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메렌츠는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나타났다. 안심이 되어 상상도할 수 없는 소리를 내는 비올라를 산책시키고는 내 방문을 두드렸무언가 나와 이야기할 것이 있다고, 남편이 그 이야기의 증인이될 필요는 없으니 자기 집으로 갈 것을 청했다. - P84

에메렌츠는 고맙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이에 대해 언급하긴했는데, 이럴 때는 좋지도 싫지도 않다는 제스처를 잊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무엇을 숨기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가족 없이 혼자 산다는 것을 손님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으며, 왜 문을 열지 않는지 그리고 왜이렇게 어렵게 사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싶지도 않다고 대답했다. - P88

. "나는 아프지 않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고, 내 방식대로 그렇게 살고 있어요.
의사들과는 말도 섞지 않는다는 건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의사가이래라 저래라 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 그냥 놔두세요. 당신은 내가 무언가를 청하면 주기는 하지요. 하지만 미주알고주알 말고 그랬으면 싶네요. 그렇지 않으면 줘도 쓸모가 없어요." - P89

‘아니야, 이건 도가 지나쳤어‘, 나는 그녀가 자신의 발작에 어울리는 다른 관객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 있던 나는 몸을 돌려 어머니의 방에서 그 쓰레기들을 다 치워달라고, 너무 심한 바람이 아니라면, 따라갈 수 없는 그녀의 개인적인 삶의 사건에 대한 조연으로 우리를 선택하지 말아달라고, 무대로서 우리 가정을 택하지말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녀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차분하지만강하게 이야기했다. 그녀는 이해했다. - P93

다시 남편 옆으로 몸을 뉘었을 때 그는 여전히 꿈결 속이었다. 오늘, 평소와는 다르게 동요된 비올라를 어렵사리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이후 비올라는 어머니의 방도 아닌 욕실 문턱에서 잠이 들었는데, 남자처럼 코를 골았다. 마침내 평온해진 것을 들은 셈이었다. - P104

부질없었으나, 에메렌츠는 자신의마음이 끌리는 바에 따라 스스로를 표현했을 뿐이라고, 애써 남편에게 설명했다. 남편이 보고 있는 모든 것은 그녀가 사랑을 느끼게해주려고 한 것이니 그렇게 생각해보라고, 에메렌츠는 극단의 감정을 이렇게 이상하게 보여주는 것일 뿐, 단지 자신이 선택한 것들을스스로의 렌즈에 맞춘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저런 주제들로건너뛰지 말고, 나중에 내가 모든 것을 정리할 테니 제발 듣기에도공포스러운 소리는 말아달라고 청했다. - P109

"많은 사냥감들이 내던져진 걸 보았지요?" 그녀는 물었다. "다른사람들에게 남겨진 게 없을 정도로 모두 가져왔어요. 기쁘지요?" - P113

파랗게 번쩍이는 그녀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 시선에는 흥미,
호감, 관심 대신 맨살의 증오가 먼저 보였다.
"폐품이라니 무슨 말이죠?" 그녀가 물었다. "무슨 뜻인가요? 설명해주세요." - P115

"왜냐면 당신은 장님에다 바보이고 비겁하기까지 해요. 그 때문이에요." 그녀는 하나하나 열거했다. "내가 당신의 어떤 점을 좋아하는지 신만은 그것을 알고 계시지만, 그와는 별개로 당신은 그럴만하지 않군요. 아마 나중에 나이가 들면 당신 자신의 취향도, 용기도 생길 날이 있을 거예요.‘ - P117

애정은 온화하고 규정된 틀에 맞게, 또한 분명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누구를 대신해서도 그 애정의 형태를 내가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 P118

"박사님, 코모의 취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그는 남편을쳐다보았다. "저는 이미 알고 계신 줄 알고 있었어요. 문제는, 고모가 어른에게는 절대 무엇인가를 가져다주지 않기에, 두 분께 줄 선•물을 찾을 때는 항상 두 명의 아이들에게 주려는 것들을 선택했다는 거예요" - P121

우리가 그녀 헌법의 어떤 엄격한 법 조항을 어겼기에, 귀에 상처가난한낱 강아지 모형을 거두지 않았다고 그녀는 이렇게 벌을 주는 것일까? - P123

