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14 - 박경리 대하소설, 4부 2권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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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거 리

자살하려고 했다가 살려진 명희는 당분간 여옥이와 함께 지낸다. 그러다가 명희는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고 여옥이를 떠난다. 윤국이는 어떤 마음인지 빨래터에 자주 가 숙이를 보며 마음의 안정을 찾곤 한다. 길상이 출옥하게 될 날이 다가오자 구마가이 젠타가 서희 집으로 찾아와 기웃거린다. 복연이는 붙어사는 언니 순연(귀남네) 가족을 보고 보란 듯이 성환할매편을 든다. 중간에서 성환할매는 난처하지만, 속도 없이 친정엄마에게 붙어사는 언니에게 한소리 시원하게 해 붙이는 동생 복연이다. 오서방은 우 서방을 의도찮게 살해하게 되고 옥살이를 하는데, 오서방네도 이에 방황하기도 한다. 인실과 조용하는 대면할 계기가 생겼다. 인실이 방직 감독에게 추행당하는 걸 뿌리치던 여학생의 팔이 부러진 걸 보고 기예 학교 선생으로 항의 편지를 썼기 때문이다. 조용하가 인실에게 묘하게 관심을 갖게 된다. 인실과 오가타는 주변의 만류와 내적인 갈등에 부담을 가지면서도 끌리는 정으로 만난다. 관수가 독립운동한다고 자신의 많은 시기를 보내고 허탈해 할 때 한복이 옆에서 힘을 북돋워준다. 관수는 자신의 딸 영선을 데리고 해도사집을 지나 강쇠네 집으로 가고, 강쇠 아들의 처로 삼아주길 부탁하며 맡긴다. 강쇠또한 흔쾌히 받아들이며 혼인준비를 한다. 인실과 찬하, 오가타는 명희를 찾으러 진주로 내려간다. 명희는 매몰차게 그들을 거부하고, 여기에 더 할 게 없어진 찬하는 오가타와 인실을 두고 먼저 떠난다.


읽으면서...

비록 백정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지만, 독립운동에 주축이 되며 강직하게만 보이던 관수. 그의 집안 사정과 위기 때마다 긴장하며 대피하던 삶을 깊이 들여다본다. 자신이 쫓던 가치에 모든 것을 걸었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건 남의 집 딸과 가출한 아들과 힘들어하는 가족들, 그리고 독립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조국뿐이다. 여기에 허탈해 하며 자신이 따라왔던 독립의 길에 다시 의문을 갖는다. 이에 한복이 관수에게 보이는 자세가 인상적이었다. 살인자의 아들로, 아비와 똑같은 삶을 사는 형을 둔 자로 죄인 된 삶을 살아온 한복의 삶을 수면 위로 끌어 올리며 애국자로의 삶을 다짐을 보이는 것이다.


"형님, 지는 말입니다. 지는요, 지는 말입니다. 후회 안 할 깁니다. 겁이사 나겄지마는요, 발 빼지는 않을 겁니다. 영호하고 약조를 했인꼐요. 살인 죄인으로 세상 끝내기 보담이야 애국자로 세상 끝내는 편이 안 낫겄십니까."


그간 독립운동을 하는 계층들과 동학 무리의 대화를 보며 답답한 마음이 있었는데, 오히려 관수의 이런 한스럽고 갑갑한 마음은 독립에 대한 진실된 속내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을 울렸다. 정말 관수의 관점과 상황이라면 아무 소망 없지 않은가? 그럼 어떻게 살아야 했을까? 아득하고 답답한 현실에서 해결책을 제시한 것은 아니지만, 인생의 의미 있는 삶을 제시하는 한복의 짧은 말은 그가 살았던 한스러웠던 인생이 어우러져 감동이 된다.


명희를 찾으러 간 길에 금광여관에서 나온 오가타와 인실의 대화 또한 인상적이다. 절대 하나가 될 수 없어 보이는 남녀... 오가타와 인실은 두 남녀이기 전에 현실을 따라 한 나라를 빼앗은 나라와 빼앗긴 나라의 백성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다. 오가타는 그래도 일본이었기에 민족주의적인 데서 살짝 벗어나 사랑하는 마음을 더 좇았지만, 모든 것을 빼앗은 일본의 사람과는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갇힐 수밖에 없는 인실은 달랐다. 그런 간절함과 절실함 가운데 부르짖는 그녀의 한 마디가, 그녀가 붙잡으려는 의지를 드러내는 듯하다.


"일본은 절대 조선을 지배할 수 없다! 못 할 거다!"p.423


<토지>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이루어질 수 없는 애절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역시나 <토지>는 토지다!!! 계속 ~~ 쭈욱!!! 끝까지 가자!!



