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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선비의 일생
이희승 / 창비 / 1996년 6월
평점 :
품절
한글날과 한강날을 겸해서 써본다. 어렵고 과학적이며 아름다운 한글!
(책이 검색으로 안 떠서 다른 것으로 했는데 사진으로 보이는 것이 내가 가진 것이다)
<일석 이희승 딸각발이 선비>는 1994년 신구문화사에서 나온 이희승 추모문집이다.
총 637쪽. 이 책은 오크통에서 잘 숙성된 묵직한 바디감, 겉표지의 구조미가 두툼한
동시에 강인하고 쌉싸름하면서, 톡 쏘는 탄닌감의 첨부된 사진들이 고급지고, 문장이 유려하고 성숙하면서 복합적인 맛이 난다.
몇 년 전, 구십 몇 된다는 부친의 책을 두 자제가 분리수거장에 끊임없이 가져와 버리길래 사연을 물어본즉슨, 책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이유가 자기 아버지는 이희승의 직계제자이며 교수가 직업이었고, 찾아보았으나 헌 책을 가져가는 곳이 없어, 이렇게 종이쓰레기로 배출하게 되었노라고.
시중에 헌 책이 순환되면 쓰레기장으로 가는 일은 없을 텐데, 찾는 서점도 사려는 서점도 없는 것이다. 씨알의 소리, 사상계, 별의별 게 다 있고, 아이고 내 가슴이 찢어지오, 하면서 자녀를 대신하여 내가 챙긴 것은, 그들 모친이 자필로 여러 가지 음식의 요리법을 적은 노트와 바로 이 책이다.
페이지를 벌려 드르륵 드르륵 털고, 드라이기로 뜨겁게 살균하고, 햇빛에 두어 또 살균하고, 읽지도 않으면서 무언가를 승계하는 느낌이랄까, 지켜주고픈 느낌이랄까, 그런 게 있었다. 언젠가 이렇게 되기 전에 미리미리 해결해 두어야한다는 걸 알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한 개의 돌이란 의미의 아호, 일석 이희승(1896-1989, 고양시에 무덤)은 주시경 선생의 <국어문법>을 보고 국어학에 뜻을 두었다.(22쪽)
참고로 주시경(한힌샘 1876-1914)은 언문, 반절, 가갸글로 불리던 훈민정음을 최초로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사용.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유명한 이희승은 우리 한글의 체계화에 큰 기여를 했다. 우리말 말살정책을 쓰던 살얼음판 같은 시절에 우리 국어의 맞춤법통일안, 외래어표기법통일안 등을 만들어 우리말사전을 편찬했다.(450쪽)
감옥에서 이극로, 최현배, 정인승, 정태진과 9회의 재판, 2년 6개월 징역을 받았다.
옥고를 치를 때 일석은 밥을 입에서 문자 그대로 36번 씹고 삼킨 모양이다. 옥고 4년에 소화병 한 번 앓지 않았다... 감방에서 아침을 먹고 나면 점심이 들어오고, 점심을 먹고 나면 저녁이 들어왔다.(12쪽)
오래 씹고 삼켰다는 의미.
13살에 14살 이웃마을 규수와 혼례, 20세부터 6년간 경성방직에 일하고, 정식으로
언어학계에 몸담은 것은 경성제대 30세 만학으로서 시작을 한 것이다(445-447쪽)
딸깍발이 선비라는 수필이 유명하고, 시인이 되고 싶진 않으나 시적 충동에 못 이겨
시와 시조를 쓰기도 했다.
그의 별명이기도 한 딸깍발이는, 남산골샌님처럼 가난했으되 비굴하지 않은 의기와
강직을 배우자고 말한다. 나무를 파서 만든 나막신이 바닥에 끌려, 딸깍 소리가 난다고 해 딸깍발이. 그 땐 그랬지. 요즘으로 치면 K-나무신, 힙한 천연재료 키높이 구두랄까, 지구를 지키는 무공해 친환경 신발 되겠다. 데헷!
서울 종로구 동숭동 자택 자리에 일석학술재단이 있는데, 5층에 기거했던 아들 이교웅(1925-2014)이 전한 일석의 말을 적어본다.
“선친께서 생전에 국립묘지 애국자묘역에 묻히는 것을 사양하셔 조촐히 가족장으로
모셨지요. 공것을 바라지 말며, 남에게 억울한 짓을 하지 말라. 아무리 걱정을 하여도 애당초부터 아무 효과도 없을 걱정은 하지 말라. 성실하라. 정직하라. 그리고 겸손하여라. 이런 가훈을 남겨 주셨지요.”
일석 이희승 전사를 학문을 떠나서 ‘인간 이 전사’로서 내가 50년 친교를 통해 느낀 바를 우선 여기에 그대로 털어 놓고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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