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여~!"
그 말에 슬아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웃고는 긴 인터뷰를 진행했다. 지난 70년간 어떤 일을 하며 살아왔는지 묻자존자와 병찬의 입에서 별별 사연이 강물처럼 흘러나왔다. 슬아의 책은 그것을 열심히 듣고 적은 결과다. 복희는 가방에서 책을 꺼낸 뒤존자에게 건넨다. - P103

슬아 뭐라고 하셨어요?
병찬 "밥사발에도 눈물이 있고 죽사발에도 웃음이 있으니,
죽을 먹어도 웃을 수 있다면 살겠다"라고 말하는 거야. 내가열아홉에 그 말을 듣고 감동을 받아버린겨.
슬아 결혼해보니까 어떠셨어요?
....
존자 해보니까, 안 한 것만 못하.…… - P105

자신에 관한 긴 글을 듣자 오랜 서러움이 조금은 남의 일처럼느껴졌다. 슬아의 해설과 함께 어떤 시간이 보기 좋게 떠나갔다.
이야기가 된다는 건 멀어지는 것이구나. 존자는 앉은 채로 어렴풋이 깨달았다. 실바람 같은 자유가 존자의 가슴에 깃들었다. 멀어져야만 얻게 되는 자유였다. 고정된 기억들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 P109

"나도 삼십대 땐 로즈 시절이었어~"
슬아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정한다.
"리즈 시절이겠지......"
복희는 헷갈리는 얼굴로 생각에 잠긴다.
"그게 그거 아닌가?"
"전혀 달라. - P111

"로즈 시절이네." - P117

‘슬아 사장님은 언제 놀아요?"
철이가 묻고 복희가 디저트를 준비하며 대답한다.
"나도 그게 궁금해." - P125

1. 마감을 지켰고 글도 좋은 원고2. 마감은 늦었지만 글이 좋은 원고3. 마감은 지켰지만 글이 별로인 원고4. 마감도 늦었고 글도 별로인 원고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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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당근이라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찬란이다. - P28

슬픔에 빠져 주위가 암담할 때 당근을 생각한다. 자신이 화려한 색을 지닌 것도 모른 채 땅속에 잠겨 있는 형광빛의 근채류 식물. 어쩌면 우리가 보는 세계가 이토록 캄캄한것은 마음 주위를 자전하는 빛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휘황과광채는 도리어 주위의 캄캄함을 일깨우기에. 그렇게 생각하면 우주로부터 지구로 파견 나온 스파이가 된 것 같다. - P27

물의 날개가 땅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바라본다.
작고 붉은 종들이 가지 사이에 모여 흔들린다.
여름의 부름. - P36

붉은 물방울들이 높이 솟아오른다.
기다림을 통과한 색깔들은 준비가 되어 있다.
손끝의 액체들을 입술로 훑으면,
이종의 두 몸이 서로를 알아보는 신호로서의 감칠맛. - P39

선드라이 토마토를 만드는 일은 태양의 긴 여행을 뒤쫓는 방식들 중 하나라는 것. 열매와 빛이 만나는 곳에서 새로운 여름의 형식을 만들어내는일이라는 것을. - P42

수란을 터트리는 일은 아름답고, 은밀하고, 사랑스럽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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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떠났다.
정하가 나무 사진을 보며 말했다.
"나무는 전설 속 동물이었던 것 같아."
아, 그렇구나.
우리는 전설 속 동물과행복한 꿈을 꾸다 깨어났구나.

끊임없이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나무는 멀리 간 게 아니라, 내마음속으로 옮겨온 거다, 외출할 때 혼자 두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좋아, 마음속에서 내 눈물을 먹으면 안 되니 울면 안 돼, 등등. 덕분에 목숨처럼 사랑한 반려동물과 헤어졌지만, 펫로스 증후군이 없었다. - P7

낯선 도시, 낯선 집에 온 강아지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했을까. 그때는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강아지에게도 마음이 있다는 걸 몰랐다. 사실 새 식구를 만난 기쁨보다 정하와 약속을 지켰다는 안도감과 앞으로 이 개를 어떻게 키우나 하는 암담함이 더 컸다. - P27

그동안 본의아니게 굶긴 것을 가슴 아파하며 나무에게 사료도 많이주고, 배변 훈련도 시키지 않고, 엄마라는 호칭도 허락해주었다. 정하가 "나무야, 엄마가~"라고 하면 "내가 왜 개 엄마야" 하고 거부했는데. 호적에 올릴 순 없지만, 이제 어엿한 둘째 딸로 인정하기로 했다. - P39