통찰력 있는 모든 이는 그녀에 대한 나의 지속적이며 한결같은상냥함이 단지 친한 척만 하는 감정을 넘어선 것이라고 벌써 오래전에 눈치 챘을 것이다. 실제로 이 세상에서 이 정도로 나와 관련을맺고 있는 사람은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이후 내가 가까이 허락한 사람은 에메렌츠가 유일했는데, 귀에 상처가 난 강아지 조각 때문에 그녀를 잃은 지금에서야 이 생각이 들었다. - P124

에메렌츠는 우리 앞에서 사라졌으나, 마치 대서사시의 등장인물처럼 우리 주변의 세상을 마비시켰고 묽은 대기 속으로 흩어졌다.
그녀는 우리의 일과를 알기에 우리가 언제 거리에 있을지 또는 있을 수 있는지를 짐작하여, 가능하다면 서로 만나지 않도록 시간을조정했다. 그녀와 조우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 P127

"그래요." 나는 대답했다.
"어디에 둘 건가요?"
"당신이 원하는 곳에요."
"주인님이 계시는 곳도 괜찮은가요?"
"당신이 원하는 곳이라고 얘기했어요."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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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대진의 집으로 향하는 버스는 막히지도 않고 늘제시간에 맞춰 목적지에 도착했다. - P191

시골도 별수없네. 그렇게 생각하며 무인 매표기 앞에 한가득 짐을 내려놓는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도와드려야 한다는생각에 그 근처를 서성였다. 하지만 할머니는 멸치 똥을 따듯이, 민첩한 속도로 행선지를 클릭하고 IC 카드를 정확한 방향으로 투입하여 결제했다. 해나는 무안해져 얼른 터미널을 나섰고 무더운 날씨에 계절을 헤아리다 아직 유월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 P192

세상이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자신의 삶을 독려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P195

여기에 쓰인 모든 소설은 제가 쓴 것이지만 온전히 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야기를 구상하고 써내려간 것은 저이지만, 소설은 제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해버렸습니다. 하지만 도달한 그 지점이 최선의 지점이라는 말 또한아닙니다. 저는 종종 상상하곤 합니다. - P359

당시 해나는 돈 나올 구멍을 찾느라 포털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온갖 공모전에 지원하고 있었다. 그러다 국토교통부에서주최하는 ‘생태도시 이름 공모‘를 보게 된 것이었다. 해나의아이디어가 채택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그로부터 한 달뒤였다. 부재중 전화 및 통과 주최측의 축하 메시지가 와 있었다. 해나는 홈페이지에 들어가 몇 번이고 상금을 확인한 뒤 이마를 짚고 중얼거렸다. 미쳤다.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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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너네 고모는? 소박맞았잖아." - P155

수를 만난 곳은 동대문역 근처에 있는 중식당이었다. - P156

"그게 왜 떠보는 거야."
"떠보려는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완전히아니라고 할 수 있어?" - P157

나는 소주와 맥주를 일대일 비율로 섞는 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 황금비율은 내가 알려줬다. 소주잔 기준으로 소주한 잔, 맥주 한 잔을 따라 섞으면 기가 막히게 양주 맛이 났다.
무슨 양주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적당히 독하고 적당히 단맛이 나는 양주 맛. 그러니까, 소맥은 소주의 맛과 맥주의 맛을적당히 조합해 균형을 맞추는 게 중요했다. 뭐든지 적당히 웃기는 말이지만 어디에도 들어맞는 말. - P158

그리고 아까워서 어떡해, 예쁜 무릎, 아까워,
하며 심지어 털까지 난 내 무릎을 너무도 소중하게 여겨주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 고모의 금융 관련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 P159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영성체를 받을 수 없어. 나는 순정의 단호한 목소리에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순정은 그런 구석이 있었다. 어린이를 꼼짝 못하게 할 수 있는 절제된 위압감 - P161

"야, 단데기도 단단해지느라 바빠."
"네가 단데기를 어떻게 알고."
"몰라도 알겠다." - P165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말 수가 나서서 그 둘을 깨웠다면나는 짜증을 부렸을 확률이 높다. 수가 늘 그런 식으로 자기삶을 정당화하려 든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삶은 기괴한 얼굴을 하고 있다. 나는 그 기괴한 얼굴을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는 도무지 그 기괴한 얼굴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 P167

"응. 그래서 어둠 속에서 촛불을 켠 채로 그 노래를 한 곡다 부르면, 실제 그 노래의 주인공이 거울에 등장한대." - P172

......단 한 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끝난 뒤엔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 - P172

