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라 - 들키면 어떻게 되나요? 위픽
최진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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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호흡이 길었으니, 짧은 호흡으로 훕! 읽어보려고 고른 책이었다.

후루룩 읽어버렸는데, 결코 후루룩 넘길 수만은 없는 책이었다.


줄 거 리

제주에서 2달...

시험 준비를 하던 친구가 2달간 숙소 예약한 것을

뒤늦게 깨닫고 넘어온 걸 덥썩 물었다.

거절할 수 없었던 '유진'의 성격이 드러난다.


이 친구에 대한 서운함과 속좁은 마음들을 가득 담고

제주로 넘어왔고,

한여름의 더위와 시원한 바닷바람이 아닌

무시무시한 바람을 맞이한다.


내 애인인 사실 결혼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 질투심에 덜컥 내려온 제주였다.

질서정연했던 나 자신을 놓고

나도 모르게 거짓말이 술술 나오는 데에 놀라면서

제주란 육지와는 동떨어진 이 섬에선

다른 삶을 살아보기로 한다.

'오로라'란 이름으로...

그에게서 계속 오는 전화는 무시하고 있다.


숙소에 죽은 새가 떨어진 걸 보고 어찌할 수 없어

관리인에게 연락을 했다.

죽은 새를 바라보며

그리고 이 새가 폐기물 쓰레기라는데서

뭔가를 느낀 듯,

나는 묻어주길 원하고 관리인도 함께 해주기로 한다.


죽은 새를 묻으며,

나의 사랑을 나의 믿음을 떠올린다.

나는 죽었나?

내 사랑은, 내 믿음은?


바(bar)와 관리인에게서 털어놓은

내 삶 몇 가지...

그 후 나는 전화를 받고,

오로라를 죽이고,

숙소를 예약한 친구의 이름 '세정'으로 불라기로 한다.



읽으면서. ...

들키면 어떻게 되나요?

사랑은 감출 수 없어요.

(책표지를 꽉채우도록 씌여진, 부제와 같은 문장이다)


장문의 시를 읽는 듯 했다.

의식의 흐름대로 진행되는 듯한

제주의 하나하나 일상에서

나는 내가 의식하지 못했던 것을 떠올렸고,

내가 곧 있으면 가게 될 제주도를 떠올렸다.


이 책 속 제주는

나와는 계절도, 모습(바다뷰아님)도 다르겠지만,

그 모습을 한 제주도에서

한 사람에게 있는 다양한 모습을 보는 것과 같았다.


머플러와 모자가 필요할 만큼 바람이 강한 제주도,

돌로 세워진 벽이 그렇게 서 있을 수 있게

바람의 통로가 필요했던

그런 세찬 바람을 통과시켜줘야 했던 제주도,

여태까지의 나와는 같지 않아도 되는,

다른 삶을 살아도 되는 제주도...


사랑을 감추기 위해

나를 감추어 살기 위해

제주로 간 유진...

제주는 끝내 그를 숨겨줄 수 있을까?




마음에 담는 문장

너는 네가 기억하는지도 모르면서 기억하는 것들을 모조리 꺼내보고 싶었다. 그것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이어 붙이면 네 삶이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그럼 너를 타인처럼 사랑할 여지가 생기지 않을까. 노래를 재차 흥얼거리던 너는 그 순간 마음을 두드리는 가사가 있어 핸드폰을 꺼내 문장을 적고 네 번호로 메시지를 보냈다.

안 된대도 아무 상관없어요. 내 마음만 알아줘요. p.7


당장 다가가지 않으면 풍경이 사라져버릴 것처럼 너는 다급하게 신발을 벗고 발코니를 향해 걸어간다. 검은 돌과 하얀 파도,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과 비상하는 새. 창을 연다.

태양과 수평선의 거리는 한 뼘 정도. 바다의 일몰을 바라볼 수 있는 방이다.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너를 지치게 한 복잡한 감정, 피해의식, 타인에 대한 의구심, 이별의 두려움 등은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서 순식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 p.22


어떤 믿음에는 이기적인 구석이 있지. 너는 믿음에 깃든 이기심을 되새긴다. 당신이 반드시 돌아오리라는 믿음은 오직 나를 위한 마음. 당신을 끝까지 믿는다는 말은 나를 절대 배반하지 말라는 요구. 그러므로 믿는 마음에는 이기심보다 큰 외로움이 숨어 있다. 먼저 떠나지 못한 사람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홀로 되삼키는 울음이 있다. 너는 남겨지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이곳까지 왔다. 믿지 않으려고 훌쩍 떠났다. ... p.23


너는 조용히 다짐한다. 이제부터 잠재되어 있는 나를 끄집어낼 것이다. 시험해볼 것이다.