마음에 담은 문장


"양반이 될려고 양반집에 태어난 것도 아니며 상놈이 될려고 상놈집에 태어난 것도 아니며 양반, 상놈 씨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밥그릇 크고 작은 것으로 인하여 수세기에 걸쳐 횡포와 설움이 대립하여 싸워왔다면 마음이 비고 찬 것은 그 누구와 누구의 싸움이던고." p.47

"조밭을 매면서 이런 말을 하시지 않겠니? 일이란 억지로는 안 되지라. 하루아침에 성을 쌓지는 못허니께로 개미 뫼 문지듯이, 일이란 그렇기 혀야제잉. 세월이란 것도 개미 뫼 문지 듯 가는 거 아니더라고? 해서 할머니, 개미 뫼 문지듯 뫼 문진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물었지. 개미가 모래흙 하나하나 물어나르는 거 못 본 게라? 아아 개미가 집 만들려고 땅속에 굴 파는 것 말이지요? 그려, 하며 할머니는 웃더구먼." p.108


... 그건 인간의 본질의 문제지 질투하곤 별로 관련이 없어. 그러나 내가 그 절망의 늪에서 일어나서 세상 밖으로 기어나왔을 때 처음 느낀 것은 이방인이구나, 그거였다. 명희 너도 이제부터 그것을 뼈저리게 느껴야 할 게야. 시골에 가도 도시에 가도 교회당 안이나, 밖에서도 흐흐흐흣...... 여자들은 나를 침입자로, 결코 과장이라 생각지 말어. 농가에 들어서도 농가 아낙은 남자의 어느 한 부분, 눈빛 하나라도 도둑맞을까 봐 경계하고, 물론 내가 혼자 있는 여자라는 것을 전제해서 말이야. 아찔하고 눈이 멀어질 것 같은 충격을 헤일 수 없이 받았다. 해서 남자라면은 벽을 쌓고 또 벽을 쌓아놓구 여자들과 친해볼려구, 그야말로 쓸개 다 빼어놓구서 그럴수록 오히려 그게 약점이 되는 거야, 방자함이란.... 아니면 위세당당하게 동정이나 베풀고, 인간을 어떻게 포기해. 난 복음을 전하는 사람 아니니? 도시 인간이란 무엇이냐, 수없이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 주여, 나는 어찌해야만 하옵니까? ... p.120


... 넌 줄곧 온실에서만 살아왔으니까, 어느 정도 견디어낼지는...... 내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담을 쌓아도 제발 내 앞만 가리는 이기주의자만은 되지 말아라 그 말인데, 노처녀나 이혼녀나 과부나 편협하고 옹골차고 물기 없이 말라서 자기 둘레만 깨끗이 하고 자기 식량만 챙기는 그런 습성은 밖에서 오는 핍박 때문에 형성된 것이지만 그것을 이겨야 해. 더한 정신적 고통을 받겠지만 우리도 살아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거야. 명희야, 우리 물기 빠진 나무는 되지 말자." p.122


"그런 감정까지 싫어할 권리는 없어. 아무튼 내가 전도를 하면서 가장 수월하게 대할 수 있었던 사람은 뱃사람들이었다. 예수꼐서 처음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와 시몬의 형제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셨는데 그들이 어부였다는 것은 상당히 암시적인 일이 아니었나 하고 난 가끔 생각할 때가 있어. 어부한테선 뭔지 모르지만 인간의 원형 같은 것을 느낄 수 있거든. 마음이 늘 파도에 씻기기 때문인지 땅에 정착하여 울타리를 쌓아 올리는 생활이 아니어서 그런지, 어부들한테 비하면 농민들은 차라리 교활한 편이고 상당히 방어하는 자세로 나온단 말이야. 웃고 떠들고 했다면 너의 아름다움 떄문에 그들이 즐거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 p.141


... 서서히, 떠날 아침 배를 타기 위해 사람들은 모여들고 있다. 떠날 사람 전송 나온 사람 짐짝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떠나는 사람 돌아오는 사람, 산다는 것은 결국 오고 가고, 뱃길이든 육로이든 인생은 길이라는 말로 요약되는 것인 성싶다.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저세상도 황천길 저승길이라 하지 않는가. 길이 있기에 시간도 있는 겐가. 탄생은 시간을 가르고 나오는 것, 죽음은 다른 차원의 시간으로 가는 것, 해서 정거장이나 부둣가는 대부분 비애스런 곳이나 아닐는지, 영원한 정착이 없듯 떠남도 영원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 ... p.148


"이런 말 하면 뭣하지만, 처지도 다르고 하지만 한복이를 보게. 그런 기맥힌 일이 어디 있겠나. 그러나 마을을 떠나지 않고, 그 사람들은 타곳에 가도 살 만한 것인데 자식들은 모르지만 내 당대에는 이곳을 떠지 않겠다 그런다지 않던가. 한복이야말로 그 천대, 이로 말할 수 없었지." p.241

