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 바르트는 사랑에 대해 말하면서 아토포스atopos라는단어를 사용했다. 장소를 뜻하는 topos에 부정을 뜻하는 a가결합하여 만들어진 단어다. - P176
존재는 인식에 우선한다. 우리의 앎과 모름에 따라 어떤존재가 있거나 없는 것은 아니다. 누구, 혹은 무엇의 있고 없음은 우리의 앎, 혹은 모름에 좌우되지 않는다. 있는 것은 우리의 앎과 상관없이 있고, 없는 것은 우리의 모름과 상관없이없다. - P179
물리적 접촉이 만남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 물리적 공간의점유가 친밀의 척도가 되지 못한다. 같은 공간에 있는 이 두사람이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 P181
집단은 ‘개별성을 삼키는 육체의 집합체‘이다. (알랭 핑켈크로트, 『사랑의 지혜』) 맹신은 믿음의 최상급이 아니라 믿음의 반대말이다. - P184
모든 새로운 이야기는 이미 있는 이야기에 대한 이의 제기이다. 이야기는 부모 없이 태어나지 않는다. 부모가 너무 많을지는 몰라도 아예 없지는 않다. 이미 있던 이야기의 속편이나덧붙임, 혹은 변주 아닌 이야기가 없다. 이야기 앞에 이야기가있었다. 이야기 뒤에도 이야기가 있다. - P190
왕/독자에게 보장되지 않은 것은 이야기꾼/작가의 이야기를 바꾸거나 바꾸라고 요구하는 것이고, 이야기꾼/작가에게 보장되지 않은 것은 왕/독자의 변덕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 P195
사실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 사실은, 자기들의 확신을 보장해주고 강화시켜줄 수 있을 때만 중요하다. 이미 가지고 있는확신을 보장해주고 강화시켜줄 수 있는 사실만을 수용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배제한다. 혹은 자기 확신을 보장해주고 강화시켜줄 수 있는 방향으로 수정하여, 왜곡하여 받아들인다. - P200
확신하는 사람은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다. 확신이 만들어제공한 ‘사실‘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구태여 다른 ‘사실‘을 찾을 이유가 없고, 그러니 의심할 리 없다. 확신하는 사람은 반성하지 않는 사람이다. - P203
역주행 운전자의 그처럼 투철한 확신이 면허 취소 수준의음주에서 비롯했다는 건 꽤 의미심장하다. 그는 만취했고, 분별력을 잃었고, 혹시 자기가 잘못 가고 있는지 돌아볼 (의심해볼) 여유를 빼앗겼고, 오직 맹목의 확신에 사로잡혔다. 자기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그렇다. 만취한 사람과 같다. 제어 불능의 이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정상이 아닌데 다반사가 되었다. - P205
종교는 자기 확신과 아무 관계가 없다. 오히려 종교는 자기확신의 부재, 자기를 의심하고 자기를 믿지 못하는 자의 믿음이다. "신앙은 의심을 제거함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을 자기 안에 있는 하나의 요소로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정복하는 용기다." (폴 틸리히) 이념은 반대다. 이념은 의심하지 않는, 의심을용납하지 않는, 의심이 끼어들 틈이 없는,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투철한, 무분별한 믿음의 체계이다. 이념은 투철한 확신을가진 광신자들을 만들어내고, 그런 광신자들에 의해 막강해진다. - P206
책의 은밀하고 안온한 어둠을 그때 알았다. - P211
피했는데 만나거나, 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한 셈이 되거나, 이쪽을 향해 걸었는데 저쪽에 이르는 것과 같은 일. 유해하지 않은 부작용도 있는 것이다. - P211
말하자면 어둠 속에 오래 가만히 있으면 생기는 눈과 같다. 어둠과의 깊은 포옹으로 만들어진 이 눈은 빛의 자극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과의 교감을 통해 사물을 인식한다. 그 눈으로 세상을 마주할 만해지면 아주 천천히 밖으로 나올수 있다. 조심스럽게, 살 수 있다. - P211
인간은 악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비범함에 이끌린다. 악을 행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악의 어떤 속성인 비범함을 소유하기를, 소유하고 있다고 내세우기를, 그렇게 보이기를 원한다. 모든 유혹의 핵심에 이 욕망이 깃들어 있거니와 특히 이런 유혹에 취약한 시기가 있다. 에밀 싱클레어의 시간이다. - P216