철저하게 숨는 방법으로 보여줄 것이다. 너는 방으로 들어가 내부를 천천히 둘러본다. ...p.24


창 너머 돌담을 바라보며 천천히 커피를 마신다. 검은색 돌과 돌 사이 틈으로 동백나무 푸른 잎이 보인다. 바람이 많은 곳의 돌담에는 저렇듯 바람이 드나드는 통로가 있어야 한다고, 그래야 담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누가 한 말일까. ... 나에게 바람의 통로를 알려준 사람은 누구일까. 나는 어째서 그 말을 기억하고 있을까. ..p.30


... 네가 잊은 것들을 모조리 되살려 이어 붙인다면, 망각을 복원한다면, 그렇다면 타인을 사랑하듯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 너는 네가 망각한 것들을 그리워한다. 망각은 돌에 가까운가 돌과 돌 사이 바람 통로에 가까운가. 망각과 기억 중 무엇에 기대어 아직 무너지지 않고 살아가는 것일까. 아니, 이미 어느 정도 허물어졌는지도 모른다. 완전히 와르르 무너지지 않았을 뿐 어쩌면 귀퉁이부터 조금씩.... p.31


... 밤의 하늘과 바다는 경계가 모호하고, 너는 거짓말의 자유를 생각한다. 이 섬에 너를 아는 사람은 없다. 네가 거짓을 말해도 거짓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다. 너는 이 섬에서 최유진이 아닐 수 있다. 누군가 이름을 물어본다면 '오로라'라고 대답할 것이다. 오로라는 한때 네가 무척 갖고 싶었던 이름. p.37


동물 사체를 아무데나 묻는 거 불법이라고요.

너는 그의 말을 곱씹는다. 죽은 동물을 쓰레기봉투에 버리면 합법이고 묻어주면 불법이다. 불법은 법에 어긋나는 것. 너는 딱 들어맞을 때보다 어긋날 때가 많았다.

너는 관리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말한다.

선생님만 모른 척해주시면.... 제가 몰래 묻겠습니다.

관리인의 눈동자는 밝다. 호박색이다.

...

그럼 같이 하죠. 제가 적당한 곳을 알아요.

공범이 되겠다는 그의 말이 반갑다. p.47


너는 방바닥에 누워 발코니를 바라본다. 잠든 너와 죽은 새의 눈높이는 비슷했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밤마다 새가 죽는다. 사람이 죽는다. 이별한다. 운다. 사랑한다고 말한다. 믿음 없는 사랑은 가능하다. 사랑없는 믿음은 비참하다. 사랑이 제일이란 말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 너는 핸드폰을 꺼내 문장을 적어 너에게 보낸다.

연극은 끝났다.

객석은 텅 비었다.

배우의 잘못을 아무도 모른다. p.49

속속들이 알고 싶진 않았어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아닌 것은 모른 척하고. 비밀이 필요했어요. 사람들이 내 모든 것을 안다는 거, 끔찍하잖아. 하지만 알고 보니 나라는 사람 자체가 비밀이었어. 당신은 누군가의 비밀이 되어 본 적 있나요?

비밀은 묻어버려야지.

나는 죽지 않았습니다.

왜 전화를 받지 않습니까?

들키면 안 되니까.

들키면 어떻게 되나요?

사랑을 감출 수 없어요.

누구나 감추고 삽니다. 한 명쯤은. 아무도 모르게. 어둠 속에서. 홀로 사랑합니다. 그러니 당신도 묻어버려요. 마음에. 심장처럼. 그럼 들키지 않고 그는 당신이 됩니다.

... p.56


... 너는 그 삶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 묻고 새로 시작할 것이다. 너는 연기하듯 중얼거린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로라입니다. p.58


그들이 찍어준 사진을 보다가 깨닫는다. 너는 제주에서 사진을 찍지 않았다. 네가 훼손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벽지와 가구의 스크래치를 사진으로 남겼을 뿐, 바다도 하늘도 아름다운 노을도 그저 바라만 봤다. 네 핸드폰 사진첩에는 그의 사진이 없다. 함께 찍은 사진도 없다.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 전부 지워버렸다. 너는 비밀이니까. 비밀은 흔적을 남기면 안 되니까. 왜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냐는 물음에 그는 대답했다. 두려웠으니까. 무엇이? 사랑도 이별도. 그 대답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 p.62


... 하지만 너는 두렵다. 그의 기혼 사실을 알았을 때 너를 강렬하게 짓누른 감정은 배신감보다 지독한 질투심이었다는 진실을 받아들이기가. 질투는 힘이 세고, 너는 이기고 싶었다. 그래서 한동안 사랑을 멈출 수 없었다. 그 마음을 더는 부정할 수 없다. 너를 낯선 이곳까지 오게 만든 건 사랑도 믿음도 아닌 고작 질투...... 갑자기 웃음이 터진다. ... p.78


우리는 새를 묻었죠.

그의 목소리가 돌연 작아진다. 그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그를 향해 너는 몸을 깊이 기울인다.

그 새가 진짜 죽었는지 확인하려고 땅을 파보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요.

너는 다시 그 밤의 어둠과 거센 바람 소리를 떠올린다. 새는 죽었다. 차게 식었다.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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