"어떤 선배 언니가 한 얘긴데요, 남녀동등주의의 여자들 꼴불견이라는 거예요. 물 빠진 나무막대지 같은 여자라 혹평하면서 그들 주의나 사상에는 인간에 대한 휴머니티의 뒷받침이 없고 에고이즘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거예요. 자기 처지에 대한 불만, 원망, 열등감 그런 것 때문에 핏대를 세우거나 아니면 시류를 좇아가는 의식화되지 못한 경박함, 해서 자칫하면 여성의 특성이 향상되기보다 말살되는 결과가 된다, 남녀는 다 같이 서로 장단점은 있게 마련이라는 거지요. ..." p.272


"형님, 지는 말입니다. 지는요, 지는 말입니다. 후회 안 할 깁니다. 겁이사 나겄지마는요, 발 빼지는 않을 겁니다. 영호하고 약조를 했인꼐요. 살인 죄인으로 세상 끝내기 보담이야 애국자로 세상 끝내는 편이 안 낫겄십니까."

...

"그라고 그래야만 나는 빚을 갚는 기이 안 되겄십니까? 빚 안 지고 살겄다 그기이 지 평생의 소원인꼐요. 관수형님이 처음 지보고 만주 가라 했을 직에는 원망스럽기도 했제요. 하지마는 만주 가서 길상형님을 만나보고 그곳 사정을 보이, 야, 길상형님이 나를 깨우쳐준 기라요. 니는 과거의 굴레를 벗어라 벗어라 그것은 니 잘못이 아니다...... 남이사 머라 카든지 서럽어도 억울해도 이자 나는 기대고 떠받칠 기둥 하나를 잡은 기라요. 사람답게 살자. .... 나는 발 못 뺍니다. 나도 이 강산에 태어나서 소리칠 곤리(권리)가 있인꼐요. 형님이 훌륭하고 그 발밑에도 못 가는 거는 지도 압니다. 하지마는 형님! 지 앞에서는 울믄 안 됩니다. 형님 우는 거를 보이 조금은 같잖다는 생각이 듭니다. 와요, 지 말이 틀맀십니까?" p.343


... 탐욕은 손에 넣기 쉬워도 진실은 잡기 어렵다. 해서 사람들은 진실을 외면하고 맑은 물줄기에서 탈락한다. 숫자만 기억하고 숫자만 믿으려 한다. 숫자는 질이 아니다. 양이다. 양은 원래적인 것, 그러나 사람들은 원래적인 것을 조작한다. 조작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은 숫자를 믿는 것일까, 신봉하는 것일까.' p.371


... 당신은 결코 일본을, 일본인을 초월하지도 극복하지도 못할 거예요. 제가 조선인인 것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당신은 깨끗해요. 드물게... 더러운 게 너무 많은 세상에, 심지어 우국지사라는 허울을 쓰고 소름끼치게 더러운 인간도 많은 세상에.... 지난 진재 때 조선인 학살의 지옥에서 전 죽창과 곤봉을 든 일본아이들을 목격했습니다. 조선아이들에게 돌 던지는 일본아이들은 흔히 보는 일이구요. 그것은 저주받은 일본의 미래입니다. 당신네 역사의 산물이구요." p.415


... 그리고 오늘 조선의 처지를 일본의 처지라 가상한다면 그렇게 치열하게 끈질기게 저항했을까요? 당신네들은 내심 무서운 거예요. 중국에서 만주에서 연해주, 미국, 또 일본 내에서 조선 국내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독립투쟁, 당신네들의 야만적인 탄압은 공포에서 오는 거예요. 거듭되는 학살은 당신네들 공포의 표현입니다. 당신네들이 용기다 생각하고 있는 것은 용기가 아닌 잔인성이에요. 어처구니없이 미화된 셋푸쿠에서 난 그것을 느낍니다. 잔인성, 길들여진 잔인성 말입니다. ... p.420


'어쩌면 세 사람의 관계는 오늘의 현실의 축소판인지 모른다. 아니 역사의 축소판이라 할까? 거창하지만.'

... 오가타와 인실의 경우 한 때 동지였고 서로 깊이 사랑하지만 넘을 수 없는 이민족, 그것도 지배자와 피지배자, 참으로 격렬한 적대 관계가 이들 등 뒤에 있다. 오가타와 조찬하와의 관계는 또 좀 다르다. 개인적인 일이지만 일본여자를 아내로 한 남자, 조선여자를 사랑하는 남자, 동병상련 같은 것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며 이민족이라는 것도 비교적 극복한 우정으로 맺어져 있다. 상반되고 상합되는 이들의 관계는 바로 갈등 그 자체이지만 세 사람의 공통점은 지식인이라는 점이다. 첨예하게 인식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이 기둥 하나를 잡고 이들은 상반된 것, 상합된 것 때문에 갈등하고 역사가 안고 내려온 숙제를 물려받아 이들은 고뇌한다. 참 묘한 짜임새라 아니할 수 없고 찬하가 말한 대로 축소판임엔 틀림이 없다. p.471-472


"잘 쳐묵고 잘 살믄서 유세 부리고 살던 사람들, 그 잘난 사람들 때문에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리야 했는데, 이 강산에서 젤 덕을 많이 본 그 잘난 사람들이 내 강산을 팔아묵고 연명을 하는데 백성들은 설 땅 조차 없으니 이자는 그 잘난 사람들 처분만 기다리서는 안 되는기라. 내 살길 내가 찾더라고 언제꺼지 백성들은 이렇기만 살아야 하노 말이다." p.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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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라 - 들키면 어떻게 되나요? 위픽
최진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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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호흡이 길었으니, 짧은 호흡으로 훕! 읽어보려고 고른 책이었다.

