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나는 기억한다. - P99

겨울이 되었다. 아침이면 우리는 화로의 재를 양동이에 담아 집 앞 들판 가장자리에 버렸다. - P49

나는 겨울 정원의 풍경을 안다. 전염병의 첫해에 우리는 처음으로 오두막에서 함께 겨울의 대부분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여기서 겨울을 지낸다는 것은 내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추위도 추위지만 물이 얼어버리면 그 순간부터이듬해 봄까지 펌프가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잠들지 못한다. 만약 태풍에 나무가 통째로 지붕위로 쓰러진다면 오두막은 곧장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놀라워라, 물방울이 진주알처럼 매달린 테라스의 거미줄 사이로 무지갯빛 영롱한 햇살이 비친다. 물기 가득 머금은 초록은 더더욱 짙고 정원은 살아 꿈틀거리는 것들로 넘친다. 정원의 호흡이 느껴진다. 풀들은 밤사이 몰라보게 무성해졌으며 나무들은 사방에 부러진 가지들을 가득 떨구어놓았다.
빛과 이끼가 그 위로 덮인다. - P43

집 앞 풀밭의 풀들이 크게 자랐다. 연두색 풀줄기 위로 황금색과 자주색, 보라색 알갱이가 영글고 있었다. 바람에 풀밭이 일렁이는 풍경은 경작지의 밀밭이 일렁이는 풍경과는 좀다르다. - P79

읽고 있던 클로드 시몽을 잠시 밀어두고 FM을 읽기 시작했다. 읽고 있던 FM을 잠시 밀어두고 뒤라스를 읽기 시작했다.
읽고 있던 뒤라스를 잠시 밀어두고 프랑시스 퐁주를 읽기 시작했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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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가릴수록 더욱더 얼굴을 말하고 싶었다. 반갑고 애처로운 얼굴들에 대해. 거기엔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방대한 정보가 담겨 있다. 얼굴을 가진 우리는 가속화될 기후위기 앞에서 모두 운명공동체다. 날씨의 지배를 받는 지구 생명체 중 특히 유심히 바라본 얼굴들을 이 책에 초대하려 한다. 인간뿐 아니라 비인간 동물의 얼굴 또한 마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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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어린 아이일 때,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 질문받았던 경험을 기억하는가? 그때 어떤 기분이었는가? 내가 대여섯 살이었을 때를 떠올려보면,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또렷이 기억난다. 내 대답을 들은 어른들은 만족하고 뿌듯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에게 정체성을 선언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세상이 인정해주니 말이다(음, 적어도 내 작은 세상에서는). - P22

"나는 해양생물학자와 섬유 예술가와 기자가 될 거야"와 같은 대답을 듣고 관용을 베풀기가 어려워진다. 구별하기 어렵긴 하지만, 우리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라는 질문을
‘이 생애에서 너에게 허용된 정체성은 하나뿐이야. 자, 어떤것을 선택할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얼마나 겁나는 질문인가? 이런 식의 질문이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당연하다. - P24

분야를 옮길 때마다 겪는 죄책감과 부끄러움• 계속해서 초보자가 되는 불편함• 사기꾼 증후군(Imposter syndrome, 성공한 사람이자신의 성공이 운 덕분이었다고 생각하면서 언젠가자신의 무능함이 알려질 것을 불안해하는 심리 상태옮긴이)• 주변의 비평가들• ‘그래서 네가 하는 일이 뭐야?‘의 무서움 - P38

세계 최고와 완전히 평범한 것 사이에는 중간 영역이 있다. 비록 우리 다능인들은 흥미가 그리 오래가지 않더라도몇몇 분야에서는 대단히 능숙해질 수 있다. 심지어 종종 해당 분야에 전문가가 될 수도 있다! "재주가 많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전문가라는 의미다 Jack-of-many-trades, master ofsome"라는 말은 다능인들을 묘사하는, 간결하진 않지만 정확한 표현이다. 이는 특정 분야에서 필요한 정도로 유능하며 창의력과 열정을 결합한 기술로 뛰어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뜻이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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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은 죽은 사람이 남기는 것 아닌가요?"
전화기 너머에서 그가 대답했다.
"그렇죠." - P77

