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건이 있다.
손안에서 함부로 뭉개지는 작정들이 있다. - P8

씨앗을 빼기 위해 칼로 그 중심을 나눌 때, 나는 매번눈동자를 찌르는 듯한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하나의 동공을 가지려 오래도록 몸을 부풀렸을 정념을 상상하면서. 칼집을 낸 씨를 비틀어 떼어내며 눈빛을 배우기 위해 떠나는긴 순례를 떠올린다. 소중한 것을 상처 입힌 채 떠나보낸사람들의 텅 빈 눈가. 누구나 자신의 규모에 맞는 부재를끌어안고 살아간다. - P11

스쳐 지나가는 지금을 어떻게 묶고 옥죄어 가두어야하는가. 우리가 가장 가질 수 없는 것. 계속해서 잃어버리고 마는 것. 사라지는 여기에 어떤 형식을 덧대어야 하는가. 이것은 달래를 다듬는 노인과 시인이 공유하는 오랜 고민이다. 그냥 두면 시들어버릴 순간들을 캐다가 씻고 다듬어 차려내기. 시들기 전에, 무르기 전에, 조금이라도 당시의 색과 향을 지켜내기. - P17

우리는 사라질 계절과 노닌다. 간절과 간절 사이에서.
예감 속에서. 모든 것이 사라지리라는 슬픈 안심 속에서.
시간을 자른 단면들에서 투명한 진액들이 조금씩 흘러나오는 것도 모르고. 그렇게 느닷없이 향의 기억을 얻은 줄도모르고. - P20

시장에서는 잎사귀를 떼어내지 않고 그대로팔기도 하는데, 줄기 부분을 잡고 들어 올리면 당근은 순한토끼처럼 가만히 매달려온다. 손질할 때 윗부분을 잘라 작은 종지에 물과 함께 담아놓으면 금방 잎사귀가 돋아난다.
창가에서 귀엽고 아름다운 초록 잎이 자라나는 모습은 주방의 작은 기쁨 중 하나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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