"성혜 어릴 때는 어땠어요?"
고모는 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걔는 지 엄마만 끔찍이 아껴." - P175

나는 울기 시작했다. 순정은 그런 질문을 나른한 목소리로끊임없이 해댔고 내가 울면 그제야 질문을 멈추었다. 그다음팔로 내 얼굴을 감싸며 속삭였다. 그러니까 고모가 만약 아프면. 아프면? 꼭 보살펴줘.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우리는 잠에 빠져들 준비를 했다. - P177

그로부터 이십 년이 지난 후 나는 순정만큼은 아니지만, 소량의 항우울제를 처방받아 먹고 있다. 중소기업의 적은 월급에 비해 나가는 돈이 너무 많고 삶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내 집은 없는데 남의 집이 너무 비싸서, 손 안 대고 돈버는 사람들이 있어서, 애인이 미워서, 다양한 방식으로 마음이 헐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식탁 앞에서 짐짓 심각한 얼굴로말했다. 정신병도 유전이야. 유전. - P179

"싫은데 왜 만나?"
"싫은 게 아니야."
"귀찮았잖아. 괜찮아. 나도 귀찮았어, 평생."
"외로워하시는 것 같아서 그랬어."
"네가 평생 그 외로움을 책임질 수는 없잖아."
"평생 외로움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만 그 사람을 보살필수 있니?" - P181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은 고모나 엄마가 그저 나에게 끔찍한사랑을 흠뻑 물려주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아직도 그사랑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 사랑과 결함이 나를 어떻게 구성했는지도. - P183

"한동안은 문제가 없었는데. 언젠가부터 간헐적으로 가로막힌 곳에 돌진을 하는 거야. 나도 처음엔 정말 놀랐어. 자길가로막는 걸 모조리 다 부수겠다는 기세로 몇 번이나 그렇게갖다 박더라." - P185

고모는 자주 물건을 부수기도 했고 아버지를 때리기도 했다. 그런 것들을 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암이 재발하고 나서 고모는 빠르게 힘을 잃어갔다. 비쩍 말랐고 입냄새가심하게 났다. 병원에 입원한 후로는 오롯이 누워만 있었다. 모든 힘을 소진한 사람처럼. 임종을 앞두고 고모는 숨 쉬는 것조차 힘에 부치는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아버지도 나도 아닌 엄마를 아주 오랫동안,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간신히 신음처럼 말을 뱉었다. 민애야. 그런 다음 눈을 감았다. 우리 중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다만 나는 그 순간 우리가족이 가진 축축하고 퀴퀴한 기억들이 전부 엉켜버렸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저도요.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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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들은 이미 조금 방어적으로 되었다. - P74

나는 그녀가 책임을 회피한다고 느꼈고, 그녀에게 비올라가 필요하지 않다면 왜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했는지 진정으로 화가 났다. - P77

에메렌츠의 작은 복수들은 심술궂고 유독했다. - P79

비올라는 소리가 나는 그 틈새에 웅크리고 앉아 크게 숨을 쉬기 시작했다. 비올라는 어디로 들어가고자 할 때 독특한 징후를 보였는데, 그것은 인간의 신음소리 또는 깊고 안절부절 못하는 숨소리와도 닮아 있었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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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곳에서 오래 살아가는 사람. 태어나 살아가는 동안의자취를 잃지 않은 사람. 그런 사람들을 볼 때 나의 마음은부러움이랄지 자괴감이랄지. 나는 여러 장소를 거쳐왔고,
그것은 장소를 여는 것과 같다고 쓴 적 있다. - P116

그 말에 나는 다 들통난 기분. 그래, 나는 나를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긋지긋한 사람들을 통틀어 제일 지긋지긋한사람은 바로 나인 것이다. 먼 데서 유토피아를 찾는 것이다.
아무리 멀리멀리 가도 나를 벗어날 수는 없는데. 나의 유토피아는 나의 폐허에 있는데. - P118

호수 이름에는 관사가 붙지 않는다 - P120

"늙은 사람이 사랑을 잊으려고 하면 한차례 비가 내리는구나." - P130

조용한 당신이 담길 것을 떠올리면서 - P133

시절 인연처럼 계절이 열렸고, 이제 닫히려 한다. 나는문밖으로 드르륵 나가야 한다. 더 쓸쓸한 세계로 들어가야한다. - P142

그러나 여름아, 여름의 모든 인연아, 너는 여기에서 멈추어라.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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