물론이고, 당시에도 나는 그녀의 그런 말들이 나를 어떻게 그토록 감동시켰는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왜 더욱 열렬히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대단한사람으로 여겼던 것이 아니면 적어도 그렇게 여기고 있다고 내가믿게 만들어주었던 것이, 내가 정말로 그러해서가 아니라 오로지나에 대한 그녀의 애정으로 인한 왜곡된 시선 혹은 배려였을 뿐이라고 하더라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그 시기에 그 말이 필요했고, 그녀가 그 말을 제공해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 P59

"미안해."
그는 그 말을 하러 나왔다고 했다.
"뭐가요?"
"모르겠어. 어쨌든다."
"그동안 뭐하고 지냈어요?"
"아무것도 안 했어." - P39

"엉망이야."
나는 그 뜬금없는 말에 뭐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후 다시 말했다.
"망한 것 같아."
그녀는 잠시 후에 또 같은 말을 중얼거렸지만 나는 그녀에게 그말이 무슨 뜻이냐고 묻지 않았다. - P145

"매일은 아냐. 다른 이야기를 할 때도 있어."
"어떤 다른 이야기?" - P165

말하고 보니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는데, 우리가 단지 스커때문에 여기 붙들려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 P172

"네 엄마가 예전 같지 않아."
"엄마 말로는 아버지가 요즘 이상하다던데요?"
아버지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다시 한동안 소주잔만 비웠다. - P202

의미 없는 일이다. 이럴 땐 가르치는 자의 실패까지도 가르침이다. 성숙한 삶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배우면서 화자는 한 걸음 더 성숙해졌을 것이다.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처럼. 자신에게 미성숙함이라고는 조금도 없다고 믿는 사람만이 이 화자의 가을을 응원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 P220

‘더 인간적인 말‘이 될 수 있을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 소설 역시 이렇게 정리할 수밖에 없다. 가르치는 줄도 모르고 가르친 사람과 배우는 줄도 모르고 배운 사람이 있었다고, 그리고 이것은제가 아는 현실이 전부라고 생각한 어느 미숙한 연인이 한 인간의죽음을 통해 힘겹게 얻은 성숙의 기회라고 말이다.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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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인싸 맘들은 아이를 던지면서 찍는대요."
유정이 카메라 앱을 열며 말했다.
"던져보세요. 애를 던져보세요." - P250

유정은 그쪽으로 걸어가면서 선생님한테 한번 더 중계를 했다.
선생님, 내린천휴게소 푸드코트가 너무 좋아요. 스타필드 푸드코트보다 열 배쯤 좋아요. 테이블이랑 의자가 너무 새것이고요, 약간 공항 느낌도 나고요, 천장에서 뭐가 자꾸 반짝거려요. 그리고저분은 선생님과 나이가 비슷해 보여요. - P251

고기의 여러 부위를 그에 맞는 조리법으로 꾸준히 먹어야 한다는 시어머니의 믿음은 너무도 확고하고 오래된 전통 같은 것이어서강윤희 자신도 알게 모르게 길들여진 상태였다. - P107

애기한테 저는 뭐예요?"
어른들이 말했다.
"삼촌." - P94

나는 그 시간들을 기억한다. 뜨거운 왁스가 식기를 기다리며 마주앉아 있던 시간, 심지를 품은 액체가 그대로 굳어 초가 되길 기다리던 시간. - P67

내뿜는 치료실에 앉아서 강수영의 첫번째 상자 사진을 꺼내 본다.
어떤 날은 내 첫번째 상자 사진을 꺼내 보기도 한다. 그리고 어쩔없이 기다린다. 강수영이 내 앞에서 열한번째 상자를 만들어주기를 강수영이 다시 나를 만나러 와주기를. - P151

"윽. 유태야."
유정은 긴급하게 유태를 부르며 입을 틀어막았다.
"나니 차에 토해도 돼?" - P236

먼저 올라갑니다. 천천히 오세요. 지현‘
규옥은 인등 담당자가 올 때까진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은형도 기다렸다. 인등 담당자가 오기를 완연해진 아침해가경내를 반쯤 채웠을 무렵, 규옥은 기어코 명부전 벽면 한쪽에 어떤 여자아이의 등 하나를 밝혔다. - P303

"절을 하다보면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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