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왜 이렇게 많아?" "출판사래." "이 집은 딸이 사장인가봐." "왜?" "다 시키잖아." - P13
그들의 집에는 가부장도 없고 가모장도 없다. 바야흐로 가녀장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 P23
그들이 일하는 작은 회사의 이름은 낮잠 출판사다. 아무리 바빠도 낮잠은 꼭 챙기는 아가 운영한다. 출판사 대표인 그가 좋아하는 것은 채 색깔별로 정리된 책꽂이 서재에서 하는 실내흡연, 더이상 교정교열할 것이 없는 원고, 벽돌색 립스틱, 치실전 세츠와 넥타이, 포마드로 머리 넘기기 등이다. - P31
"쫓겨나기 싫으면 가만히 있어." 모부에겐 나가서살돈이 없다. 서울은 집값이 말도 안 되게비싼 도시이며, 요즘 같은 시절에는 새 직장을 구하기도 어렵다. 웅이도 그걸 잘 알기에 조신히 실외 흡연을 한다. - P35
시 생계를 위해서라면 쓰레기 산에도 오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슬아는 모부가 거쳐온 지난한 노동의 역사를 지켜보며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란 노동을 감당하는 이들이었다. 어떤 어른들은 많이 일하는데도 조금 벌었다. 복희와 웅이처럼 말이다. 가세를 일으키고자 하는 열망이 슬아의 가슴속에서 꿈틀거렸다. - P39
"복권을 사는 사람이 당첨돼요. 사지 않으면 당첨될 수가 없어요. - P43
몇 시간 후 오른팔에는 청소기를, 왼팔에는 대걸레를 새긴 웅. 이가 집에 돌아온다. 웅이가 즐거운 얼굴로 양팔을 내밀자 복희가 화들짝 놀란다. "자기야! 너무......" 복희는 고민하며 할말을 고른다. "너무… 성실해 보인다!" 가녀장이 서재에서 내려온다. 웅이를 발견하고 한마디한다. "섹시하네." 복희가 묻는다. "섹시해?" 슬아가 대답한다. - P47
웅이가 훌훌 떠나보낸 문학을 슬아는 힘껏 붙들고 있다. 슬아를 모시는 게 어쩌면 문학을 간접적으로 사랑하는 방식일지도모르겠다고 웅이는 생각한다. - P53
"피곤하시죠?" 슬아가 첫 모금을 맛있게 뱉으며 대답한다. "너무 많은 말을 한 것 같습니다." 웅이는 심심한 위로를 건넨다. "그러라고 돈을 받으신걸요." - P60
"어쨌거나 일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합시다." 슬아의 어깨는 작지만 단단하다. 그것이 바로 가녀장의 어깨일 것이다. 웅이가 운전석과 조수석의 창문을 동시에 내린다. 부녀는 연기를 내뿜으며 밤길을 달려 집에 돌아온다. - P61
슬아는 형식적으로 인사한다. "늘 감사드립니다." 웅이도 형식적으로 인사한다. "저야말로 늘 감사드립니다." 부엌에 둘만 남겨지자 복희와 웅이는 쑥덕거린다. "쟤는 아침까지 자놓고 왜 점심에 또 잔대?" "내 말이." "은근 게을러." "원고도 맨날 지각하잖아." "책 제목은 ‘부지런한 사랑‘인데." "지가 부지런하고 싶을 때만 부지런한 거지." - P65
일간지에서 고정 필진 요청이 들어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아침식사중에 복희가 묻는다. 슬아는 페이부터 체크한다. "원고료가 명시되어 있나요?" "소정의 원고료‘라고만 적혀 있습니다." 낡은 방식으로 청탁을 하는군요. 거절하세요." "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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