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 짓는 슬아의 가슴속에 하나의 문장이 조용히 떠오른다.
여전히 사람들은 좋은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슬아에게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진리 중 하나다. 사람들이 좋은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믿지 않았다면 어떻게 계속 쓸 수 있겠는가. - P294

나오든 말든 소설이니까 상관없다고 웅이는 생각한다. 어떻게 등장하든 그것은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웅이에게 소설은거짓말 모음집 같은 것이다. 거짓말들을 모아 진실을 가리키는장르가 소설이니 말이다. - P302

슬아와 아이는 글을 마저 읽는다. 가족의 유산 중 좋은 것만을물려받을 수 있을까. 가족을 사랑하면서도 그들로부터 멀리 갈수 있을까. 혹은 가까이 머물면서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서로에게 정중한 타인인 채로 말이다. 아가 아직 탐구중인 그일을 미래의 아이는 좀더 수월히 해냈으면 좋겠다고 소망한다.
앞자리에 앉은 남자아이가 하품을 하며 슬아에게 질문한다. - P307

작은 책 한 권이 가부장제의 대안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저 무수한 저항 중 하나의 사례가 되면 좋겠습니다. 길고 뿌리깊은 역사의 흐름을 명랑하게 거스르는 인물들을 앞으로도 쓰고 싶습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 맺는 가족 이야기만큼이나가족으로부터 훌훌 해방되는 이야기 또한 꿈꾸고 있습니다. 사랑과 권력과 노동과 평등과 일상에 대한 공부는 끝이 없을 듯합니다. 이 공부를 오래할 수 있도록 길고 긴 세월이 제게 허락되기를 소망합니다. -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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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을 살아도 내가 네 마음을 모르네. 나무야. - P123

심지어 오늘은 "할아버지네"까지 들었다.
솔직히 우리 눈에도 나무가 암컷으로 보이지 않긴 하지만, 이렇게100퍼센트 확률로 수컷으로 보다니. 나무야, 가을에는 예쁘게 하고다니자. 할아버지는 진짜 충격이었다. 물론 할머니라 해도 충격이겠지만…………. - P132

그것만으로도 뽀돌이는 행복한 견생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언니는 뽀돌이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언니뿐만 아니라, 안타깝게 반려동물 보내신 분들이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보호자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그 아이의 운명이었다. - P137

다음 날 도착한 당근 님의 택배에는 구입하지 않은 코텍스까지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메모가 있었다.
애가 아프더라도 귀찮아하지 말고 잘 보살펴주세요.
보내고 나니 못해준 것만 생각나더라고요.
아, 또 울었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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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의 제안은 동시대 일본 작가와 함께 한 권을 써보지 않겠느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제안도 무척 반갑고 의욕을 불러일으키기는 했습니다. 조금 이상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마음이 어두워질 때 이웃나라의 작가들, 문화인들을 생각하곤 하거든요. 한국과 일본의 문화계는 오래도록 서로를 사랑해와서, 외교 분위기가 삼엄할 때에도 다정한 서신들을 교환하고는 합니다. - P7

여러 작가가 같은 키워드로 소설을 쓸 때, 그 키워드는 무엇이어야 할지도 즐거운 고민이었습니다. 어렵지 않게 ‘절연‘이라는단어에 가닿았습니다. 우리가 휩쓸려 살아가는 이 시대를 잘 압축해 표현할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격변하는 세계에서 시시각각 가치판단을 내려야 하는 개개인들은, 끝없이 서로헤어지고 있습니다. 어디까지가 건강한 갈등이고 어디부터가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의 시작인지 사람마다 안쪽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겠지요. 어떤 절연은 커다란 소리로 발화되고, 또 어떤 절연은 한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납니다. 짧게 발음되는 단어가 한 사람 한 사람을 통과해 어떻게 풍성해졌을지 궁금합니다. 아무쪼록절연에 대한 이야기들이 부식된 것은 끊어내고 더 강력한 연결점을 찾기 위한 자극이 되길 바랍니다. - P8

"딸애가 장래에 ‘무無‘가 되고 싶대서 난처하네요." - P13

빨간색과 흰색의 가느다란 관이 뜨개질한 것처럼 얽혀 있는 모습은 과연 우리 동네의 집이나 빌딩과는 전혀 달랐고, 『신비로운우리 몸이라는 그림책에서 본 혈관과 비슷했다.
그때부터 전신주나 전선을 보면 ‘여기 ‘감정‘이 흐르고 있구나‘
실감했고, 텔레비전이나 그림책에서 도쿄타워를 보면 무서워서도망쳤다. ‘무섭다‘는 이 기분도 도쿄타워에서 만들어내는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이제 무엇을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 P16

"내 말이 느닷없이 ‘무‘라니. 그나저나 미요, 나나코가 ‘무‘가되는 걸 용케 허락했다?"
"응? 아니 그러게 사는 차원이 서로 다르니까. 세대가 다르다는 건 세계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다른 거잖아?", - P25