르네 지라르의 모방이론으로 창세기의 이 텍스트를 해석하는 자리에서 장미셸 우구를리앙은 신의 소유(‘나무의 열매를먹지 말라)가 아니라 신의 존재(‘신처럼 될 것이다‘)에 대한 모방으로 넘어가도록 하와의 심리 변화를 이끌어낸 뱀의 계략이성공한 거라고 설명한다. (『욕망의 탄생』) 신의 소유를 욕심낸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에 흔들린 것이다. 인간은 신처럼 되고싶어졌다. 비범함에 대한 유혹이 저 근원의 시간, 최초의 인간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 P220
나는 나의 내면으로부터 뿜어져나오려고 하는 것, 바로그것을 실현하며 살고 싶었을 뿐이다. (......)모든 인간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길이다. - P222
비범함에 유혹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비범한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외부의 자극에 대한 모방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길을 찾는 탐구여야 한다. 인간의 본성, 즉 알 속에 안주하려는나태를 뒤집어야 한다. 비범함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비범함이 필요하다. - P225
낯설고 다르고 무한한 존재, 우리 내부에 있는 이 타자와 마주하는 것이 자신에게 도달하는 길이다. - P228
시인은 영감의 사람이고, 소설가는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풀어도 될 것이다. 일하듯 쓰는 사람이 소설가라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아니,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이 소설가이다. 사르트르는 시인을 언어에 봉사하는 사람으로, 소설가를 언어를 이용하는 사람으로 구분했다. 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물을 때 문제삼은 ‘문학‘은 소설(산문)이지 시가 아니었다. 시는 문학이 아니라 예술이기 때문이다. 소설가는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여 일하는 자이다. - P234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렇다. 늦게까지 그만두지 못한 사람은 아직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다시, 더 해서 벌충하고 만회해야 하므로 다시, 더 하지 않을 수 없다. 벌충하려는 마음이 다시, 더 하게 한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렇다. 부족은 메꾸기가 쉽지 않고, 그러므로 메꾸려는 시도가 거듭된다. 그렇게 하여 그는 꾸준한 사람이 된다. 꾸준함의 비밀은 한 일에 대한 불만족이다. 꾸준함은 성향이 아니라 만회하려는 의지에서 비롯한행위의 반복이다. 성향이라면, 행위의 반복에 의해 사후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 P236
원한을 가진 사람은, 불만족의 원인이 자기가 아니라 외부에 있다고 생각하므로 만회하려고 하지 않는다. 불만족의 원인이 자기에게 있을 때만 만회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 P239
원한과 자기만족은 손바닥의 안과 밖처럼 붙어 있다. 붙어있되 정반대 쪽에 있다. 세상으로부터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고 생각할 때 생기는 것이 원한이라면, 세상으로부터 받는과도한 평가가 당연하다고 생각할 때 생기는 것이 자기만족이다. 원한은 밖을 향하고 자기만족은 안을 향한다. 불만족의 원인을 밖에서 찾을 때 원한이 생기고, 족함의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을 때 자기만족에 빠진다. - P242
보상은 대부분 뜻밖의 사건이다. 뜻 안에 있을 때 보상은, 아무리 큰 보상이라도 마땅하거나 미흡하다. 뜻 밖에 있을 때보상은, 아무리 작은 보상이라도 과분하거나 놀랍다. - P247
언제까지 걸을 거라고 미리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을까. 걸을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걸을 수 없는 순간이 올 때까지걸으면 된다. 언제까지 쓸 거라고 미리 결심할 필요가 있을까. 글을 쓸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쓰면 된다.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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