후루룩 읽어버렸는데, 결코 후루룩 넘길 수만은 없는 책이었다.


줄 거 리

제주에서 2달...

시험 준비를 하던 친구가 2달간 숙소 예약한 것을

뒤늦게 깨닫고 넘어온 걸 덥썩 물었다.

거절할 수 없었던 '유진'의 성격이 드러난다.


이 친구에 대한 서운함과 속좁은 마음들을 가득 담고

제주로 넘어왔고,

한여름의 더위와 시원한 바닷바람이 아닌

무시무시한 바람을 맞이한다.


내 애인인 사실 결혼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 질투심에 덜컥 내려온 제주였다.

질서정연했던 나 자신을 놓고

나도 모르게 거짓말이 술술 나오는 데에 놀라면서

제주란 육지와는 동떨어진 이 섬에선

다른 삶을 살아보기로 한다.

'오로라'란 이름으로...

그에게서 계속 오는 전화는 무시하고 있다.


숙소에 죽은 새가 떨어진 걸 보고 어찌할 수 없어

관리인에게 연락을 했다.

죽은 새를 바라보며

그리고 이 새가 폐기물 쓰레기라는데서

뭔가를 느낀 듯,

나는 묻어주길 원하고 관리인도 함께 해주기로 한다.


죽은 새를 묻으며,

나의 사랑을 나의 믿음을 떠올린다.

나는 죽었나?

내 사랑은, 내 믿음은?


바(bar)와 관리인에게서 털어놓은

내 삶 몇 가지...

그 후 나는 전화를 받고,

오로라를 죽이고,

숙소를 예약한 친구의 이름 '세정'으로 불라기로 한다.



읽으면서. ...

들키면 어떻게 되나요?

사랑은 감출 수 없어요.

(책표지를 꽉채우도록 씌여진, 부제와 같은 문장이다)


장문의 시를 읽는 듯 했다.

의식의 흐름대로 진행되는 듯한

제주의 하나하나 일상에서

나는 내가 의식하지 못했던 것을 떠올렸고,

내가 곧 있으면 가게 될 제주도를 떠올렸다.


이 책 속 제주는

나와는 계절도, 모습(바다뷰아님)도 다르겠지만,

그 모습을 한 제주도에서

한 사람에게 있는 다양한 모습을 보는 것과 같았다.


머플러와 모자가 필요할 만큼 바람이 강한 제주도,

돌로 세워진 벽이 그렇게 서 있을 수 있게

바람의 통로가 필요했던

그런 세찬 바람을 통과시켜줘야 했던 제주도,

여태까지의 나와는 같지 않아도 되는,

다른 삶을 살아도 되는 제주도...


사랑을 감추기 위해

나를 감추어 살기 위해

제주로 간 유진...

제주는 끝내 그를 숨겨줄 수 있을까?




마음에 담는 문장

너는 네가 기억하는지도 모르면서 기억하는 것들을 모조리 꺼내보고 싶었다. 그것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이어 붙이면 네 삶이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그럼 너를 타인처럼 사랑할 여지가 생기지 않을까. 노래를 재차 흥얼거리던 너는 그 순간 마음을 두드리는 가사가 있어 핸드폰을 꺼내 문장을 적고 네 번호로 메시지를 보냈다.

안 된대도 아무 상관없어요. 내 마음만 알아줘요. p.7


당장 다가가지 않으면 풍경이 사라져버릴 것처럼 너는 다급하게 신발을 벗고 발코니를 향해 걸어간다. 검은 돌과 하얀 파도,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과 비상하는 새. 창을 연다.

태양과 수평선의 거리는 한 뼘 정도. 바다의 일몰을 바라볼 수 있는 방이다.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너를 지치게 한 복잡한 감정, 피해의식, 타인에 대한 의구심, 이별의 두려움 등은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서 순식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 p.22


어떤 믿음에는 이기적인 구석이 있지. 너는 믿음에 깃든 이기심을 되새긴다. 당신이 반드시 돌아오리라는 믿음은 오직 나를 위한 마음. 당신을 끝까지 믿는다는 말은 나를 절대 배반하지 말라는 요구. 그러므로 믿는 마음에는 이기심보다 큰 외로움이 숨어 있다. 먼저 떠나지 못한 사람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홀로 되삼키는 울음이 있다. 너는 남겨지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이곳까지 왔다. 믿지 않으려고 훌쩍 떠났다. ... p.23


너는 조용히 다짐한다. 이제부터 잠재되어 있는 나를 끄집어낼 것이다. 시험해볼 것이다.