그런데 안기는 건 달랐다. 밖에 나가면 꼭 나한테만 안겼다. 그건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하다. 그렇게 좋아하는 이모도, 정하도 안으려고 하면 미친 듯이 이단옆차기를 해서 물리치고 내게로 왔다. 아마도 생후 45일째부터 키워서 나를 친엄마라고 생각한 것 같다. 아, 나는 친엄마가 아닌데. 나무야, 네게도 막장 드라마처럼 출생의 비밀이있단다. - P53

그런데 안기는 건 달랐다. 밖에 나가면 꼭 나한테만 안겼다. 그건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하다. 그렇게 좋아하는 이모도, 정하도 안으려고 하면 미친 듯이 이단옆차기를 해서 물리치고 내게로 왔다. 아마도 생후 45일째부터 키워서 나를 친엄마라고 생각한 것 같다. 아, 나는 친엄마가 아닌데. 나무야, 네게도 막장 드라마처럼 출생의 비밀이있단다. - P53

노는 것 다 알아요.
산책이나 하러 가자고요. - P58

못 찾으면 낑낑거리고 울면서 이 방 저방 찾으러 뛰어다닌다. 그런 아이를 상대로 매번 숨을 곳을 연구하는 나. 개하고 너무 진지하게 숨바꼭질하는 것 같다. 운동도 되고 재미있기도 하지만, 무라카미하루키 에세이를 번역하다 말고 개하고 숨바꼭질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이게 고급 인력이 할 짓인가 싶습니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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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건이 있다.
손안에서 함부로 뭉개지는 작정들이 있다. - P8

씨앗을 빼기 위해 칼로 그 중심을 나눌 때, 나는 매번눈동자를 찌르는 듯한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하나의 동공을 가지려 오래도록 몸을 부풀렸을 정념을 상상하면서. 칼집을 낸 씨를 비틀어 떼어내며 눈빛을 배우기 위해 떠나는긴 순례를 떠올린다. 소중한 것을 상처 입힌 채 떠나보낸사람들의 텅 빈 눈가. 누구나 자신의 규모에 맞는 부재를끌어안고 살아간다. - P11

스쳐 지나가는 지금을 어떻게 묶고 옥죄어 가두어야하는가. 우리가 가장 가질 수 없는 것. 계속해서 잃어버리고 마는 것. 사라지는 여기에 어떤 형식을 덧대어야 하는가. 이것은 달래를 다듬는 노인과 시인이 공유하는 오랜 고민이다. 그냥 두면 시들어버릴 순간들을 캐다가 씻고 다듬어 차려내기. 시들기 전에, 무르기 전에, 조금이라도 당시의 색과 향을 지켜내기. - P17

우리는 사라질 계절과 노닌다. 간절과 간절 사이에서.
예감 속에서. 모든 것이 사라지리라는 슬픈 안심 속에서.
시간을 자른 단면들에서 투명한 진액들이 조금씩 흘러나오는 것도 모르고. 그렇게 느닷없이 향의 기억을 얻은 줄도모르고. - P20

시장에서는 잎사귀를 떼어내지 않고 그대로팔기도 하는데, 줄기 부분을 잡고 들어 올리면 당근은 순한토끼처럼 가만히 매달려온다. 손질할 때 윗부분을 잘라 작은 종지에 물과 함께 담아놓으면 금방 잎사귀가 돋아난다.
창가에서 귀엽고 아름다운 초록 잎이 자라나는 모습은 주방의 작은 기쁨 중 하나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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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단순히 그동안의 삶을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꿈을 꿀때처럼 실제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과 같았다. 다만 실제의 삶과다른 점이 있다면 시간이 거꾸로 흘러간다는 것이었다. 동반자살을 하는 그날이 새로운 인생의 첫날이 되고, 자고 일어나면 그 전날이 찾아온다. 그제야 둘은 시간이 거꾸로 흘러가고 자신들은 날마다 어려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P17

그것도 꽤 자주 하지만 대학원생이던 그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다음에 두 배의 금액을 다시 같은 쪽에 걸면 되니까 일곱번째에 그 반대쪽이 나올 확률은99퍼센트 이상이다. 물론 그럼에도 질 수 있다. 그래, 그게 도박이다. 그럼에도 괜찮다. 다시 두 배 올린 금액을 같은 쪽에 건다. 이제부터는 절대 질 수 없는 게임이 시작되는 셈이니까. 카지노에는서리 벼수가 있지만, 이게 그의 기본적인 전략이었다. - P21

"그때는 줄리아라는 영매를 통해 귀신인지 영혼인지 알 수 없는 어떤 존재가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생각이 막 들었어."
"그게 아니라면?"
내가 물었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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