아이 키우는 데도 유행이 있다. 아코는 딸과 ‘끈끈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관계‘를 한결같이 유지한다. 우리한테 유행하는 아이와의 관계가 아이 세계에서 유행하는 라이프스타일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 P27

럽기는 해도 성욕 처리가 가능하며, 가만히 두면 집안일을 해주는피와 살을 지닌 도구였다. 딸은 나를 이용해 성욕을 처리하는 일은 없지만, 아무리 성장해도 당연하다는 얼굴로 나를 계속 부려먹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미래에는 딸이 우리의 도구가 된다. 그것만이 마음의 버팀목이었다.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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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작가의 삶 같은 건 코딱지만큼도 부럽지 않다고 복희는생각한다. 딸을 보며 하는 생각이다. 글쓰는 것도 싫고 유명한것도 싫기 때문이다. - P183

유명 작가의 삶 같은 건 코딱지만큼도 부럽지 않지만 복희는실감한다. 글쓰기의 세계가 얼마나 영롱한지를 오랫동안 그 곁에서 고구마 마탕이나 해주고 싶다고 복희는 생각한다. - P191

"네가 너무 아름다운 걸 써서 그래."
유명 작가의 삶 같은 건 코딱지만큼도 부럽지 않지만 복희는실감한다. 글쓰기의 세계가 얼마나 영롱한지를 오랫동안 그 곁에서 고구마 마탕이나 해주고 싶다고 복희는 생각한다. - P191

"복희씨 아니세요?"
"아니에요······ - P199

한편 남희는 담임선생님과 애매하게 정이 든 초등학생처럼어색한 포즈로 사람을 대한다. 웅이가 싫지는 않지만 그렇다고좋아 죽겠는 건 아니다. 그래도 가끔씩 웅이에게 무언가를 바란다. 이를테면 참치 같은 것 말이다. 그럴 때 숙희와 달리 남희는어눌하게 소리낸다. 영어에 서툰 자가 영어로 말하듯이. 자기로선 아는 어휘가 별로 없다는 듯이. 물론 남희가 어휘를 늘려야할 필요는 전혀 없다. 웅이가 남희의 언어를 배워야 할 뿐. 남희는 암컷 같지도 수컷 같지도 않다. 남희를 통해 웅이는 젠더 뉴트럴의 한 예시를 본다. - P203

남희가 더욱더 사나운 소리로 북어를 달라며 울고, 복희가 커피는 잊은 거냐며 재촉하고, 슬아는 초췌한 얼굴로 목말라 죽을 것같다고 신음한다.
웅이는 다시 서둘러 부엌으로 간다. 항문에 힘을 주고 간다.
이 집에서 가부장제는 알게 모르게 붕괴되고 있다. - P206

"브라자는 또 왜 해?"
"안 하면 가슴이 티 나잖아."
"해도 티 나거든? 어차피 티날 건데 굳이 왜 해? 그리고 가슴이 있으면 티 나는 게 당연하지 왜 가려?"
"안 하면 사람들 다 쳐다보거든?"
"그러든지 말든지. 만약 너무 쳐다보면 그 사람 잘못이거든?
그런 사람 피하려고 브라자를 하냐? 이렇게 불편한데?"
"넌 작아서 상관없겠지만 나는 안 하면 가슴이 너무 커 보이거든?"
"아니거든? 오히려 더 강조되거든?"
복희는 소리친다. "상관 말라고."
슬아가 마지막으로 알린다. "일 분 남았어." - P214

이런 상상을 해보기로 한다. 하루 두 편씩 글을 쓰는데 딱 세사람에게만 보여줄 수 있다면 어떨까. 세 명의 독자가 식탁에 모
"여앉아 글을 읽는다. 피식거릴 수도 눈가가 촉촉해질 수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수도 있다. 읽기가 끝나면 독자는 식탁을 떠난다. 글쓴이는 혼자 남아 글을 치운다. 식탁 위에 놓였던 문장이언제까지 기억될까? 곧이어 다음 글이 차려져야 하고, 그런 노동이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반복된다면 말이다. - P228

그러는 사이 복희는 집중해서 책을 마저 읽는다. 소설은 복희의 눈코입을 통과하며 거의 정확하게 이해받고 있다. 바로 이 사람을 독자로 만나기 위해 몇백 년을 살아남았다는 듯이, 소설은복희의 손 아래에서 영광을 누린다. - P234

"선생님은 먼저 선先에 날 생生이 합쳐진 말이잖아요. 먼저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제가 좋아하는 작가가 이런 말을 했어요. ‘내가 살아보지 못한 어떤 삶을 먼저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모두 선생님이 될 수 있다고요." " - P263

"근데 이런 걸 왜 나한테 물어보냐?"
그럼 전화기 너머에서 미란이가 대답한다.
"저는 애비가 없잖아요." -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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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명한 뒤로 나무는 점쟁이나 독심술사처럼 용해졌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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