철저하게 숨는 방법으로 보여줄 것이다. 너는 방으로 들어가 내부를 천천히 둘러본다. ...p.24


창 너머 돌담을 바라보며 천천히 커피를 마신다. 검은색 돌과 돌 사이 틈으로 동백나무 푸른 잎이 보인다. 바람이 많은 곳의 돌담에는 저렇듯 바람이 드나드는 통로가 있어야 한다고, 그래야 담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누가 한 말일까. ... 나에게 바람의 통로를 알려준 사람은 누구일까. 나는 어째서 그 말을 기억하고 있을까. ..p.30


... 네가 잊은 것들을 모조리 되살려 이어 붙인다면, 망각을 복원한다면, 그렇다면 타인을 사랑하듯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 너는 네가 망각한 것들을 그리워한다. 망각은 돌에 가까운가 돌과 돌 사이 바람 통로에 가까운가. 망각과 기억 중 무엇에 기대어 아직 무너지지 않고 살아가는 것일까. 아니, 이미 어느 정도 허물어졌는지도 모른다. 완전히 와르르 무너지지 않았을 뿐 어쩌면 귀퉁이부터 조금씩.... p.31


... 밤의 하늘과 바다는 경계가 모호하고, 너는 거짓말의 자유를 생각한다. 이 섬에 너를 아는 사람은 없다. 네가 거짓을 말해도 거짓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다. 너는 이 섬에서 최유진이 아닐 수 있다. 누군가 이름을 물어본다면 '오로라'라고 대답할 것이다. 오로라는 한때 네가 무척 갖고 싶었던 이름. p.37


동물 사체를 아무데나 묻는 거 불법이라고요.

너는 그의 말을 곱씹는다. 죽은 동물을 쓰레기봉투에 버리면 합법이고 묻어주면 불법이다. 불법은 법에 어긋나는 것. 너는 딱 들어맞을 때보다 어긋날 때가 많았다.

너는 관리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말한다.

선생님만 모른 척해주시면.... 제가 몰래 묻겠습니다.

관리인의 눈동자는 밝다. 호박색이다.

...

그럼 같이 하죠. 제가 적당한 곳을 알아요.

공범이 되겠다는 그의 말이 반갑다. p.47


너는 방바닥에 누워 발코니를 바라본다. 잠든 너와 죽은 새의 눈높이는 비슷했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밤마다 새가 죽는다. 사람이 죽는다. 이별한다. 운다. 사랑한다고 말한다. 믿음 없는 사랑은 가능하다. 사랑없는 믿음은 비참하다. 사랑이 제일이란 말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 너는 핸드폰을 꺼내 문장을 적어 너에게 보낸다.

연극은 끝났다.

객석은 텅 비었다.

배우의 잘못을 아무도 모른다. p.49

속속들이 알고 싶진 않았어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아닌 것은 모른 척하고. 비밀이 필요했어요. 사람들이 내 모든 것을 안다는 거, 끔찍하잖아. 하지만 알고 보니 나라는 사람 자체가 비밀이었어. 당신은 누군가의 비밀이 되어 본 적 있나요?

비밀은 묻어버려야지.

나는 죽지 않았습니다.

왜 전화를 받지 않습니까?

들키면 안 되니까.

들키면 어떻게 되나요?

사랑을 감출 수 없어요.

누구나 감추고 삽니다. 한 명쯤은. 아무도 모르게. 어둠 속에서. 홀로 사랑합니다. 그러니 당신도 묻어버려요. 마음에. 심장처럼. 그럼 들키지 않고 그는 당신이 됩니다.

... p.56


... 너는 그 삶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 묻고 새로 시작할 것이다. 너는 연기하듯 중얼거린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로라입니다. p.58


그들이 찍어준 사진을 보다가 깨닫는다. 너는 제주에서 사진을 찍지 않았다. 네가 훼손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벽지와 가구의 스크래치를 사진으로 남겼을 뿐, 바다도 하늘도 아름다운 노을도 그저 바라만 봤다. 네 핸드폰 사진첩에는 그의 사진이 없다. 함께 찍은 사진도 없다.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 전부 지워버렸다. 너는 비밀이니까. 비밀은 흔적을 남기면 안 되니까. 왜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냐는 물음에 그는 대답했다. 두려웠으니까. 무엇이? 사랑도 이별도. 그 대답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 p.62


... 하지만 너는 두렵다. 그의 기혼 사실을 알았을 때 너를 강렬하게 짓누른 감정은 배신감보다 지독한 질투심이었다는 진실을 받아들이기가. 질투는 힘이 세고, 너는 이기고 싶었다. 그래서 한동안 사랑을 멈출 수 없었다. 그 마음을 더는 부정할 수 없다. 너를 낯선 이곳까지 오게 만든 건 사랑도 믿음도 아닌 고작 질투...... 갑자기 웃음이 터진다. ... p.78


우리는 새를 묻었죠.

