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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ㅣ 너머의 역사담론 1
오항녕 지음 / 너머북스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광해군. 우리 역사에서 가장 아픈 시절을 보낸 시기입니다.
선조의 학정과 붕당정치 그리고 임진왜란, 정유재란, 임금의 몽진을 넘어 명나라에 귀화하려는 조짐까지.
정말 우리나라 역사에서 지우고픈 수치의 시대입니다.
IMF 때 나라를 팔아먹은 김영삼처럼 선조는 조선이란 나라를 들어 명나라에 바치려 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백성들은 도성을 불태우고, 몽진 행렬에 돌을 던지고 욕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명나라로 귀화하려는 논의가 진행되자 왕의 일과를 기록하던 사관들은 사초를 불사르고 고향으로 도망을 칩니다.
목숨을 걸고 바다에서 싸우는 이순신과 나라를 지키려 일어난 의병장들을 역모로 징치하는 선조.
거의 미쳐 있는 인상을 풍기는 선조와 대비된 인물이 바로 광해군입니다.
왜란 당시 선조에게서 분조(정권을 나누어 다스림)를 받아 평양을 수비하고,
강동 6주를 돌며 병사를 모집하고 왜군에 점령된 강원도를 오가며 군사를 독려하던 광해군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선조에 실망한 백성과 후대의 인물들은 광해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광해의 친정은 우리의 기대를 철저히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성리학을 건국이념으로 삼은 조선에서 광해군은 왜 폐위되어야만 했을까?
광해군이 폐위된 이유는 대동법의 시행에 대한 의지 부족, 궁궐 등 토목공사로 인한 재정 및 민생의 파탄, 끊임없이 이어지는 옥사로 인한 정치 기반 약화, 형과 아우 및 인목대비에 대한 탄압 때문에 생긴 민심 이반 등이 주된 이유였다.
이런 상황에서 대외적으로는 외교는 기회주의적인 성격을 띠게 됐고 매관매직, 여알 정치는 덤으로 따라왔다.
한마디로, 백성을 위한 정치가 아닌 왕 자신을 안위와 기쁨을 위한 정치였던 것이다.
그렇다라도 성리학 사회인 조선에서 어떻게 왕을 폐지할 수 있었을까?
인조반정 이후 조선의 성리학은 주자학으로 대체된다.
그 사상적 기반은 명나라는 어버이 나라이기 때문에 절대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명나라가 금나라에 멸망한 이후에도 명나라를 이어받은 나라가 조선이라고 표명하며,
죽은 사람의 묘표에 뜬금없이 "有明朝鮮國" 이란 단어로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후 조선이란 나라는 '명나라의 번국이다'라고 정의하며 번국의 왕은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웁니다.
과연 조선의 사대부들의 사상이 올바르다고 볼 수 있을까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광해는 왜 이렇게 결과가 뻔히 보이는 파국의 길을 갔을까요?
그건 아마도 자신의 아버지인 선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왕인 자신보다 인기가 있는 이순신을 죽이고, 자기보다 앞서 대중을 이끄는 의병장들을 죽이고,
신진사대부들이 정여립을 위주로 모이자 역모로 처단하고 등등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시기하고 죽였던 왕이 바로 선조입니다.
그런 선조의 눈에 분조를 통해 국정을 장악하고 백성들을 통솔해 전쟁을 이끄는 광해는 죽여야 할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날선 왕의 눈길을 피하기 위한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암담한 현실이 아마도 무기력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정사는 아니지만 이런 추측을 통해 광해의 정신질환 또는 분열 증상이 그를 파국으로 몰고 가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조선의 아픈 과거를 돌아보며 다시는 이런 일들이 되풀이되지 말아야 하는데 하는 걱정이 앞서지만,
'명' 나라를 '미'로 대체한 현실이 암담하기만 합니다.
우리의 독립은 과연 언제쯤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