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엄마가 스물셋, 이모가 마흔다섯이 되던 해에 태어났다. 나이 차이 때문에 우리 셋이 함께 다니면 사람들은 이모를 나의할머니로 여겼다. 그때는 그 나이에 할머니가 되는 사람들이 많기도 했지만, 이모는 자기 또래보다도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편이었다. - P215
나는 이모가 싫어했던 것들을 종이 한 장에 빽빽하게 쓸 수 있다. 춤추는 사람, 연예인들이 웃고 떠드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연인, 짧은 치마 길에서 노래 부르기, 껌으로 풍선 불기, 강아지를 자식처럼 예뻐하는 사람, 헤픈 웃음,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의 태도, 술에 취한 사람, 경박한 사람…..…… - P217
이모의 그런 양육태도에 큰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지금의 나는안다. 이모의 태도가 감정적 방임에 가까웠다는 것도. 하지만 나는 이모를 판단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런 판단은 너무 쉬우니까. 나는 그런 쉬운 방식으로 이모에 대해 말하고싶지 않다. - P217
그가 돌아가자 이모는 냅킨으로 입술을 닦고 지친 표정의 엄마에게 조용히 말했다.
"개가 짖었다고 생각해.‘ - P223
이모가 현관문을 열어주자마자 나는 이모의 품에 덥석 안겼다. 이모는 차마 나를 안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다가 마치 작은 북을 울리듯 두 손으로 내 등을 조금씩 두드렸다. 나는 이모를 더 꽉안았다. 그제야 이모도 내 등에 팔을 둘렀다. 아무것도 묻지 않은채로. 그러자 내 체온으로 데워진 뜨거운 물이 한쪽 귀에서 흘러나왔다. - P231
"오늘은 왜 들어갔어?" "널 자랑하고 싶었나보지." 이모는 그렇게 말하고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날 뭘 자랑해." - P238
나는 그렇게 답하고자리를 떴다. 나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멋대로 나를 판단했다고 분노하면서도 나는 그애의 말에 마음을 다쳤다. 그 말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 P247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해." "너 어릴 땐 네 마음 여린 게 그렇게 불안해서 고치려고 했어." "그럼 성공했네. 나, 마음이돌이 됐거든." 예보에 없던 눈이 내리기 시작해서 나는 와이퍼를 켜고 속도를줄였다. - P254
이모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아이처럼 웃다가도 싫어하는 사람들이 나오면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면서 노여워했다. - P258
그러자 이모는 천천히 내 곁으로 와서 손바닥으로 내 등을 두드렸다. 나는 울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세상에 단 한 명, 약한모습을 보이지 않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언제나 이모였으니까. 그건 내 자존심이자 이모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모는 고르게 숨을 내쉬면서 잠이 들었다. - P261
옛날 사람들은 하늘 위에 하늘나라가 있다고 생각했다. 밤하늘의 별빛들을 보고 하늘에 구멍을 뚫어 지상의 인간들을 바라보는저 너머 누군가의 눈빛이라고 믿기도 했다. 그들에게 별빛은 신의눈빛이거나 더는 만날 수 없는 사랑하는 존재들의 시선이었다. - P265
내가 아는 하늘은 그런 것이지만, 그런 순간에 나는 문득 옛날 사람들의 믿음을 떠올린다. 환한 낮이 아니라 어두운 밤에만지상에 닿는 저 너머의 눈빛이 있다는 믿음을 말이다. - P265
수화물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기남은 한참을 서 있었다. 인천에서 부친 두 개의 캐리어 중 하나가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한 시간이 지나자 수화물 벨트는 텅 비었고, 기남과 같은 비행기를 타고온 사람들도 모두 자리를 떴다. 기남은 안절부절못하고 그곳에 서있었다.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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