그의 목소리가 돌연 작아진다. 그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그를 향해 너는 몸을 깊이 기울인다.

그 새가 진짜 죽었는지 확인하려고 땅을 파보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요.

너는 다시 그 밤의 어둠과 거센 바람 소리를 떠올린다. 새는 죽었다. 차게 식었다.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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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렌디피티 - 위대한 발명은 ‘우연한 실수’에서 탄생한다!
오스카 파리네티 지음, 안희태 그림, 최경남 옮김 / 레몬한스푼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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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발명은 '우연한 실수'에서 탄생한다!'


완벽과 최고를 향해 달려온 인류를 허탈하게 하면서도, 당혹스러운 웃음 피식 한번 날릴 문장이다.

어이없이 웃고 지나갈 법한데, 어라? 그게 아니다. 지나가던 사람도 잡아 돌아오게 할만한 내용이다. 우연한 실수에서 다른 것도 아니고 코카콜라, 커피, 누텔라, 고르곤졸라, 샴페인이 나왔다면?


바로 이 우연한 실수를 하나로 나타내 주는 단어가 바로 이 책 제목 '세렌디피티'다.

먼저 세렌디피티가 무엇인가 궁금해할 만한데, 그 단어는 스리랑카의 옛 이름인 세렌디(Serendip)에서 따온 것으로 1754년 호레이스 월폴(영국작가, 미술가)이 만들었다. 오래된 페르시아 우화에 나오는 나라인 세렌딥이란 나라의 지아퍼 왕에겐 세 아들이 있었다. 이 세 왕자들은 세계를 여행하는데 찾지도 않은 새로운 것을 계속해서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 영감을 받은 월폴은 이렇게 '무언가를 찾다가 실수로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을 묘사하고자 세렌디피티란 단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작가 오스카 파리네티는 20년 넘게 음식과 와인 전문가로 고급 식료품 체인점 '이탈리'를 창업하고 성장시키면서 다양한 음식의 역사를 연구했다. 그렇게 공부하게 된 음식에서 바로 '세렌디피티' 사례를 접하게 됐고, 그것들을 가치있게 여겨 많은 전문가들의 안목과 경험을 인터뷰하며 이렇게 책으로 엮어내게 됐다. 이 책은 이 세상에서 '세렌디피티'로 생겨난 48가지의 주제를, 특히 음식(재료)를 다루고 있다.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코카콜라, 누텔라, 커피, 요거트, 브라우니, 감자튀김, 고추, 켈로그 콘플레이크, 팝콘, 안초비, 발사믹 식초, 샐러드, 아이스크림콘, 가나슈초콜릿, 고르곤졸라, 스파게티 볼로네제, 파니노, 럼, 두부 등이 있었는데, 이렇게 맛있는 음식(재료)에 의외로 세렌디피티였다는 게 놀라워 웃음이 났다. 몰랐더라면 그저 맛으로만 즐거워하는 걸로 그쳤을 텐데, 음식의 기원도 '세렌디피티'라는 걸 알게 되니 여기 나온 음식들을 먹는 즐거움이 배가됐다.(사실 이 책을 먹으며 누텔레에 다뤄진 '페레로 로쉐'를 먹었다) 많이들 아는 예일지 모르지만 '커피'의 경우만 살짝 이야기해 보겠다. 에티오피아 남서쪽 카파의 고지대에서 한 양치기는 자신의 염소가 어떤 붉은 베리를 먹고 더 기분 좋게 뛰어다니는 것을 발견한다. 궁금해서 먹어보는 베리를 구워보고 근사한 향이 나오자 가루로 만들어 뜨거운 물을 섞어보게 된 게 커피의 탄생이란다. 우리가 커피 하면 흔히 떠올리는 남미나 이탈리아가 커피의 시작이 아니라는 점, 저렇게 소소한 계기로 커피를 마시게 됐다는 이야기도 뜻밖이고 재미있다.


이 책 속 저자가 인터뷰한 사람과 다룬 음식들이 생소할 때면, 옆에 둔 핸드폰으로 검색해가면서 읽어보았다. 저자가 이탈리아 사람이고 음식(재료) 또한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것들이다 보니 이탈리아 여행 글에서 많이 발견되곤 했는데, 그럴 땐 이탈리아로 날아 가서 이 책에 나온 음식들을 죄다 먹어보고 싶어졌다. 특히 한 번도 맛본 적이 없는 아이스 바인, 헤이즐넛 초콜릿 잔두이오토, 나폴리식 바바, 화이트 트러플은 그 맛이 너무도 궁금하다.


이탈리아에선 음식을 대하는 태도라 상당히 남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전통과 역사가 깊은데다 이탈리아 특유의 감성적이고 열정적인 국민성이 한몫하는 것 아닐까 싶기도 했다. 특히, 저자가 다룬 이탈리아 음식(재료)의 전문가이자 역사를 이루어나간 이들의 자부심, 철학, 애정, 직업윤리 또한 인상적이었는데, 그 내용은 그들의 말을 옮겨 적어 전달하겠다.


