 한 것 같습니다."
웅이는 심심한 위로를 건넨다.
"그러라고 돈을 받으신걸요." - P60

"어쨌거나 일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합시다."
슬아의 어깨는 작지만 단단하다. 그것이 바로 가녀장의 어깨일 것이다. 웅이가 운전석과 조수석의 창문을 동시에 내린다. 부녀는 연기를 내뿜으며 밤길을 달려 집에 돌아온다. - P61

슬아는 형식적으로 인사한다.
"늘 감사드립니다."
웅이도 형식적으로 인사한다.
"저야말로 늘 감사드립니다."
부엌에 둘만 남겨지자 복희와 웅이는 쑥덕거린다.
"쟤는 아침까지 자놓고 왜 점심에 또 잔대?"
"내 말이."
"은근 게을러."
"원고도 맨날 지각하잖아."
"책 제목은 ‘부지런한 사랑‘인데."
"지가 부지런하고 싶을 때만 부지런한 거지." - P65

일간지에서 고정 필진 요청이 들어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아침식사중에 복희가 묻는다. 슬아는 페이부터 체크한다.
"원고료가 명시되어 있나요?"
"소정의 원고료‘라고만 적혀 있습니다."
낡은 방식으로 청탁을 하는군요. 거절하세요."
"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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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의 어깨 위에는 하얀 새가 앉아 있어.

테이블도 하얘. 접시와 포크, 숟가락까지 하얗지.

천장에는 커다랗고 둥근 달이 하얗게 빛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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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최승자 자신은 이를 9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자각했던 모양이지만, - P276

그러나 90년대로 접어들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 P277

그것의 맞은편에 부정의 대상으로 존재해주어야 할 대타항으로서의 세계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이것은 심각한 위기 상황이다. 잃을 것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거기서 하나를 더 잃었으니까 존재론적 정착지를 완전히 잃은 사람, 그는 존재론적 난민이되었다. - P279

시간은 시간을 갖고 있지 않다.
모든 사물이 저마다의 시간을 갖고 있을 뿐나는 자전하면서 그것들 주위를 공전하고지금 내 주파수는 온통 우라노스에게 맞춰져 있다. - P280

서의 시간이 있다는 것. 둥그런 거미줄의 마지막 대목에서 한 여자는 그 바람도 없는 시간을, 차라리 공간에 가까운 그 시간을 걸어 어디로 가는가. "제 삶의 가로수길"을 다 걸어 "소실점 바깥으로" 사라진다는 것. 이것은 시간의 월경, 다시 말해 역사적 시간에서 신화적 시간으로의 이동이다 - P282

한 여자가 제 삶의가로수길을 다 걸어가소실점 바깥으로 사라진다. - P282

용서하라고, 용서가 가장 완벽하게 빠져나오는 길이라고. 이손은 누구의 손이며 이것은 어떻게 가능해진 용서인가 존재론적정착지를 잃어버린 90년대의 난민 시인 최승자는 이렇게 신화적세계에 입사하면서 ‘고통의 정화‘ (백합의 선물」) 혹은 ‘완벽한 탈출‘(「구토」)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그야말로 자기 치유의작업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 P287

여느 때였으면 이 글은여기서 끝나야 한다. 그러나 대상이 최승자이므로, 나는 한번 더뒤집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패배라고 해도 좋은가? 그 대가로그가 세기말의 세계적 위기와 연동된 정신적 위기 국면을 무사히통과할 수 있었다면, 그리고 그가 새롭게 도달한 고향에서 안정을얻고 새로운 세기를 아픔 없이 맞이할 수 있었다면? 나는 21세기의 최승자에 대해서도 그가 출간한 세 권의 시집보다는 그의 육체적·정신적 안부에 더 관심을 갖는다. 그러니까 그가 사랑을 받고있느냐 하는 것 말이다. 그 대상이 가족이건 신이건, 그가 ‘존재론적 정착‘에 성공했기를 바란다. 시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사랑을얻었으면 그만이다. 최승자는 언제나 살기 위해 썼지 쓰기 위해 살지 않았으니까. -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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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거대한 나무들이 가지를 낮추는 부드러운 모습이 좋다 - P54

병원으로 향하는 좁은 언덕에 작은 꽃집이 희망처럼 있는 게 좋다 - P54

약조보다는 약속을가장 여린 손가락을서로가 서로에게 거는 게 좋다 유 - P55

폐가 터지도록 달려서 봤던 마지막 얼굴이 내 남은 여름을 후회로부터 지켜주었다. - P55

사랑을 줘야지 헛물을 켜야지 - P56

예민하게 코끝을 국화에 처박고 싶어 다음 생엔 꽃집 같은거 하고 싶다고 겁 없이 살 때 소나기 그칠 때 구름이 뚫릴때 엄마랑 샛노란 빛의 입자를 후루룩 삼키며 - P56

아주 오랫동안 장미를 들여다보았죠외롭고 춥고 스스로 찢고 홀로 빛나고 - P59

너무 어두우면 초를 켜고 금빛을 쐬자고온갖 육중한 마음에 살에 엿기름을 칠하고벼가 탄다 경전이, 사랑이 분다고삐를 당겨 조금 더 우리, 밝은 쪽으로어린이보호구역처럼 아름다운 곳으로 - P61

그게 불안일지라도 비참해져도이탈을 모른 채너에게 정직한 땀을 뻘뻘 흘리며네 턱에 닿는 눈빛만으로 여름이 열리고 있었다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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