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뒤에는 내가 읽던 책이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하는채로 또다른 책을 들고, 어디에선가 벤치에 앉아 이 책을 읽게되리라는 기대로 설레며 산책을 나서기 때문이다. - P88
자신에게 한국은, 그 무엇보다도 인적 없는 공원의 벤치에 앉아 눈 속에서 게르하르트 마이어의 책을 읽었던 겨울날로 기억될 것이라고. - P91
나는 체념하고, 포기하고, 굴복하고, 인정하고, 마침내 울 것이다. 그리고 눈물과 함께 마지막 문장을 쓸 것이다. 아니, 눈물이 곧 마지막 문장이 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나는 잘 울지 않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마지막 문장은 영영 나타나지 않는다 - P94
하지의 저녁, 길고도 느린 구릿빛 그늘이 테라스의 장작더미 위에, 유리구슬에, 거울 조각에, 공작새의 양철 날개 위에한없이 오래 머문다. 그러다 묽은 어둠이 고이듯이 하지의 밤이 온다. 정원 나무들은 검은 그림자로 우뚝 서 있는데, 하늘에는 빛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 P94
우리의 기대는 참으로 나이브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가선택한 경로는 오직 숲을 관통하는 길이었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숲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카페는커녕 단 하나의 벤치도 없었으며, 이곳 건너편의 숲은 깊고 울창한데다 호수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아니라서 단 한 사람의 산책자도 만날 수 없었다. - P96
지금도 나는 기억한다. 오랫동안 음습한 숲속을 헤매던 우리의 눈앞 저멀리에서부터,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로 환한 빛이 쏟아지는 들판 한 귀퉁이가 나타나던 순간을 나는 사막에서 신기루를 발견한 사람처럼 그곳으로 걸어갔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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