마릴리사가 내게 윙크했다. 우리는 역경을 정점으로 바꿀 수 있는 인간 능력에 대해 확고부동한 믿음을 공유했다. 단 세 가지만 있으면 된다.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이를 관리하는 법을 배우며,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것, 우리는 세렌디피티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가 됐다. p.103 <아마로네>


"학교를 졸업했을 때 저는 훗날 와인의 세계에 몸담게 될 거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저는 항상 와인을 마시는 걸 좋아했지만 무엇보다도 와인이 지닌 가치, 역사, 전통을 사랑합니다. 저에게 와인은 문명의 일부입니다. 와인이 주는 여흥, 좋은 와인을 공유하는 성스러움 등을 사랑합니다. 훌륭한 와인을 혼자 마신다는 건 제게는 좀 슬픈 일입니다. 혼자 영화관에 가는 것 같은 느낌인데 이건 제가 못하는 일이거든요. 피렌체는 제 고향이고 키안티는 저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갈 수 있는 유일한 장소지요. 작은 마을 카스텔로 디 아마는 저에게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p.172 <키안티의 검은 수탉>


이 모든 것에는 철학이 있는데, 조반니는 이를 죄책감 없이 단맛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제품을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면 몇 가지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최고의 재료를 고르고, 농부들과 공급자들을 제대로 대우하며, 설탕과 같은 건강하지 못한 재료들을 더 적게 사용하는 레시피를 만드는 것이다. p.180 <초콜릿 가나슈>


"훌륭한 식품 뒤에는 항상 훌륭한 원재료가 있고, 훌륭한 원재료 뒤에는 훌륭한 사람들의 지식과 직업윤리가 있습니다. 경제성을 뛰어넘어, 최고 재료를 공급할 수 있는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재배자들에게 공정하고 수익성이 있는 가격을 지불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p.193 <헤이즐넛 초콜릿 잔두이오토>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다룬 세렌디피티의 정점은 바로 '인류'였다. 사실 이 주제는 나머지가 음식과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에 '인류'를 다룬 건 다소 생뚱맞게 보였다. 하지만 저자가 꼭 다루고 싶었고, 세렌디피티로 살아남은 가장 놀라운 존재가 '인류'라는 데 큰 의미를 두고 있기에 빠뜨릴 수 없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이는 전문가 텔모 피에바니의 기고문으로 함께 설득력을 강화했다.(이건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그저 내가 먹는 것들이 나와 반가워 읽었을 뿐인데, 재미난 일화로 먹는 즐거움도 더해지는데다, 성공스토리를 세렌디피티로 알게 되어 흥미로운 책이었다. 세렌디피티가 음식에서 나아가 '인류'로 이어질 전개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지라 이런 주제 구성도 새로웠다. 완벽과 진보를 추구하며 가는 인류임에도 그들이 이뤄온 문명의 많은 부분이 세렌디피티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인생은 불확실하고, 한계를 지을 수 없다'라는 점을 꺠닫게 하는 것 같다. 세렌디피티가 무조건 갑자기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점이 아니라 인간의 무한한 노력과 도전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점 또한 기억하면서, 그렇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경험이 인류의 발전에 있어서 소중하고 가치가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 세렌디피티는 완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찾아오는데, 중요한 '발견'은 다른 무언가를 찾는 동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혁신을 위한 지성과 본능이 결함처럼 보이는 것을 기회로 바꾸고 고객이 인식하기도 전에 필요를 창출할 때 발생하지요." p.30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브랜딩

#실수의미학

#세렌디피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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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렌디피티 - 위대한 발명은 ‘우연한 실수’에서 탄생한다!
오스카 파리네티 지음, 안희태 그림, 최경남 옮김 / 레몬한스푼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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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어떤 것보다 완벽한 맛이지만, 그 탄생은 완벽하지 않다면? 그것도 우연한 실수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 생각지도 못한 데서 탄생해서 더 재밌고 더 맛나다는 사실!!^^ 더 충격적인 건 인류또한 그런 과정으로 살아남았다는 사실!! 을 알려드립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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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세계사 : 사건편 2 - 벗겼다, 세상을 뒤흔든 결정적 순간들 벌거벗은 세계사
tvN〈벌거벗은 세계사〉제작팀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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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겼다, 세상을 뒤흔든 결정적 순간들

뉴스를 보면 경악을 할 이야기들이 많다. 사회문제뿐 아니라 정치, 경제 다방면에서 우리의 상식과 예상을 뛰어넘는 일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시간으로 버무려지며 과거가 된다. 과거가 된 일들이 뭉쳐 역사가 된다.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가 즐겨보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일들이 집대성된 이야기들이 역사가 된다. 그래서인지 역사책을 보면 그런 이유로, 즉 드라마보다 더 재밌다는 이유로 기대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요즘은 또 역사를 재미있게 구성하고 편집해놓은 책이, 방송이 얼마나 많은지 그것들만 봐도 지루할 틈이 없겠단 생각도 든다. 이 책은 방송에서도 재미있게 보았던 tvn의 <벌거벗은 세계사>의 이야기를 책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특히 이 책은 <벌거벗은 세계사> 시리즈 중 10명의 지식인들이 10가지의 사건을 정리한 책, 그것도 두 번째 책이다. 다룬 사건들은 아래 사진을 참고해 보면 좋겠다.



대략적으론 학창 시절에 배웠던 세계사를 통해 달달 외웠던 일들을 떠올릴 수 있다. 이 책은 역사책이지만 다 같은 역사책이 아니라는 듯, '벌거벗은'이란 단어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기로 작정한 듯 자주 사용한다. 그만큼 세계사에서 몰랐던 사실들을 하나하나 깊이 있게 보여주므로 역사에 대한 사실과 흥미에 한층 가까이 나아가게 해준다.


10가지 사건이었지만, 하나하나가 모두 세계사에서 의미 있는 사건들이었다. 그리스 신화와 민주주의가 이렇게 연결이 되었던 것인지, 인도라는 나라에 힌두교가 이렇게까지 영향력이 있었는지를 제대로 알게 됐다. 항우와 유방이 이런 관계로 중국의 역사의 줄기를 세웠는지, 제2차 세계대전의 발화점이 된 스페인 내전의 영향력이 이 정도였는지, 한 가문에 역대급 여인들이 어떻게 셋이나 나올 수 있는지, 우리나라의 현시점을 보게 하는 듯한 러시아의 라스푸틴의 존재가 당시 어떠했을지, 세계대전에서 학살자로 악명 높은 이들이 어떻게 풀려났는지, 영화에서 멋지게 봤던 CIA의 다른 실체는 어떤 모습인지, 뮌헨 올림픽으로 보았던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의 대립이 현 하마스-이스라엘 전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흥미롭지만 안타깝게 읽었다. 특히 전쟁과 관련해서는 자신의 욕망과 광기를 여지없이 드러낸 인물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고통과 죽음으로 몰아세우는지 제대로 보게 되어 역겹다 못해 소름이 끼쳤다.


개인적으론 이 책을 읽음으로 아이들이 읽었던 <그리스 신화>에 대해 아는 척 좀 해볼 수 있었다. 그 덕에 최근에 알게 된 나보다 오래전에 읽어 기억이 안 나는 아이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 도서관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이 책만큼 <스페인 내전>을 잘 알려주는 책을 만났더라면 조지 오웰과 헤밍웨이의 에세이가 어렵지 않았겠다 싶어 (진작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쉬움과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안도가 함께 들었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와 공화정 등 세력들 간 어떤 대립이 있었는지 이해가 안 됐는데, 이 책으로 스페인 내전의 상황들이 완전히 이해됐다. 과거 교황청에 부패와 죄에 대한 분별력이 이 정도였는지 요즘 시대 교회가 떠올라서 기독교인으로 상당히 부끄러웠다. 중남미에서 반미 감정이 왜 일어났는지도 이해할 만한 부분이었다. 최근에 니카라과 선교 기도를 하고 있어서 이 나라를 찾아볼 기회도 있었는데, 이 나라의 과거를 이 책으로나마 알 수 있게 되어서 운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벌거벗은 세계사>는 인물편, 사건편, 전쟁편, 경제편, 잔혹사편, 권력자편 등 다양하게 시리즈가 나온 상태이며 누적판매는 20만 부를 돌파할 정도로 많은 이들이 찾는 책은 맞다. 어떻게 그런 판매량을 기록할 수 있는지 이 책 한 권만으로 알 수 있었다. 연대기 순으로 한국, 세계사를 봐왔는데, 그와 달리 특정한 주제로 다양한 세계의 면모를 볼 수 있고, 더 깊이 있는 내용으로 알지 못했던 역사 지식을 흥미롭게 제공하는 점에서 다른 책도 궁금해진다.


우리 삶에 갑자기 들이닥친 코로나19로 여행과 이동이 어려워진 시기에 안전하게 세계여행을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다고 제작진은 <벌거벗은 세계사>의 기획의도를 설명했다. 현재는 너도나도 다시 자유로이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된 시기이지만 역사를 아는 데 그치지 않고 보다 나은 내일에 대한 답을 지혜롭게 모색해 볼 수 있는 계기가 이 책을 통해 됐으면 한다는 제작팀의 바람이 꼭 이루어지길 바란다. 역사에 있어서 흥미에서 시작하긴 했지만 이렇게 알게 된 것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책임과 분별을 갖는 어른이 되는 데 자양분이 되길 바란다. 또한,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게 어른다운 행동으로 이어지길 나 또한 바란다.


#세계사

#벌거벗은세계사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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